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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보로 보는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의 의거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3. 2. 00:16

     

    몇 차례의 내부 변형이 있기는 했지만 서울역은 일제시대인 1925년에 준공된 건물이 지금껏 쓰이고 있다. 서울역에 갈 때면 이 점이 늘 새삼스러운데, 더불어 건물 자체의 미적 아름다움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이 건물은 1923년 현재의 서울역 자리에 있던, 당시에는 남대문역이라 불리던 멋대가리 없는 목조건물을 대신해 지어졌는데, 예산부족으로 처음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되어 완공되었지만 1924년 준공된 도쿄역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훨씬 미려하다. 

     

     

    서울역 구역사
    남대문역 / 1900년 7월 8일 경부선의 경성역으로 시작돼 남대문정거장으로도 불리며 서울역 완공 전까지 사용되었다.
    1924년 공사 중일 때의 사진
    1925년 9월 준공된 경성역

     

    당시 경성역으로 불리던 이 역사의 시공은 조선철도호텔(☞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을 건설한 아오미 하지메가 했으나 설계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당시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쓰카모토 야쓰시의 유품으로 경성역의 설계입면도 2장이 발견되어지며, 건축학 공부 차 유럽을 여행했던 그가 스페인 출신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스위스의 '루체른 역'을 보고 이를 모방해 설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2016년 발견된 또 다른 경성역 도면

     

    루체른 역은 1971년 화재가 나며 입구를 제외한 대부분이 불탔으나 화재 전의 사진으로 보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화재 후 루체른 역사 복원을 위해 관계자가 서울역을 방문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부는 달라서 건축물 안의 공간 구성은 당시 유럽 역사(驛舍)의 일반적 형태였던 통과식으로(종착역식 역사가 아닌) 지어졌던 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을 모델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화재 전의 루체른 역
    불타는 루체른 역 / 마치 서울역에 불이 난 것 같다.

     

    반면 1924년 준공된 일본의 도쿄역은 종착역식으로 지어졌다. 도쿄역 역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데 지하철 역사와 분리된 한국과 달리 국철 JR선과 마루노우치(丸の内) 전철역의 환승역 등으로 함께 쓰이고 있다. 그래서 도쿄의 전철을 이용할 때면 내·외관을 살펴볼 기회가 주어지는데 외관은 역시 서울역보다 처진다. (우리 것이 우월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차피 일본의 유물이므로) 

     

     

    도쿄역

     

    서울역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중앙의 돔이 꼽힌다. 비잔틴 건축양식에서 이용되는 펜던티브(pendentive)를 이용하여 사각형의 평면에 돔을 올려놓았는데(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사원처럼) 펜던티브에서 얻은 원형의 뼈 대위에 돔을 올리지 않고 펜던티브와 돔을 결합시켜 돔의 높이를 낮춤으로써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이는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외관에 대해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다음백과>의 설명처럼,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이 붉은 벽돌 건물은 한 번만 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다. 

     

    그리고 거기서 인용한 신예경 남서울대 건축공학과 교수의 언급 또한 충분히 인상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는 건물입니다. 붉은 벽돌 틈에 흰색의 화강석으로 수평 띠를 두르고 벽면 모서리에 귓돌을 설치해 변화를 꾀하고 있지요.(※ 흰색의 수평 띠선을 두르고 벽면 모서리에 귓돌·quoin을 설치하여 변화를 유도하는 수법은 부산역사나 신의주역사 등 당시 서양의 고전적 양식을 채용한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의장수법이라 한다) 서울역사는 단위 건축물로서가 아니라 도시 공간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해온 시설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그랬듯 미래 100년 동안에도 그렇겠지요."

     

     

    서울역 구역사

     

    역사적으로 보자면 서울역의 역사(驛舍)는 확실히 통과식이다. 서울역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급진전된 경부선의 통과역이었고, 경영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맡았다. 한국과 만주를 하나로 묶고 대륙까지 넘보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그 야욕의 출발역은 당연히 도쿄역이다.

     

    실제로 도쿄역에서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를 경우,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면 봉천(심양), 신경(장춘),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에 갈 수 있었고, 환승을 하면 마드리드와 리스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서쪽 대륙의 끝까지는 몰라도 중국대륙의 끝에까지 가고 싶은 것이 일제의 욕심일 터, 그러한 입장에서 서울은 매우 중요한 경유지였던 것이다.  

     

     

    만주국의 주요 역이었던 심양참(沈陽站, 구 봉천역)
    심양참의 옛 사진
    일제강점기의 부산역
    일제강점기의 대구역
    일제강점기의 신의주역

     

    이와 같은 일제의 야욕에 일격을 가한 두 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09년, 조선의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살한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1920년, 조선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도를 강우규 의사가 저격한 사건이었다. 그 정확한 날짜는 1920년 9월 2일 오후 5시, 장소는 남대문역 입구 광장에서였으며 저격 수단은 러시아 군인에게 직접 구입한 영국제 폭탄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강우규는 1855년 생으로 당 65세의 노인이었다. 그래서 고령의 나이로 인해 주목받는 면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다. 거동을 못할 정도의 노구는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그는 체격이 청년처럼 당당했고 정신은 또렸했다. 까닭에 그에 대해 '65세 청년 강우규의 의거'라고 표현한 분도 있다. 우리가 보는 강우규의 사진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의 것인데, 그의 눈매는 정말로 젊은이의 눈빛 이상으로 빛을 발하며 곧은 자세 또한 늠름하기 그지없다. 그는 시종일관 이렇듯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강우규(姜宇奎 1855-1920)

     

    그가 태어난 1855년은 철종 6년이니 우리에게는 옛날 옛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서양은 문명과 야만이 함께 진행되던 격동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는 러시아가 (당시 오스만제국의 영토이던) 크림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진격해 러시아 · 영국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샤르데니아공국 및 오스만제국 등이 뒤엉켜 싸우게 되는 이른바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로, 우리가 잘 아는 종군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활약이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영국의 소설가 샤럿 브론테가 죽었으며 낭만파 피아니스트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때 조선은 깜깜했고, 이후로도 제 잘난 맛에 취해 있다가 청나라와 일본에게 된통 당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강우규는 당시 깨어 있는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 일찍이 개화사상을 익혔고 고향인 평안남도 지방에 일찌감치 발을 디딘 장로교회에 몸담아 서구의 문물을 터득하려 애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의학을 배워 한약방으로서 큰 부를 이루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 후에는 북간도로 망명해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의 지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국권 회복에 힘썼다. 

     

    그는 처음에는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에 힘썼으니 남만주 신흥동(新興洞)에 광동(光東學校)를 설립해 조선 청소년들의 자질을 함양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그밖에도 영명학교, 협성학교를 세웠다) 그러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후에는 실질적인 테러리스트로 독립운동에 하고자 마음먹는데, 이는 교육사업에서 무력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방식과 궤를 같이 하는 바, 아마도 안중근의 평전(<만고의사 안중근>)을 집필한 계봉우의 영향이 큰 듯 보인다.

     

     

    독립투사 계봉우(桂奉瑀 1880-1959) / 함경북도 영흥 출생. 북간도 광성학교 교사, 대한광복군 책임비서, 임시정부 북간도대표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계봉우 부부 묘소 / 계봉우는 스탈린의 이주령으로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된 후 그곳에서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저술하고 사망하였으나, 2019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부인과 함께 안장됐다.

     

    강우규는 신문을 통해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3.1운동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물러나고 9월 2일 새로운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도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기회 삼았다. 그리하여 사이토를 살해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후 몰래 조선으로 잠입하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인지라 일경(日警)들의 검문이 느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경성으로 들어온 그는 사이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 부근의 여관에 묶으며 서울역 앞을 답사, 폭탄 투척 장소와 도주로 등을 살폈다.

     

    29일 도쿄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9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열차편으로 상경, 9월 2일 오후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일제는 사이토 총독의 환영식과 경호를 위해 기병 1개 중대의 의장대와 보병 제78연대 소속 보병 2개 대대를 배치하였으나 강우규는 동지 허형과 함께 경계를 뚫고 최대한 가깝게 접근했다. 그리고 거사일인 9월 2일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도의 마차를 향해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굉음과 함께 터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방향이 빗나가 마차 뒷 부근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육군소장 무라다, 혼마치 경찰서장 고무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장 구보, 경성철도관리국 과장 운도, 뉴욕시장의 딸 해리슨 부인과 마차 뒤를 따르던 일본기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중상을 입은 2명은 결국 죽었다) 사이토는 무사했다. (그는 혁대에 폭탄 파편이 박혔으나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 무사했다. 하지만 훗날 정치가로 변신했다가 좌파 청년의 테러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강우규는 폭탄 투척 후 다행히 자리를 피했으니, 이때도 의심을 받아 붙잡혔다가 노인인 까닭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 서울 누하동 임태화의 집에 숨어 지내며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하던 중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을 때도 의연했고 재판을 받을 때도 죽음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한 모습으로 임했다. 그와 같은 모습에 일본인 재판관마저 감복해 경칭으로써 대했으나 사형을 면치는 못했다. 그는 사형 판결 후 항소했으나 형량을 감해 보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1920년 2월 25일, 그가 말한 항소의 변은 이러했다. 

     

    "사이토는 동양평화를 깨뜨렸으며 인도주의를 무시한 자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기에 죽이려 한 것이오. 내가 항소를 함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하게 붙잡혀온 최자남 등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오. (최자남, 오태형, 허형, 김종호가 공범으로 연루돼 함께 사형판결을 받았기에) 그리고 검사가 이르기를, 내가 이름을 팔아 유명해지려고 거사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결코 매명한(賣名漢)아 아니오. 나는 인도주의와 정의와 동양평화와 조국을 위해 거사를 한 것이오."

     

    그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는데, 죽음에 앞서 아들 강중근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울림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강우규 의사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현 서울시 은평구)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우이동으로 이장되었다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후손으로는 월남한 장남 강중근과 손녀 강영재가 있었으나 1985년 12월 강영재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현재 남아있는 혈족은 없다.

     

     

    강우규 의사가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동상에 새겨진 그의 절명시(絶命詩)
    동상은 폭탄을 던지기 직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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