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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15. 23:31

     

    16세기 후반 센고쿠(전국)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종식시켜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아 정복이라는 과대망상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 만들어진 사무라이의 가타나(장도)가 잘 드는가 어쩐가를 시험하기 위해 목이 잘린 빈천한 자였다. 히데요시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자였으니 그와 같은 망상을 품을 법도 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명나라는 물론 인도 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총독에게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 조속히 항복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정복해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조선에는 선조 24년(1591) 통신사 편에 보내온 서신을 통해 상호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치자고 했다. 이와 같은 공갈과 권유가 먹힐 리 없었을 터, 1592년 드디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빌미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어쨌든 우리는 명나라를 칠 것이니 동맹이 싫다면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부산진순절도 / 1592년 5월 23일 왜군의 부산성 공격으로 7년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당시의 여야(與野)였던 동인과 서인은 요즘의 국힘과 민주당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박터지게 싸웠으니 그 당쟁 앞에서는 국가의 안위마저 무시되었다. 이에 임진왜란에 앞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이 임금에게 서로 상반된 보고서를 올림으로써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7년전란에 시달리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앞으로도 전쟁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할런가?)

     

    조선 선조 25년(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 임금은 일족과 백관, 기타 궁인들과 함께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왜놈들이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몽진은 조선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유래가 없던 일이었던 바, 창망하기 그지없었는데 거기에 비까지 내려 도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금과 동궁은 말을 탔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는데 일행이 홍제원에 이를 무렵 비가 굵어져 종이품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임금이 신하들의 꼴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빗속에 몽진하는 선조 임금
    고양시 신도동 옛 숫돌고개(여석령) 마루 / 선조임금은 빗속에 이 가파른 고개를 넘었다.
    비내리는 숫돌고개 벽화마을
    숫돌고개 주택가 벽의 '원조 의주길과 사신단' 푯말 / 의주길은 한양에서 고양,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이어지는 옛길로 조신시대의 옛길 중에도 가장 중요한 지름길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주택가 벽과 전봇대에 걸쳐 그려진 옛 사신들의 모습
    주택가 벽의 여러 안내문
    신도동 새 숫돌고개 / 지금은 서울-파주를 잇는 새로운 숫돌고개가 생겨 위의 옛 여석령은 인근 주민들 이외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근방에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와 왜군 간의 큰 전투가 있었다.

     

    <선조실록>은 북으로 내빼는 임금님 일행의 모습을 이렇게 리얼하게 적고 있다. 그 임금을 쫓아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평양까지 추격해왔다. 크게 겁먹은 임금은 중국 입국을 애걸했지만 명나라는 그 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원군을 보내주었다. 겉으로는 조선을 돕는 듯 보였으나 전장(戰場)이 요동, 혹은 중원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에 6월 15일 요동 총병 조승훈이 5천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의 고니시 부대와 한판 붙었으나 대패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명나라는 7월 17일 이여송을 제독으로 하는 5만 대군의 2차 원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조선군과 합세해 평양의 왜군을 공격한 끝에 이듬해 1월 마침내 고니시 부대를 축출시켰다. 기세가 오른 이여송은 단번에 한양을 탈환하고자 남하했다. 그리고 1월 25일, 고양시 창릉 일대에서 사대수가 이끄는 선봉부대의 전초전이 있었는데, 역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여송은 한껏 고무되어 한양 진격을 서둘렀고, 조선의 관리들도 이를 부추겼다.

     

     

    평양성 탈환도 / 8폭 병풍 중의 3폭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양 방비를 위해 왜군이 총집결해 터인즉 후속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전을 세워 공격하자"는 명나라 장수 전세정의 신중론은 무시되었다. 이여송의 명군이 평양에서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끌고 온 대포에 기인한 바 컸다. 대포를 가진 부대와 없는 부대와의 싸움 결과는 상상으로도 쉽게 결론이 난다. 까닭에 대포 운반에 시간이 걸리는 본진이 올 때까지 당연히 기다려야 했으나 이 같은 전세정의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한양에서는 퇴각한 고니시 부대, 본래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 부대, 전라도로 들어가려다가 이치전투(☞ '광주 금남로와 정충신 장군')에서 패해 올라온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 부대 등, 함경도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의 2만 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왜군이 집결해 있었다. 명나라 대군의 참전에 왜장들도 대체로 코가 빠져 있었으나 유독 고바야카와만이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그는 이미 이치전투에서 권율 장군에 패배한 패전지장이었으므로 물러난 곳이 없던 까닭이었다.

     

    이에 왜군 역시 신중론이 사라지고 결전을 다지게 되었으니, 선봉에 나선 고바야카와는 자신의 부대를 여석령(礪石嶺=숫돌고개)에 매복시키고 명나라 군대의 진군을 기다렸다.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석령은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인 터, 이곳에서 결전을 벌이겠다는 것이 왜군 지휘부의 생각이었다. 그 작전에 이여송이 걸려든 것이었으니, 이여송이 거느리는 1천 명의 기병이 숫돌고개 마루를 넘을 무렵 길 양쪽에서 왜군의 총포가 불을 뿜었다. 

     

    왜군의 기습에 명군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곧 숨어 있던 왜군들이 장도를 휘두르며 튀어나왔다. 거의 1만 명에 이르는 적이었다. 기병의 운신이 불편한 좁은 길목이었고, 비가 온 후의 진흙탕이서 더욱 불리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뒤졌으니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는데, 다만 이여송은 수하장수 이유승을 비롯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활로를 뚫은 덕에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멀리 혜음령까지 달아났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왜군은 그들을 쫓아 혜음령까지 이르렀으나 마침 부총관 양원이 이끄는 명나라 본군이 고개를 넘어왔고, 이에 왜군들이 철수함으로써 이여송의 목숨은 부지되었다.

     

     

    파주시와 고양시의 경계지점인 혜음령 고개마루
    벽제관 터 / 유서 깊은 역원(驛院)으로서의 유명세에 '벽제관 전투'라는 말이 생겨났으나 실제 전투는 숫돌고개에서 벌어졌다.
    1900년대 초의 벽제관 사진 / 벽제관은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 관리 등이 지나는 의주로의 중요 건물이었다.

     

    이후 이여송은 왜군과의 전투를 노골적으로 회피하였으니 제발 철수하지 말아 달라는 조선 재상 유성룡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개성까지 물러났고, 다시 평양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한 채 중국에서 온 심유경이라는 장사꾼 출신의 유격대장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진행되는 휴전 협정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명나라 주둔군은 이 땅에서 왜군 이상의 온갖 못된 짓을 벌였고, 너무 배불리 먹은 나머지 오버이트를 해댔다. 배고픈 조선 백성들은 그들의 토사물을 먼저 먹으려고 싸워댔다.

     

    아. 휴전 협정이라도 빨리 진행되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서로 밀땅을 하느라 지지부진했는데, 그나마 심유경은 과거의 사기꾼 기질을 발휘해 온갖 거짓말로 회담을 이어갔으니, 결과는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이 땅에서 벌어진 그 협잡의 증거가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남아 있다. 여러 모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비석이나, 그 비석은 과거 이 땅에서 중국과 일본이 조선이 운명을 결정짓는 모종의 회담을 은밀히 진행했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증언한다. 비석에는 '心遠亭 倭明講和之處'(심원정 왜명강화지처)라고 쓰여 있다.  

     

     

    바로 이 비석.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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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