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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난 왜군, 근대 일본군과 미군, 용산강 그 오욕의 강물을 넘어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23. 19:18

     

    * '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에서 이어짐.

     

    심원정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바로 위 언덕에 있던 정자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패배하던 왜군과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따라서 이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후 이곳은 고종 때의 영의정 조두순(1796~1870)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고,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碑).라고 음각된 비가 남아 있다.  

     

    윗글은 2016년 용산문화원 뒤 오래된 느티나무와 천연기념물 6호 백송이 있던 공터에 세워졌던 '심원정터' 안내문의 내용이다. 하지만 즈음하여 심원정이 복원됐고, 이에 지금은 '현재는 정자는 없고'라는 문구가 빠진 새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진실을 말하자면 옛것이나 새것이나 다 엉터리다. 뿐만 아니라 2003까지 존재하다 고사(枯死)한 백송 앞에 쓰여 있는 안내문도 엉터리이고, 그 아래에 세워져 있는 '心遠亭 倭明講和之處'(심원정 왜명강화지처)가 음각된 비석과 안내문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엉터리들이다.  일단 그 사진들을 보자.   

     

     

    복원된 심원정
    정자 앞 안내문
    정자 앞의 백송 안내문
    정자 부근 풍경
    정자 아래 왜명강화지처 비석과 안내문
    문제의 비석 / 1.9m의 큰 비석이다.
    높이 29m, 가슴둘레 6.3m, 수령 600년의 이 느티나무는 진짜다. / 뒤편 왼쪽으로 문제의 왜명강화지처 비석이 보인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곳에서 명나라군과 왜군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된 적이 없으며, 이상은 모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라는 일본인에 의해 조작된 역사가 마치 사실인양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날조된 역사에 편승한 안내문까지 제작돼 국민에게 홍보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개탄할만한 허위의 역사는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김명수 교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일본 오사카의 어느 고서점에서 <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附人事紀念寫眞>이라는 이름의 사진첩을 발견하고, 그 사진들 속에서 사진첩의 주인공인 이노우에 요시후미라는 평식원(平式院)* 도량형 제작 기사가 이후 조선에서 (만주 석탄 채굴 을 목적으로 한) 광업, 과수원 경영, 제약유통업, 유지공업, 토지경영 등의 광범위한 사업을 경영하였으며, 그렇게 축적한 부의 일부를 자신이 근무했던 도량형소(度量衡所. 현 용산종합타운 건물) 부근의 별장 조성에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평식원은 1902년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대한제국 궁내부 산하 관청이다. 

     

    ** 이노우에는 조선정부가 건립한 용산 군기창의 건립과 운영에도 관여했으며, 이후 사업가로 변신하나 사업가로서는 별다른 성공을 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899년 한국에 왔고 1940년 돌아갔다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도량형법」의 제정 및 개정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제국관보> 1905년 3월 29일자(오른쪽)와 1909년 9월 21일자(왼쪽)의 1면 / 1909년의 개정 내용을 보면 종전의 척량법(尺兩法)은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으로 바뀌었고, 당시 고빙되었던 일본인 기사 이노우에는 한국의 도량형 제도를 일본의 그것과 통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노우에 요시후미와 그 시절에 사용되던 도량형 원기(度量衡 原器)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사진)

     

    위 안내문의 설명대로 이곳에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별서지 심원정(心遠亭)이 있었다. 이노우에는 용산강(한강)의 장관이 바로 눈앞에 펼치지는 절경과 아름드리 고목과 괴목 울창한 주변 숲의 아름다움에 반해  용산진(龍山津) 심원정과 그 부근의 땅을 매입한 후 자신의 별장을 꾸몄다. 그리고 1940년 11월 3일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애정을 가지고 가꾸었는데, 그는 그곳에 한·일과 관련된 유서 깊은 역사의 흔적도 하나 남겼으면 했다.

     

    (내 상상이긴 하지만) 그래서 만든 것이 위의 심원정 왜명강화지처 비석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앞서 말한 벽제관 전투를 칠천량 해전, 울산성 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3대 승첩으로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벽제관 전투는 병력수도 크게 부풀려져 1만여 명의 명나라 군대와 5만 왜군의 전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때 크게 패한 이여송은 이후 전의를 상실한 채 심유경 · 고니시 간의 강화협정에만 매달렸다고 부언한다. (후자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됨)

     

    이때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 용산진이었고, 명나라 심유경은 고니시의 막사를 들락거리며 고니시 및 가토 기요마사와 정전(停戰)회담을 진행했다. (놀랍게도 이때 조선을 일본과 명이 분할한다는 내용이 정전 의제로 올려진다 / 앞서도 말했지만 심유경은 군인이나 관료가 아닌 협잡꾼 장사치 출신이었고, 그의 독단과 세 치 혀에 놀아난 회담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알고 있던 이노우에는 용산진에서 있었던 휴전 회담을 제 집 뒷마당으로 끌어들였다. 즉 심원정 후원을 임진왜란 당시의 휴전 회담 장소로 만든 것이었다.

     

    이곳이 심유경 · 고니시 간의 휴전 회담 장소로 쓰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조선일보 박종평 기자는 '(심유경이) 배에 이르러 고니시, 가토와 회담했다(到船 招平行長與言 而淸正亦會 相迎講和 /1593년 3월 27일 <선조실록>)'는 내용을 들어 회담이 왜군 막사가 아닌 배 안에서 진행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일요신문 박종인 기자는 일본 승려 운쇼율사(雲照律師) 기록(<전쟁터의 꽃·戦場の花-雲照律師満韓巡錫誌-> 田中清純, 1907년)에 나오는 운쇼 일행의 심원정 방문 내용* 중에 '심원정 왜명강화지처' 비석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음을 들어 이 장소에 대한 역사성을 부인하고 있다.

     

    * "일행은 용산의 심원정 이노우에 거사(井上居士)의 별저(別邸)로 옮겼다. 정(亭, 심원정)은 또 일파루(一波樓)라는 이름이 있다. 언덕에 위치해 한강에 닿았다...."로 시작되는 방문 기록에서 의당 거론되어야 할 비석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조선 측의 기록에서도 '심원정 왜명강화지처' 비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아니 용산의 심원정이라는 정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그 이름은 아마도 조두순이 별서를 지으며 붙였으리라) 그런데도 비석에는 분명히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라고 써 있는 바, 이 비석은 새로운 별장 주인 이노우에의 작품(?)임이 틀림없겠는데, 거기에 그는 또 '왜(倭)'를 앞에 두는 실수까지 거듭한다. (이 비석을 명나라나 조선이 세웠다면 '명왜강화지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

     

     '심원정 왜명강화지처' 비석에는 이 비(碑)가 언제 건립되었다는 명문은 당연히 없고, 기타 내용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비를 오래된 비석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이노우에의 고의성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후원의 멋드러진 백송 또한 심유경 · 고니시가 1953년 회담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고 거짓으로 떠벌렸을 것인데, 그 가짜 역사를 올해 3월 용산구청장 성장현이 안내문을 세워 진짜 역사로 만들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온 우민(愚民)들의 탓이니, 그 치욕의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버텨온 백송은 2003년 7월 결국 말라죽고 말았다.  

     

    용산구청장은 길에서 보이게 만든 비석 안내판에도 심유경과 고니시의 강화 회담 이야기를 써 놓았으며, 백송의 자리에서 용케 자생했다는 후계목 안내판에마저 그 가짜 역사의 불명예를 강조해 덧칠해 놓았다. 나는 그 어린 나무와, 지금도 그 자리에서 꿋꿋이 명맥을 이어가는 아름드리 고목에게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용산을 거쳐간 아픔의 역사는 그 오욕의 강물을 넘어 새 시대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거짓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길에서 보이는 비석과 안내문
    돌틈에서 자연 발아했다는 백송의 후계목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군이 주둔하며 없어지게 된 용산 둔지미 마을을 조명한 용산역사박물관의 부스
    용산 군기창과 건설 중인 병영 / 이노우에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조선군 참모 마쓰이시 야스하루(松石 安治) 대좌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대장의 명령으로 용산에 제8사단 임시병영을 급조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었다.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화된 용산을 다룬 용산역사박물관의 부스 / 왼쪽 아래는 조선총독부 산하 용산인쇄국에서 인쇄된 '한일합방공고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공고문'
    용산 일본군 보병 17연대와 18연대의 병영 / 보병 17연대는 제20사단 소속으로 1916년 4월 용산에 배속되었다.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건물 / 일제강점기 조선 주둔 일본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현재 미8군 부대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다.
    용산 조선총독 관저
    그곳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였고 한국전쟁 후에는 주한미군 캠프가 만들어졌다.
    미군 용산기지를 다룬 용산역사박물관의 부스
    그리고 또 다른 비극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 양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안정효의 소설을 영화화한 1991년 작으로 용산이 아닌 어떤 시골마을이 무대가 됐다.
    반면 서구의 대중문화가 유입되는 창구 역할도 했다.
    이 부스에서는 그때 미8군 밤무대 가수로 서게 된 현미 씨가 영상 스토리텔러로써 당시를 회상한다.
    올해 3월 개원한 용산역사박물관
    용산역사박물관은 용산철도병원(1928년) 본관을 리노베이션하여 탄생했다. 건물 자체도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용산역사박물관 옥상에서 본 신 용산과 구 용산 / 용산은 지금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옛 용산역 / 용산역을 빼고는 용산을 말할 수 없다. 용산역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이 경의선을 급히 부설하여 시발점으로 삼은 것이 시초이다. 당시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1906년 세워진 콜롱바주 양식의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이후 경의선은 분단의 고착화와 함께 기능을 크게 잃었지만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생각이 날똥말똥한 구 용산역과 광장
    2003년 12월 29일 준공된 현 역사와 복합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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