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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의에 관한 진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 4. 23:23
앞서 2020년 11월에 공개된 새로운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말하며 그 해시계의 시반(時盤)에 새겨진 중국인 하일지의 북극고도(위도)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미 세종 때 수도 한양의 위도를 산출해냈음에도 이후로는 사대(事大)만을 일삼으며 천문과학을 등한시한 까닭에 결국 숙종 때 이르러서는 중국인이 산출한 위도에 의거한 시계를 만들어 써야 하는 신세가 됐던 것이다(☞ '퇴보하는 우리의 천문과학 - 앙부일구에 얽힌 일화') 말했다시피 독자적인 하늘을 가지려 했던 세종대왕의 의지는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는 없었으니 그때의 흔적만이 만원권 지폐에 아련할 뿐이다.
이번에 공개된 해시계
작년 11월 18일, 미국으로 반출됐던 보물급 앙부일구 1점이 국내로 들어와 공개됐다.
'북극고 37도 39분 15초'의 명문
현재 통용되는 만원권 지폐의 앞면에는 세종대왕 표준영정과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와 훈민정음, 뒷면에는 세종 때 만들어진, 아마도 혼천의(渾天儀)로 여겨지는 천체 관측기구와,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와, 국내 최대의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이 그려져 있다. 세종대왕의 과학 창달에의 의지를 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아쉬움이 있다. 만원권 지폐의 도안자는 그 기구를 정말로 혼천의로 알았을까 하는 것인데,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의 설치된 혼천의 틀을 보면 그랬을 법도 하다.
만원권 지폐 뒷면 도안
세종대왕 상 앞의 혼천의
남산 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 앞의 혼천의
거두절미하고 말하거니와 그것은 혼천의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혼천의로 착각하는 것은 우선 혼천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혼천의가 전하지 않는 까닭이니 그 당시 정초·박연·김진 등이 만들었다는 혼천의는 당시 만들었다는 앙부일구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를 짐작하기 힘들다. 지금 우리가 혼천의로 여기고 있는 그 기구는 1669년 과학자 송이영(宋以潁)이 만든 혼천시계라는 자명종시계의 일부로서 국왕인 현종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송이영은 국립천문대인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이자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였던 사람으로 중국의 혼천의를 모방한 모양새의 자명종을 만들었다.(중국의 것은 1657년 네덜란드 크리스티안 호이겐스가 만든 진자 시계를 모방했다) 이것이 중국의 혼천의와 비슷한 까닭에 천문관측기구 혼천의로 불려지고 있는 것인데, 현종 때는 따로 혼천의가 제작되었다고 전한다. 다만 <현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혼천의가 제작되었으되 세종 때의 것과 달리 매우 조악한 듯했으니 실록이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유지가 만든 혼천의는 만든 법이 엉성하였다. 우선 옆에다 누주(漏籌)를 장치하여 물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를 실끈으로 혼천의 허리 부분에 매어 상하 운행의 기틀로 삼았는데, 간단하고 엉성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1664년 <헌종실록> 10권의 기사)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와 같은 계통의 것으로 보고 있는데 꼭 똑같지는 않더라도 이와 흡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작동원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개의 추 중의 한 개가 움직여 시간을 맞추는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키고 직경 3cm가량의 안에 들은 24개의 쇠공이 홈통 안으로 굴러 내려가 종을 치도록 하는 형식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혼천시계
1930년 인사동에서 엿장수의 수레에 실려 있던 것을 인촌 김성수가 구입해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연합뉴스 사진)
사진에서 보다시피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혼천시계는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설치된 혼천의 및 기타 남산이나 영릉 등의 모사품과 똑같다. 즉 송이영의 자명종시계를 흉내 낸 물건을 만들어 천체관측기구 혼천의라고 우기고 있는 것인데, 상식선으로 생각해도 이 기구로는 천문관측이 불가능하다. 혼천의는 아래 그림처럼 설치된 여러 환(環)들을 움직여 원하는 천체에 촛점을 만든 후 망통(望筒)을 통해 관측하는 것이 기본 원리다. 즉 망통이 접안렌즈의 역할을 하는 것임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혼천시계에는 망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로 향해진 대롱을 망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중간에 지구의로 여겨지는 둥근 공이 가로 막혀 있어 시야를 차단시킨다. 원천적으로 관찰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아닌 것이다.
지금 조선시대 혼천의는 괴담 배상열(1759~1789)이 1774년 도산서원의 것을 보고 만들었다는 선기옥형(璿璣玉衡)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화양동에 은거할 때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고 하는 목재 혼천의 2점이 전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천상의 관찰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인 모든 도(道)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따라서 혼천의는 실제 관측용이 아닌 교보재로써 쓰였다.('조선의 유학자들이 사용한 혼천의 작동모델 복원'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의 논문) 완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 있는 우암 송시렬의 혼천의 역시 제자들에게 서경(書經)에 나오는 기형율려(璣衡律呂)를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화양구곡과 그 문화유적에 대한 종합적 고찰' 2007년 이상주·李相周의 논문)
우암 송시열의 혼천의
'선기옥형도'의 혼천의 설명문
선기옥형을 만든 괴담 배상열은 요절한 천재 학자로 천문학과 성리학의 접목을 시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최근 복원된 도산서원 혼천의를 보면 망통이 존재하는 바, 그 본래 역할은 관측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증거가 <현종실록>의 내용으로, 1661년(현종 2) 집의(執儀) 최유지로 하여금 수격식(水激式) 혼천의를 만들게 한 것은 당시 빈번히 출현했던 객성(客星)을 관찰하기 위함이었으며, 1664년 이민철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만들게 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최유지의 것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이민철은 그 공으로 쌀과 면포를 하사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한다) 다만 혼천의는 그 작동의 복잡성으로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없었던 바, 대부분 교육용으로 쓰이고, 보다 실용적인 간의(簡儀, 간단한 혼천의)가 천체 관측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장영실 과학관의 간의
간의가 놓였던 창경궁 관천대
계동 현대사옥 내의 관상감터 흔적
종묘 앞 앙부일구대
혼천의와 달리 해시계 앙부일구는 공중시계로써 널리 쓰였다.
창경궁 후원의 앙부일구
바깥지름 35.2cm, 안지름 24.3cm, 높이 14cm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845호 앙부일구의 모사품이다. 경복궁 사정전, 덕수궁 석조전, 창덕궁 후원에도 같은 모사품이 놓였다.
창경궁 앙부일구 설명문
덕수궁 석조전 앞 앙부일구
2016년 케이옥션에 나왔던 혼천의.
케이옥션 메이저 경매에 1871년(고종 8년) 제작된 혼천의가 나온 것을(추정가 2억원~6억원) 국립박물관이 매입해 공개하였다. 목재로 만들어졌음에도 환의 형태 등이 현존 혼천의 중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하며 실제 천체관측용이 아닌 교육교재로써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19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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