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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보하는 우리의 천문과학 - 앙부일구에 얽힌 일화
    거꾸로 읽는 천문학개론 2020. 12. 26. 16:20


    조선시대의 해시계를 부르는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말은 일단 어렵다. 이에 먼저 뜻을 풀이하자면 '하늘을 우러러보는(仰) 가마솥(釜)의 해 그림자(日晷)'로서, 문자 그대로 솥에 비치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끔 만든 시계이다. 제작 시기는 세종조로, 세종대왕은 이천과 장영실로 하여금 해시계를 만들게 한 후 궐내의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 등에 두었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의 왕래가 많은 궐 밖의 혜정교(惠政橋, 현 종로 광화문우체국 부근에 있던 다리 )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하여 백성들도 시간을 인지해 활용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가 설치되었던 것이니 생활의 도움은 물론 농사에도 보탬이 되도록 시계의 수영면(受影面, 해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는 시각선과 함께 절기선을 두었다. 아래의 <세종실록>에는 그와 같은 세종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니, 시계의 시각을 글자로 표시하지 않고 12지신상 동물그림을 새겨 넣었다고 돼 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서, 설치된 날은 세종 16년(1434년) 10월 2일이었다.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해 그림자)을 관측하였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이 명(銘)을 짓기를,


    "모든 시설(施設)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가리키는 방향)과 오방(午方,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를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마주 보았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 12지신)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세종대왕 상과 앙부일구

    유감스럽게도 세종조에 제작된 앙부일구는 지금 남아 있는 게 없고 17세기 이후 제작된 7점 가량의 해시계가 전한다. 앙부일구는 시간과 절기 뿐 아니라 일출·일몰 시간 및 방위까지 측정할 수 있는 다목적의 과학기기다.  


    창경궁 앙부일구

    바깥지름 35.2cm, 안지름 24.3cm, 높이 14cm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궁 박물관 소장 앙부일구(보물 845호)의 모사품이다. 경복궁 사정전, 덕수궁 석조전 앞에도 같은 모사품이 놓였다.

      

    종묘 앞 대석(臺石)

    세종대왕 때 해시계를 놓았던 자리로, 중종 시절 어떤 놈이 시계를 훔쳐간 후로는 다시 설치되지 않은 듯하다. 대석은 광무 2년(1898년) 전차궤도를 부설하며 묻혔다가 1930년 발굴되었다. 이후 탑골공원에 보존되다 2015년 종묘공원이 정비되며 원래 자리 부근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뜻과 발음이 어려운 이 '앙부일구'라는 말은 사실 별로 쓰이지 않았던 듯하니 아래 <중종실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종 이후에는 거의가 영대(影臺)나 일영대(日影臺)라는 말이 사용된다. 즉, 간단하게 '해시계'라는 단어를 썼던 것이다. 


    15일 새벽, 광화문을 거쳐서 들어와 정원에 가서 영대 앞에서 도승지를 만나 고변하려 하니.....


    주상이 사균에게 묻기를,


    "15일에 고변자가 일영대 앞에서 너를 보고 아뢸 일이 있다고 고하였는데, 네가 어찌하여 돌아보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사균이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사진(仕進)할 때에 과연 일영대 앞에서 아뢸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간 이임이 아뢰기를,


    "요즘 재변이 잇따랐는데 혜성과 성운(星隕)은 예전에도 드물던 것입니다..... 또 도둑이 1백여 년이나 전해 내려온 일영대를 뜯어 훔쳐갔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국법이 있다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을 힘써 세우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조선시대의 해시계 하나가 미국의 골동품상 등을 떠돌다 최근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이 해시계는 조선 후기 제작된 지름 24.3cm, 높이 11.9cm의 구리 제품으로, 시계의 용무늬 다리장식 등은 보물로 지정된 기존 앙부일구 2개의 장식보다 화려하고 정밀하게 제작되었으며, 시각선과 절기선이 표현된 수영면과 글자들은 섬세한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마감되어 궁중에서 사용된 물품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공개된 해시계

    오목한 수영면에는 은입사로 시각선을 그렸고 영침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시반의 왼편에는 동지부터 하지, 오른편에는 하지부터 동지까지의 24절기가 13줄의 가로선으로 새겨져 있다.

     

    수영면의 구성

    그림자가 비치는 수영면의 시각선은 해가 뜨는 묘시(卯時, 5~7시)부터 해가 지는 유시(酉時)까지 7개가 그어져 있으며, 각 시각선 사이에는 1각(약 15분)을 뜻하는 8등분 된 선이 그어져 있다.  


    새로운 해시계가 공개되던 날

    언제 반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골동품상에서 개인이 구입한 후 경매에 나왔던 것이 지난 6월 매입돼 국내로 들어왔다.11월 1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시적으로 공개되었으나 지금은 코로나 19 사태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이 해시계는 제작시기의 정확한 상한선(上限線)을 알 수 있다. 시반(時盤)에 은입사된 '북극고 37도 39분 15초'의 명문 때문이다. 즉 조선의 천문서인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는 "숙종 39년 청나라 사신 하국주가 한양 종로에서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해 37도 39분 15초의 값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와 같은 한양의 고도가 시반에 새겨져 있으므로 이 해시계의 제작시기가 숙종 39년인 1713년 이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정확한 시간을 얻게 되는 해시계임을 알 수 있다)



    '북극고 37도 39분 15초'의 명문

     


    내가 안타까워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앞서 '민족의 얼, 북두칠성(II)'에서도 언급했듯 조선에서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가 이미 수도 한양의 북극출지(위도)를 산출해낸 바 있다. 아울러 <세조실록>에는 "(세종이) 이순지에게 명해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 세종 때 제작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기구), 규표(圭表방위·절기 등을 측정하는 천문 관측기구), 대평(大平, 큰 저울), 앙부일구와 보루각·흠경각은 모두 이순지가 임금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 해시계 제작을 감독한 이천과 장영실 위에는 또 천재 천문학자 이순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순지는 코페르니쿠스보다도 100년이나 앞서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었다.(아울러 만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혼천의의 실제 제작자로 여겨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순지 위에는 그를 독려한 세종대왕이 있었으니 <세종실록>에는 사직하고자 하는 이순지를 붙잡아두려는 상(임금)의 노력이 여러 장에 걸쳐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의 임금들에게는 그러한 노력이 없었고 조선의 하늘을 가지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대한 사대만을 일삼았던 까닭에 위의 일영(해시계)에는 중국인 하국주가 측정한 한양의 고도가 새겨지게 되었고, 북극을 가리키는 영침과 시간을 가리키는 수영면의 눈금은 하국주의 측정값에 따라 제작돼야 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지금도 다르지 않으니, 근자에 중국과 일본의 우주선이 하늘의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달과 소행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는 외신들이 쇄도하자 이를 보도하던 KBS 앵커우먼이 한숨을 내쉬며 부러움을 나타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12월 7일 새벽, 무인 탐사선 하야부사 2호가 지구에서 3억㎞ 떨어진 소행성에서 채집한 토양 시료를 가지고 지구에 도착함에 열도가 떠나가도록 열광했다. 탐사선이 2014년 지구를 출발한 지 6년 만에 이룬, 그들 말대로 '완전·완벽한 성공'이었다. 


    중국 역시 축제 분위기이니 12월 1일, 달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무인 탐사선 창어 5호는 달 표면에서 토양 시료를 채집한 후 지구 귀환 길에 올랐다. 지난 1976년 소련 우주탐사선 루나 24호 이후 44년만의 일이었다. 창어 5호가 착륙한 몬스 륌케르라는 지역은 12억1000만년 전의 토양과 암석이 존재하리라 예상되는 곳으로서 태양과 지구의 진화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국은 토양 시료의 분석을 위한 실험실을 설립했으며 일부를 다른 국가와 공유하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어찌됐든 마냥 부럽기만 한 일이다. 


    이웃 나라가 이렇듯 비약적 발전을 보이는 반면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듯하니 나로호 프로젝트가 마침표를 찍으며 시작된 '한국형 발사체' 프로젝트가 이를 말해준다. 그로써 우리는 지금 다시 걸음마를 시작했다. 그동안 러시아에서 액체연료 로켓을 그대로 들여오는 형태로 나로호 개발이 이루어졌던 까닭에 2002년부터 연구되던 국산 액체연료 개발이 중단돼버렸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기술력에 얹혀가려 했던 나로호 프로젝트의 당연한 귀결이랄까..... 



    하야부사 2호가 6Km 전방에서 찍은 소행성 류구(龍宮)의 실제 모습


    소행성 류구의 탐험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하야부사 2호의 상상도


    22일 오전 7시 29분, 류구에 하야부사 2호의 두 번째 착륙시도가 성공하자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이로써 일본은 2005년 하야부사 1호에 이어 또 다시 소행성에 우주탐사선을 착륙시킨 기록을 가지게 됐다. 소행성 착륙은 미국도 아직 이루지 못한 고도의 과학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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