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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 19. 23:55

     

    오는 24일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킨 날이다.(1624년 1월 24일) 그 '이괄의 난'의 성격과 주인공 이괄에 대한 평은 사가(史家)들의 입맛과 성향에 따라 다르다. 마치 같은 사안을 두고 다른 해석과 평가를 내리는 오늘날 여·야의 관점처럼. 하지만 그가 반란을 이유에 대해서는 사가들의 시각이 비슷하다.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1등 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2등 공신이 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것은 그저 여기까지 이고 그다음은 또 다르니, '무신인 그가 2등 공신이 된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과, '매우 억울해 난을 일으킬만했다'는 의견으로 나뉜다. 1623년 광해군이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오랑캐 후금을 대접하는 실리외교를 펼치자 서인이 발끈했다. 그들은 본시부터 명나라를 향한 사대에 목을 매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으니, 이에 김류, 이귀, 이괄 등이 광해군을 몰아낼 역모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거병했으나 막상 일이 터지자 김류는 겁을 먹고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나선 이괄은 그럴 수 없었던 바, 북소문인 창의문을 격파하고 궁궐로 돌진,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무인(武人) 이괄의 입장이기도 했지만 본래 무인과 문인은 성정이 다름이었다. 이를테면 1456년(세조 2) 이른바 사육신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그 D-day에 이르러 무인인 유응부(兪應孚)는 제 이름자처럼 진실은 통한다고 믿고 대사를 도모하려 하였지만,(孚는 '진실 부' '믿을 부'이다) 성삼문을 비롯한 나머지  문인들은 분위기가 안 좋다며 뒤로 미루었다가 결국 역모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1623년의 인조반정 역시 이괄이 제 이름자처럼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않았다면,(适은 '빠를 괄'이다) 반정의 무리들은 필시 세조 때의 사육신 꼴이 났을 것이다.

     

     

    김류(1571-1648)의 초상
    이귀(1577-1633)의 초상

     

    사정이 이러했던 바, 이괄은 자신이 1등 공신에 오르지 못한 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화관 잔치에서 김류보다 아래 자리에 배석되었을 때 불평한 것 외에는 크게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김류와 이귀는 처음부터 반정을 계획한 사람이었고 또 능양군(훗날의 인조가 되는)을 추대한 킹 메이커였으므로 1등 공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며 애써 자신을 달랬다. 

     

    다만 자신에게 준비된 감투가 한성판윤(서울시장)인 점에는 불만을 표해 직을 사퇴했다. 임금인 인조나 병조판서가 된 김류가 이때 이괄의 속을 헤아렸다면 난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아무튼 이에 이괄에게는 조금 나은 자리가 제수되었으니 평안도 병마절도사 자리가 그것이었다. 겸해서 부원수가 되었는데 이때 임금은 특별히 검을 하사하고 임지인 영변 부임길에도 친히 배웅을 했다.(1623년 5월)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나는 임지였던 바, 이괄의 표정은 내내 떠름했다. 

     

     

    정사원종공신녹권(靖社原從功臣錄券). 인조반정의 공신첩으로 김류, 이귀, 김자점 등 10명이 1등 공신에 올랐고, 이괄 이하 15명이 2등 공신에, 박유명 이하 28명이 3등 공신에 올랐다.

     

    그런데 이를 기화 삼아 출세하려는 자들이 있었으니, 문회(文晦)와 허통(許通) 등이 그를 고변했다.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문회가 가로되, (이괄이) "문신들에게 속아 반정을 일으켰다. 섭섭함을 갚아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으나 확인되지 않은 말이었다. 정황으로 보자면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반란의 생각은 없었고,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랑캐들이나 막자며 후금의 침입에 대비한 1만5천 명 병사들의 조련에 매진해 마지않던 마당이었다. 인조 또한 고변을 믿지 않았으니 이괄이 그럴 리 없다며 한사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바뀐 1624년 1월의 어느 날, 이괄 앞에 금부도사 고덕률 일행이 나타났다. 지금 한양에서 당신의 아들과 지인인 기자헌 등이 역모 혐의로 잡혀 와 조사받고 있으니 당신도 가서 조사를 좀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폭탄을 맞은 이괄이었으나 사태의 위중함을 직감했던 듯, 평소의 그답지 않은 침착함을 보였다. 부하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그는 정말로 부하들에게 사정을 말했다. 

     

    "지금 조정에서 역모의 혐의를 씌워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러나 붙잡혀 가면 죽게 될 게 뻔할 터, 차라리 거병하려 한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면 거병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요, 그리 되면 너희들의 은공을 잊지 않을 것이다."

     

    사정 반 협박 반으로 부하들의 동의를 얻어낸 이괄은 자리로 돌아와 금부도사 일행을 죽였다.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는 일갈과 함께였다. 이괄은 주변 고을들의 수령에게 "도성에 변고가 생겨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 영변을 출발하여 개천, 강동, 황주로 남하했는데, 도원수 장만이 있는 평양과 다수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안주를 우회하여 방비가 허술한 샛길만을 택해 기동력 있게 남하한 까닭에 관군은 속절없이 뚫릴 수밖에 없었다. 

     

     

    이괄이 거병한 영변성
    금부도사 일행을 처치한 이괄
    드라마 '화정' 속의 인조와 이괄

     

    반군과 관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곳은 황주의 신교(薪橋, 섶다리)로, 이곳에서는 제법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용감무쌍한 항왜(降倭,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왜병) 130명을 앞세운 1만 병력의 공격에 관군은 곧 무너져 지휘하던 안주목사 정충신은 도망가고 선봉장 박영서는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어 벌어진 예성강 마탄전투에서도 이괄은 막아서는 3천 명의 관군들을 박살냈으니, 조총부대를 이끌고 분전하던 방어사 이중로는 전사하고, 평산부사 이확만은 시체인 척 위장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괄의 대군은 곧바로 임진강으로 몰려들었고, 파주목사 박효립은 지방군도 아닌 민병대 백여 명을 급히 조직해 싸우러 나왔다. 그러나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반군이 고함을 지르며 강을 건너려 하자 민병대는 그대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쉽게 임진강을 건넌 반군은 벽제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여유롭게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이제 한양 도성까지는 반나절 거리도 안 되었으니 여유를 가질 만도 하였다. 반면 조정이 불난 호떡집이 되었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반군이 건넌 임진나루

     

    조정은 전황을  파악하러 갔던 최명길이 개성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난리였다. 최명길은 예성강에서 관군이 여지없이 깨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돌아온 자였던 바, 임금의 몽진을 권했다. 하지만 임금은 차마 결정하지 못하고 인목대비만 강화도로 피신시키기로 하였는데 그나마 그것도 결행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임진강 방어선을 살피러 갔던 이귀가 돌아와 화급을 고했다. 

     

    이에 임금은 헐레벌떡 숭례문을 빠져나와 공주 공산성을 향해 출발했는데, 그에 앞서 김류는 적과 내통할 염려가 있다며 이괄의 친족 및 기자헌 외 37명의 주살을 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비명횡사했지만 반군이 가까워왔음을 인지한 기자헌의 친척들은 극렬히 저항했던 바, 그들을 처치하러 갔던 금부도사 윤유길이 오히려 도망쳐 나와야 했다. 그리고 이때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도망가자 배신감을 느낀 백성들이 당시의 정궁이었던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일부 배짱 큰 백성들이 대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전대미문의 일도 생겨났다. 

     

    이런 혼란 속에 이괄이 위풍당당하게 창의문을 통과해 한양에 입성했으니,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한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사례가 되었다.(1624년 음력 2월 10일) 이괄은 때마침 눈앞에 나타난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느긋하게 앞일을 설계했는데, 사실 그보다는 도망간 임금을 추격해 붙잡는 게 급선무일 터였다. 하지만 한양 입성에 도취된 이괄은 이름자답지 않게 이를 게을리했고, 그동안 이괄을 추격해 한양으로 내려온 도원수 장만은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아 권토중래를 노렸다. 

     

     

    이괄이 입성한 창의문 / 대개는 자하문으로 불렸다.
    창의문의 옛 사진 / 지금의 모습과 거의 같다. 한양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문임을 알 수 있다.

     

    이때 도원수 장만(張晩)은 곧 환갑인 59세로 지병이 있어 몸마저 불편했다. 이에 행동도 자연 이름자처럼 늦을 수밖에 없었으니 일단 후퇴를 했다가 군사를 모아 공격하자는 생각이었다. 반면 정충신은 이름자다운 충성심을 발휘하였던 바, 이곳 한양에서 목숨을 걸겠다는 투혼을 보였다. 그는 "북쪽 고지인 안현(鞍峴, 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보게 되니 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유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군이 경복궁 터에 주둔한 만큼 그곳과 가까운 안산을 점령하게 되면 아무래도 유리할 터였다. 마탄 전투에서 쓴맛을 봤던 남이흥도 정충신의 안현 결전에 동조했다. 

     

    이에 정충신과 남이흥은 2월 10일 밤 병사 2천 명과 함께 안현을 기어올라 점령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시그널의  봉화불을 올렸던 바, 이괄은 다음날 날이 밝고 나서야 안산이 점거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가득했던 이괄은 시종 여유가 있었으니, 일거에 관군들을 거꾸러뜨리겠다며 거리에 방까지 붙이게 했다. 곧 안현에서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구경들 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정말로 싸움 구경을 위한 백성들이 몰려들었고, 그들 구경꾼들을 뒤로하고 반군이 안현의 관군을 향해 쳐들어갔다. 

     

     

    안현 전투가 벌어졌던 서대문구 안산
    안산 정상의 봉수대
    안산 봉수대와 전투가 벌어진 정상 부근 (아래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보인다)

     

    아침 7시경 시작된 전투는 이괄의 예상대로 반군이 우세했다. 이번에도 항왜를 내세운 반군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니 분전하던 관군 장수 김경운을 전사시키며 금방이라도 안산을 점령할 듯 덤벼들었다. 하지만 고지를 점한 관군의 필사적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던 바, 곧 끝날 것 같던 전투는 4시간 정도로 길어졌다. 그리하여 양군이 매우 곤비할 즈음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돌풍이 불며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동쪽을 향했던 군기가 서북쪽으로 크게 펄럭이며 방향이 바뀌고 갑자기 바람을 안게 된 반군은 동요의 빛이 역력했다. 실제적으로 모래와 흙먼지가 날려 눈을 뜨기 힘들었다.  

     

    반면 관군은 기세가 올랐으니 싸움을 이끌던 반군의 선봉장 한명련이 궁시에 맞아 부상당하고, 동시에 그의 부장 이양이 총을 맞고 고꾸라졌다. 이에 이괄이 잠시 등을 돌려 총시(銃矢)에 안전한 장소를 찾을 즈음, 이를 본 남이흥이 "한명련은 죽었고 이괄은 도망갔다"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반군들은 불어오는 흙먼지에 사태 분간이 힘들었던 바,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관군이 고함 소리와 함께 공격해오자 싸움은 역전되었으니, 반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괄이 독려했으나 이미 무너진 둑이었다.(이때 관군이 바람을 타고 고춧가루를  뿌려대는 화학전을 전개해 승기를 잡았다는 소리도 있으나 근거 없는 말일 게다. 정충신이 제갈공명도 아니고 어찌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것을 알고 고춧가루를 준비시켰겠는가) 

     

    관군은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해 400여 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사로잡았지만 성 안으로 피한 이괄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매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남이흥의 생각을 정충신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에 이괄은 잠시 숨을 돌렸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괄은 패잔병들을 수습해 전열 갖춘 후, 그날 밤 항왜를 앞세워 도성을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싸우려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것이었으니, 낙담한 표정의 이괄의 뒤를 부상당한 한명련과 기익현, 이수백 등의 장수가 따랐다. 성공리에 거병을 하고 18일 만에 한양까지 점령한 이괄이었으나 그가 단꿈에 젖은 시간은 단 하룻밤에 불과했다.  

     

     

    이괄이 빠져나온 광희문 / 대개는 시구문으로 불렸다.

     

    광희문을 나온 이괄은 송파나루에 도착해 야밤에 한강을 건넜다. 다음날 12일 아침, 도망가는 이괄의 부대를 광주목사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가 이끄는 관군이 막아섰으나 무참히 패했고 사로잡힌 임회는 잔뜩 독이 오른 이괄의 명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이천 방면으로 방향을 잡은 이괄은 그날 밤을 곤지암 묵방리 초가에서 묶었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졌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수하인 기익현, 이수백의 배신에 목이 달아나고 만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익현, 이수백 수하들의 공격에 이괄의 아들 이전, 조카 이수 및 한명련도 살해당했는데,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조카 한 명만이 살아 남아 도주했다. 

     

    기익현과 이수백은 15일 이괄,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관군에 바치고 항복했다. 한편 공산성으로 달아났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이괄의 군대를 막기 위해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불러야 한다는 둥, 동래 왜관에 있는 왜인들을 불러 올려야 한다는 둥,(임진왜란 때의 왜군의 싸움 실력이 각인되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쫄딱 망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천만 다행히도 반군이 와해되었다는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인조는 19일 공주를 출발하여 한양에 돌아오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바, (광해군이 짓고 머물던 곳이라) 싫어도 경덕궁(경희궁)으로 가야 했다. 더불어 궁궐을 불태운 백성과 양반의 집을 차지했던 백성들을 반군에 협조한 대역죄인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소리가 궐내에서 들려왔으나 이리되면 한양사람 반수 이상을 죽여야 했던 바, 곧 허룩해졌다.  

     

     

    창경궁 명정문과 옥천교 / 이괄의 난 때 백성들이 불을 질러 경춘전, 환경전, 양화당, 통명전 등이 불탔다.
    창경궁 함인정 / 기타 함인정, 영춘헌, 집복헌, 사성각, 연경당 등의 건물도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불탄 창경궁은 1633년(인조 11) 재건됐고 인조는 이곳으로 다시 이어했다.

     

    그런데 사실 조정에서 이런 헛소리가 할 때가 아니었다. 곤지암에서 도망쳤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일과, 조선이 다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돌아선 일을 고하였던 바,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고, 또다시 역란(逆亂)이 일어날까 두려워한 조정이 북방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던 바, 병자호란에 속절없이 당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는데, 당시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이는 기라성 같던 조정 중신 중(김상용,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재, 최명길, 장유, 이경석 등등)에서 미구에 닥쳐올 이와 같은 병란을 예측해 앞날을 걱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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