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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승탑은 어느 절, 누구의 것이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3. 22. 07:53
얼마 전 TV에서 최불암 씨가 진행하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에서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승탑 한 기가 조명된 적이 있다. 그것이 간송미술관에 놓이게 된 내력을 미술관 관장인 전인건 씨(간송의 장손)가 특별히 소개해주어 흥미 있게 지켜봤다. 하지만 '한국인의 밥상'은 먹거리와 관계된 프로그램이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고, 곧바로 간송의 며느리인 김은영 씨(78)가 간직한 전통요리 비법에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인의 밥상' 500회 특집이기에 그녀의 50년 넘은 요리 노트를 들여다보고자 한 듯하였다. 전통매듭장(서울시 무형문화재 13호)이기도 한 그녀는 알고 보니 <와사등> <추일서정> <설야> 등으로 유명한 고 김광균 시인의 따님이었다.
아래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승탑은 간송미술문화재단 도록에 괴산팔각당형부도(槐山八角堂形浮屠)로 돼 있으나 소재하던 곳의 지명에 따라 괴산외사리석조부도(槐山外沙里石造浮屠)로 불리기도 한다. 정식 명칭은 '괴산 외사리 승탑'으로, 높이는 3.5m이며 보물 제579호로 지정됐다.(앞서 설명한 대로 2010년 문화재청의 석조문화재 명칭변경에 의거, 이제는 부도 대신 승탑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원래 이 승탑은 이름에서 말하는 대로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마을의 산기슭에 있었는데, 절이 폐사되어 덩그러니 남게 되자 왜인들이 눈독을 들였다. 이에 일제시대 왜인에 의한 일본 반출이 시도되어 인천항까지 갔던 것을 소문을 들은 간송이 급히 달려가 흥정을 벌였고(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거금의 구매가 성사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2010년에 출간된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김영사)이라는 책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실려 있다. 구매에 성공하긴 했으되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인천항에 들이닥쳐 밀반출 혐의로 다시 승탑을 회수해 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간송은 정당하게 구입한 물건이라며 총독부를 상대로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3년 만인 1938년에 승탑을 되찾았다. 아래의 사진들에는 그 지난한 과정이 드러나 있는데, 맨 아래 것은 승탑을 되찾은 간송이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으로 옮긴 후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다.
괴산 외사리 승탑의 고단한 팔자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한국전쟁 때 탑이 무너져 각 부분으로 흩어졌다가 1964년 간송의 기일을 맞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행히도 승탑은 원형이 크게 망가지지 않았던 바, 8각의 기단석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위에는 연화문을 돌린 2단의 기단부, 아래에 구름모양을 돋을새김하고 8각 배흘림기둥 형식을 취한 주부(柱部), 연화문 받침돌 위의 몸돌이 배흘림을 하고 있고 그 남북 면에 문짝 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그 안에 자물쇠가 돋을새김 되어 있는 탑신부, 처마가 높고, 각 귀퉁이마다 큰 꽃장식을 솟구치게 만든 옥개석(지붕돌), 중간에 두 줄의 선을 돌린 둥근돌 위에 다시 이와 비슷한 장식 두 개를 더 얹힌 상륜부를 그대로 되살릴 수 있었다.
그전에 이 승탑을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괴산 각연사(覺淵寺,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의 것이고, 승탑의 주인은, 절 내의 귀부만이 남아 있는 탑비에 새개졌던 바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각연사 내에 있는 통일대사탑(건립시기: 958-960)과 그 모양새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으로, 까닭에 통일대사탑비의 글자가 거의 훼손돼 외사리 승탑의 주인에 대해 아무것도 유추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었으니 각연사가 있는 괴산군 칠성면에는 필시 이 승탑이 놓였을 또 다른 절(터)이 엄연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374인데, 지금은 그저 밭 한 가운데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고 절이 있었던 곳은 모두 농지로 변해 다른 흔적은 전혀 찾을 길 없다. 하지만 그곳의 지명이 외사리인 것을 보면 승탑이 과거 이 절에 있었음은 분명한데, <신 증 동국여지승람> 권14의 불우(佛宇) 목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위치적으로는 1872년 <연풍현지도>에 표시된 문암사(文岩寺)가 유력해 보인다.
주인의 이름도 물론 알 길 없다. 다만 외사리에서 멀지 않은 칠보산(778m)을 넘게 되면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999m)에 이르게 되는 바, 과거 희양산문에 속했던 어떤 고승께서 그곳 외사리의 절에 주석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외사리 승탑은 형태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의 작품으로 광종 때 제작된 통일대사승탑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외사리 당간지주는 조각 수법이나 전체적인 느낌이 부석사 당간지주와 비슷한 바, 본래의 화엄사찰이 선종사찰로 변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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