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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용마산 용마폭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0. 22:46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四佳亭)역과 중랑구 사가정로는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 1488)의 호를 따 붙인 이름이다. 사가정역 근방의 사가정 공원 역시 서거정의 호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가 중랑구 용마산 부근에 살았던 연고로 붙여졌다. 공원 안에는 그의 시비(詩碑)가 4개나 세워져 있다. 그래서 언뜻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가 개인 문집인 <사가집>에 남긴 한시(漢詩)만도 무려 6500여 수에 이른다고 하니 지나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살아생전 시 짓기와 술 마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시벽(詩癖)을 고황(膏肓, 고질병)이라 했고, 잦은 음주에 대해서는 주마(酒魔)라고 표현했다. 술의 악마가 깃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음주로 인한 별다른 사건·사고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의 주도(酒道)를 지켰던 것 같다. 아울러 그 다작(多作)의 시가 모두 빼어나니 시벽을 탓할 것도 못되는데, 시비에 새겨진 '독좌'(獨坐), '수기'(睡起, 잠을 깸)라는 시와 함께 공원의 시비들을 소개해 올린다.독좌(獨坐)
홀로 앉아 있어도 찾아오는 손님 없고
빈 뜰은 비가 올 듯 어둡도다
물고기가 요동쳐 연잎이 움직이고
까치가 밟아 나뭇가지가 출렁댄다
거문고는 습기에 젖었으나 오히려 울림이 좋고
화로는 차가워도 불씨 아직 남았도다
진흙길이 출입을 방해하니
종일 문을 닫아도 괜찮겠도다
獨坐無來客
空庭雨氣昏
魚搖荷葉動
鵲踏樹梢翻
琴潤絃猶響
爐寒火尙存
泥途妨出入
終日可關門
수기(睡起)
주렴의 그림자 방안 깊숙이 드리워지고
연꽃향기 이어서 방안으로 들어오네
깊은 잠 속 꿈에서 깨어보니
문득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들리네
簾影深深轉
荷香續續來
夢回高沈上
桐葉雨聲催
서거정은 할아버지가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였고, 아버지 서미성이 목사(牧使)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외가는 더욱 유명하니 어머니는 조선초의 세도가 권근의 딸이다. 자형(姉兄)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최항으로 훗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역임했다. 본관은 대구이며, 까닭에 훗날 대구시 중구 봉산동 230-1번지에 그를 기리는 구암서원이 세워졌고, 그가 근방의 언덕에 올라 읊었다는 '구수춘운'(龜峀春雲, 거북산 봄 구름)이라는 시가 전한다.구수춘운(龜峀春雲)
숨어 있는 거북뫼 흡사 자라의 형상 같고
산에서 무심한 듯 이는 구름, 사실은 유심한 듯.
대지의 생명들이 살아나기를 모두가 바라노니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龜岑隱隱似鰲岑
雲出無心赤有心
大地生靈方有望
可能無意作甘霖
문장이 뛰어났던 그는 조선시대 최초로 홍문관·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역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 23년간의 문형(文衡, 대제학)을 지내며 20여 차례의 과거시험을 관장했으며, 더불어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성명학(性命學) 및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지식인이기도 했는데, 다만 한가지, 연애에는 형통하지 못했던 듯하다. 우선 그것과 관계 있는 아래의 시 한 수를 보자.
청교의 버들은 푸르르니 오히려 마음 아프고
자하동의 노을은 의미 그대로 짙기가 이를 데 없다
靑郊楊柳傷心碧
紫洞煙霞盡意濃이것은 서거정의 시가 아닌 서달성이라는 사람이 영천군 이정(1422~1454) 앞에서 읊은 시구(詩句)였다. 앞서 '초요경 뺨친 국제적 스타 기생 자동선'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영천군 이정은 효령대군(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의 다섯째 아들로서, 시문에 능하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풍류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뛰어났던 것이 주색잡기였으니 <용재총화>에 기록된 "시골 기생이 처음으로 뽑혀 서울에 오면 곧 집으로 데려와서 화려한 옷을 입혔다. 또 조금 있다가 다른 어린 기생이 있으면 거기에 빠져 기존에 데려온 기생이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 평생 첩으로 삼은 여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위 시구가 영천군과 서거정 사이의 술좌석에 소환되었다. 시의 뜻이 못내 궁금했던 영천군 이정이 서거정에게 청교(靑郊)와 자하동(紫霞洞)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대강 유추해보자면,
영천군 : 청교의 버들과 자하동의 노을은 무엇을 의미하오?
서거정 : 청교역의 버드나무야 워낙에 유명하지 않습니까? 자하동의 지는 노을 또한 절경이구요. 시인은 그걸 노래한 것 같습니다.
서거정이 있는 그대로 답했다. 청교역(靑郊驛)은 개성 나성(羅城)의 동쪽 문인 장패문(=보정문) 밖에 위치한 역참으로서 고려시대 청교도(靑郊道, 고려의 주요 교통로) 상에 자리한 대표 역참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한양과 평안도 방면을 이어주는 주요 역참이었다. 자하동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개성의 명승으로서,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자하동의 이름도 개성 자하동에서 유래되었다.
즉 경복궁 서쪽 체부동과 동쪽 통의동을 연결하는 '자하문로'와 종로구 부암동과 청운동을 연결하는 자하문 터널이 그것인데, 조선시대 한양의 북소문인 창의문이 자하문으로 불려진 것도 일대의 경치가 개성의 승경지 자하동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자 영천군이 다시 물었다.
영천군 : 그걸 누가 몰라 묻소? 내 말인즉슨 청교의 버들이 푸르른데 왜 마음이 아픈 것이며, 갑자기 자하동의 노을은 왜 나오느냐 묻는 것이오.
서거정은 앞서 모른 척 답했지만, 이 시구의 뜻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말한 자동(紫洞)은 유명한 관기(官妓) 자동선(紫洞仙)을 말하는 것이었다. 개성 기생이었던 그녀는 자하동에 사는 여신급의 미모라 하여 '자동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바, 훗날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녀의 미색에 도취돼 경성지색(傾城之色, 성을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경국지색)이라 부르며 소문을 낸 까닭에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미인이었다.
위 시인즉 서달성이 개성 청교역에서 배웅했던 관기 자동선과의 이별을 슬퍼해 읊은 시라는 것을 서거정이 모를 리 없었다. 이정의 거듭된 질문에 서거정은 결국 자동선의 이름을 말해야 했다. 권력의 힘 앞에, 애써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애인 이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문사(文士)였던 서거정이 시·서·화에 능하고 미색까지 갖추었던 자동선을 사모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설가 정비석은 자신의 글에서 두 사람을 아예 오래된 연인으로 묶었다.
아무튼 시작(詩作)을 좋아하는 서거정과 관기 자동선이 익히 알던 사이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일성군 정효전의 첩이 되었고, 정효전이 수양대군 모해 음모에 가담하여 외방 부처된 후에는 장악원 기생이 되었다. 그러다 위의 시구로 인해 영천군 이정에게 상기되어 그의 소실로 들어가게 되었던 바,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을 다시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자동선의 생몰연대는 정확지 않으나 이정의 안국동 집에서 28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로도 주색잡기를 즐기던 영천군 이정 또한 3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둘째 부인 권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이동(李仝)은 아비의 풍류기를 이어받아 역시 세상이 알아주는 바람둥이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기는 부인에 비하면 한낱 미풍에 불과하였으니, 이동의 와이프가 조선왕조 사상 태풍급 엽색행각을 몰고 왔던 어우동이다.
연인 자동선을 잃고, 이어 아내 선산김씨까지 잃은 서거정은 이후 용마산 아래 칩거해 살았다고 하며, 그가 송파나루에서 읊은 시에서는 자신이 살던 곳이 현재의 서울 중랑구 용마산 부근임을 밝히고 있다. 아래의 시는 그가 말년의 거처에서 읊은 시라고 하는데, 자동선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용마산은 사가정공원에서 남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용마폭포로 유명하다.
강 위에서 보낸 봄, 돌아올 길 없고 찾을 수도 없어
푸릇푸릇한 처자와 함께 보냈던 홍안의 젊은 시절, 생각할수록 후회를 금할 길 없네
사람 사이 이 같은 이별은 해마다 비슷하게 거듭되지만
목숨을 바쳐라도 금년 눈 속에 담아두고픈 심경일세
江上春歸底處尋
綠嬌紅小恨難禁
人間此別年年似
羞殺今年雪滿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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