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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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II ㅡ 연지・효제동의 한족(漢族)과 서양 선교사들, 그리고 하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30. 06:34
이번 III편에서는 분위기를 바꾸어 동촌에 살던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지금도 집이 남아 있기도 하거니와 구한말 종로구 효제동과 연지동 일대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몰려 살았고, 그 이전에는 명·청 교체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한족들이 살았다. 연지동은 문자 그대로 연지(蓮池)가 있던 데서 비롯됐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마련된 동・서・남쪽의 연못 중 동지(東池)에 해당하는 큰 연못으로서, 숭례문 남지(南池) 및 돈의문 밖의 서지(西池)에 비견된다. 하지만 남지나 서지와 달리 전하는 그림이나 사진이 없어 위치나 형태를 알 수 없고 그저 동네 이름만이 남아 있다. 효제동은 앞서 I편에서 말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에서 비롯되었으니 동촌에 조양루와 석양루를 나란히 짓고 살던 두 형제의 우애에 부왕(父王)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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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 - 이화장·조양루·석양루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26. 23:46
1575년(선조 8년) 동서 분당이 일어났다.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니,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소윤(小尹)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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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을 찾아온 원앙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19. 23:50
중랑천은 임꺽정의 근거지였다는 양주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남쪽 서울시를 향해 흐르는 길이 20㎞의 하천이다. 중랑천환경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중랑천 최상의 발원지는 불곡산 상투봉과 임꺽정봉 사이의 ‘불곡샘’으로, 이후 도봉구와 노원구의 경계를 형성하며 흐르다 중랑구를 관통하여 왕십리·금호동 부근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과거에는 서울 도봉구 쪽 중랑천을 서원천(書院川)이라고 불렀는데 상류의 도봉서원에서 유래됐다. 거유(巨儒)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서원은 그 아래 서원마을이 형성되었을 정도로 세력을 떨치던 곳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날아가고 이후로 서원천의 이름을 도봉천이 대신하게 되었다. 도봉천이 흐르던 노원구와 도봉구 일대는 1963년까지는 양주군 노해면에 속했으며 '갈대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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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맏손주 모모야마 켄이치 & 관훈동 사동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15. 00:51
앞서 '조선왕조 마지막 손(孫)이 묻힌 회인원(懷仁園)과 바이레셜리즘(혼혈주의)'를 말하며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의 사망과 함께 영친왕의 후손은 완전히 멸절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 글에서 밝혔듯, 당시 순종은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순종은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 고종의 후처 격인 엄귀비에게서 난 영친왕이 황태자로서 대를 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대(代)인 이구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황통(皇統) 및 영친왕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것으로써 조선왕조의 후손은 끊기게 된 것일까? ㅎㅎ 절대 그럴 리 없다. 고종의 맏아들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려 13남 9녀를 두었으니 대가 끊길 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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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공동묘지 무연고 합장묘와 덕은동 쌍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13. 20:54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한국항공대 가는 길은 서울임에도 시골냄새가 풀풀 난다. 그래서 서울에 남은 마지막 시골처럼도 여겨지는데, 경기도로 들어가 한국항공대 부근에 이르면 적지 않은 규모의 공동묘지도 나타난다. 까닭에 일대가 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로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은 서울 용산역에 못지않은 요지 중의 요지가 될 뻔한 장소였으니, 이름하여 수색 조차장(操車場)이 있던 곳이다. 위 사진의 대비를 보자면 이곳이 용산역에 버금갈 곳이었다는 말이 더욱 믿어지지 않겠으나 약 80년 전 이곳에는 거의 완공단계의 초대형 조차장이 있었다. 조차장(Classification yard)이란 철도역의 한 종류로, 화차 및 객차 등 철도차량의 조성과 입환을 위하여 별도로 설치한 장소이다. 이것이 조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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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10. 23:54
앞서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일본의 기독교 전래 연도는 1549년으로 미국보다 70년, 한국보다 230년 빠른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기독교인의 수는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바,(천주교 포함) 일본의 기독교 전래는 실패 사례로서 지금도 연구 대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기독교는 개신교의 경우, 언더우드(장로교)나 아펜젤러(감리교)와 같은 미국 선교사의 전파 아래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긴다. 물론 그 영향이 크니 한국 개신교 교파의 지배적 점유율을 보이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은 아니니,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인인 이수정은 일본 기독교의 영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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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사진사 구와바라 시세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9. 20:36
지난 2001년 청계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보수유지냐 철거북원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당시 서울시 건설안전본부는 전면적 보수 내지는 철거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는데, 그전까지는 별 말이 없다가 미8군에서의 자체점검 결과 자국(自國) 차량의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는 소문이 일자 급 돌변해 전면적 보수 내지는 철거가 시급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미8군에 관한 소문의 진위는 지금도 불투명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을 반대했다. 청계고가는 서울시 교통난 해소의 일등공신이던 도로였기에 무작정 철거하면 곤란할 듯싶었다. 예를 들어 청계고가를 이용하면 삼일·서울역·아현고가도로를 타고 서울 동쪽의 청량리에서 서쪽의 신촌까지 논스톱으로 단숨에 도착할 수 있는데, 만일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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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역사문화공원의 권진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4. 21:19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망우리 묘지 내의 이중섭 화백 묘소에 성묘를 다녀온 이야기를 앞서 실은 바 있다. 그때도 말했거니와 나는 그와 아무런 친인척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 간 이유는 집에서 멀지 않기 때문으로, 요즘도 산책 삼아 가끔 간다. 재삼 느끼는 바이지만 그의 무덤가는 참 운치가 있다. 오늘은 처음으로 권진규의 무덤을 찾았다. 사실 권진규는 망우리 묘지를 가게 되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는 인물이다. 재작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에 관리사무소와 시민휴식공간이 건립되며 그 앞에 그의 자소상 두상을 조성해 놨기 때문에 오가는 모든 사람의 눈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가 누구인지 알든 모르든.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