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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4. 1. 10. 23:54

     
    앞서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일본의 기독교 전래 연도는 1549년으로 미국보다 70년, 한국보다 230년 빠른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기독교인의 수는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바,(천주교 포함) 일본의 기독교 전래는 실패 사례로서 지금도 연구 대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기독교는 개신교의 경우, 언더우드(장로교)나 아펜젤러(감리교)와 같은 미국 선교사의 전파 아래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긴다. 물론 그 영향이 크니 한국 개신교 교파의 지배적 점유율을 보이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은 아니니,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인인 이수정은 일본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자가 되었으며 1883년 요코하마 쯔유쯔기죠(露月町) 교회에서 일본인 목사 야스가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요코하마에서 한문에 이두식 토를 단 성서를 간행했다. (이수정은 귀국 후 곧바로 붙잡혀 사형당함으로써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지만 그가 간행한 한글성서를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지고 들어와 포교한다)   

     
     

    이수정이 펴낸 신약성서 마태전(마태복음)

     

    아울러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를 이끌었던 '성서조선 운동'의 김교신 및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이 일본의 개신교 신학자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1861~1930) 아래서 배출됐다. 그 외도 많은 일본인 개신교도가 한국에 영향을 끼치거나 혹은 직접 한국에 건너와 포교를 했는데, 오늘 말하려는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노무라 모토유키는 193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에는 가난한 재일동포와 그 자녀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워낙에 선한 심성의 그는 어릴 적부터 차별당하는 한국인 아이들을 많이 동정했다. 그중에서도 1941년 12월 7일의 기억은 특별하다. 당시 태평양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말레이시아를 침략해 고무 생산지를 점령했고 그 기념으로 고무공을 만들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선물로 나눠주었지만 노무라와 같은 반에 있던 두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는 고무공이 배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일본정부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무료로 교복을 배포할 때도 한국 학생들은 제외되었다. 그들은 자연히 왕따 대상이 되어 심한 놀림을 받았고, 그때 노무라는 오히려 한국 학생들을 감싸며 동무가 돼 주었다. 일본정부의 한국인 차별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더 노골화되었으니 재일동포들을 대놓고 '3등시민'으로 취급하며 배급에서도 제외하였는데, 노무라는 그 무렵 만난 김오남이라는 한국 유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며 여러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때 김오남에게 한국에 대해 들으며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하던 그는 1950년 도쿄대학 수의과에 입학했으나 마취제가 부족해 동물들을 마취제 없이 해부하고 실험하는 현실에 큰 충격과 환멸을 느꼈다. 이에 1953년 미국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수의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미국 켄터키성서대학 등에서 학위와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61년, 8년간의 미국생활을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미국 유학생활은 동경으로 그려온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생활 내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겪어야 했으니 급기야는 유색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에 심한 부상을 당했고 결국 긴 수술 끝에 왼쪽 신장을 떼내야 했다. 그는 교회에서마저 차별을 당했던 바, 자신이 살던 켄터키의 동네 교회에 갔을 때 교인들로부터 'Jap'(쪽발이)라는 경멸의 호칭을 들어야 했고, 키가 큰 어떤 백인남성에 의해 물리적 힘으로 교회 문밖으로 내처져야 했다.
     
    노무라는 이후 자신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겠다 다짐하였고,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가지고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서울 청계천 빈민가 등에서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는 한국의 빈민층을 보고 가슴 아파했고, 그들을 위한 봉사와 선교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973년 한국의 도시산업선교회를 방문해 자신이 빈민을 위해 봉사할 수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때부터 보안사의 요시찰 인물이 된다)

     
     

    노무라가 찍은 서울 중랑천 일대 판자촌 (1973년)

     

    당시 도시산업선교회(약칭 '도산')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이 운영하던 기독교단체로, 공장직공이나 도시빈민에 침투해 기독교선교와 함께 반정부 투쟁을 이끌던 단체였다. 까닭에 '도산'이 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기업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던 노무라는 처음에는 '도산'과 같이 활동했지만 '도산'의 급진적 행동에 곧 염증을 느끼게 된다. 

    이후 그는 청계천 야학교사 출신의 제정구(훗날 13·14·15대 국회의원 역임)와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를 만나 그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빈민구호 활동을 했다. 이때 노무라는 청계천변의 아래와 같은 토막집에서 생활하며 빈민들의 고난을 체험했고, 독일·호주·일본 등에서의 모금을 통해 20여 년간 2천여 명의 청계천 아동을 위한 급식제공을 했으며 자활공동체 탁아소를 건립하는 등 괄목할만한 빈민구제활동을 펼쳤다.

     

    그가 병자들의 환부에서 피고름을 닦아내고 구더기를 일일이 손으로 떼어낸 일, 경찰들은 물론 가족들마저 신경 쓰지 않는 무연고 사망자나 자살자의 시신을 거두고 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받아와 화장을 한 일, 그리고 망자의 화장재를 청계천에 뿌리며 하나님을 원망한 일, (일부 글에서는 이때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했다고 하나 그런 일은 없었다) 자신과 함께 봉사한 목사들의 몰인격에 실망하고, 나아가 청계천의 가난한 여자들을 손대는 동물 같은 파렴치에 극혐한 일.... (민주투사이자 목사인 H는 그 파렴치한 행위가 안기부 요원의 사진에 찍혀 더 이상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청계천에 얽힌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다. 
     
     

    오로지 흙(土)과 장막(幕)으로만 이루어진 토막집
    개미굴이라고도 불리던 청계천 토막집 / 청계천변 제방을 파 지은 집이다. (1973년)
    노무라가 찍은 청계천 토막집과 소녀 (1973년)
    당시의 청계천 관련 기사 / 원내는 빗물에 집이 무너져 압사한 소녀이다. 60~70년대 도시빈민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진작가 한영수가 찍은 청계천 홍수 / 다리는 수표교
    당시의 청계천 하류 / 멀리 흥인지문이 보인다.
    당시 청계천변의 주거형태는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다.

     
    노무라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빈민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 엔(약 8억1500만원) 정도라고 했다. 지난 2006년에는 청계천의 사진과 서울 지도 등 1970년대 청계천에 대한 자료 826건을 서울시에 무상 기부하기도 했는데, "청계천 판자촌도 기록이고 역사이기 때문에 개인이 소장하는 건 맞지 않고 당연히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기부 동기를 밝혔다.
     
     

    기증사진을 전시한 '노무라 할아버지의 청계천이야기' 포스터 / 그는 자신이 노무라 할아버지라 불리지기를 원했다.

     
    노무라는 지난 2013년 서울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2015년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상을 받았다.필란트로피’는 빈자(貧者)에 대한 관대함,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자비심 및 이에 근거한 행위를 의미하며, 사회사업가들의 기부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APA)'에서 이 상을 제정·심사해 수여하고 있다.  

     
     

    청계천박물관에 전시된 노무라의 사진

     
    이처럼 한국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 노무라 모토유키이나 2016년, 자신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만난 김진홍 목사에 대해서만은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한국 기독교의 '변절'... 김진홍·박홍 그리고 명동성당」(http://omn.kr/l2s3)이란 기사해 대한 이메일을 보내 "김진홍은 변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김진홍의 본모습을 한국 언론에서 드러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2012년 2월 11일 제정구의 무덤을 찾은 노무라가 엎드려 흐느끼고 있다. / 그는 이때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도 무릎 꿇고 사죄했다.
    2014년 방한했을 때의 노무라와 고(故) 제정구 의원의 부인
    아름다운 사람 제정구(1944~1999) / 그는 54세 때 폐암으로 사망했다.
    남편 못지 않게 헌신했던 부인 신명자 여사
    2016년 청계천박물관에서 개최된 '제정구의 청계천'

     
    ▼ 노무라가 찍은 사진들

    당시의 분뇨 푸는 사람
    경무대(청와대) 분뇨 푸는 사람을 빗대 권력가를 풍자한 당시 고바우 영감 / 김성환 화백은 이 만화로 큰 곤욕을 치루었다.
    고바우 김성환 화백도 청계천에 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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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