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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알려지지 않은 어비슨 가(家)의 3대에 걸친 봉사 - 1대 올리버 어비슨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1. 3. 22:30

     

     

    한국을 사랑하여 일생을 바친 외국사람은 수없이 많다. 나아가 대(代)를 이어 봉사한 가문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어비슨 가문은 특별하다. 한국을 위해 봉사한 가문의 경우 대개 의료나 교육, 선교 같은 분야에 집중돼 있는 반면 어비슨 가(家)는 3대에 걸쳐 각기 다른 방면으로 한국 사랑을 표현했다. 1대 올리버 어비슨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임에도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올리버 어비슨은 1860년 영국 요크셔 재거그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장 노동자였으나 산업혁명의 기계화에 밀려 어느 날 갑자기 실업자가 되었다. 막연해진 그는 당시 대다수의 영국 빈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과 함께 신대륙행 배의 3등 칸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족은 미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했고, 어비슨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몇 개 도시를 전전하며 초등교육을 마쳤다. 

     

    이후 그의 가족은  온타리오 주의 서부 지방,  지금의 토론토 시 외곽에 터전을 마련했고 어비슨은 12살 때 그곳의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공장에 다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과정의 야학을 열어 가르칠 정도로 영민했다. 이후 그는 알몬트고등학교를 거쳐 1876년 퍼드의 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879년 졸업 후 다시 고등교사 자격증을 받기 위해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육받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부친처럼 평생을 방직공장 노동자로서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에도 기인했지만, 조금 더 나은 입지를 마련해 조금 더 못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토론토에서 야학을 연 일화로도 알 수 있었다. 당시 그는 힘든 노동 속에서도 달콤한 휴식 대신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기쁨으로 삼았다. 

     

    어비슨은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더불어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화학 분야의 관심을 살려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에 입학하였고, 1884년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모교의 교수가 되어 약물학과 식물학을 강의했다. 그는 약학교 시절 토론토의 약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어비슨의 조제 실력을 지켜본 약방 주인이 그에게 제약회사 동업을 제안했으나 이를 마다하고 교수의 길을 택했다. (이 무렵인 1885년 7월 28일, 그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 할로윈 파티에서 만난 제니 반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또다시 나아가 의대생이 되었다. 자신이 가르치던 온타리오 약학교 교장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서, 빅토리아대학교(현 토론토대학교)가 어비슨의 약학교 경력을 인정해 본과에 편입시켜 줌으로써 성사되었다. 본과 시절 병으로 1년 휴학을 한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내내 1등을 유지해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존스 홉킨스대학교의 토머스 컬렌(Thomas Cullen)과 루엘린 에프 바커 (Llewellyn F. Barker)와 더불어 토론토에서 가장 유명한 3인의 외과의사로서 온타리오 주지사의 주치의를 역임했다.

     

    이쯤 되면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으나 어비슨은 이에 만족하지 또다시 나아갔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길은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란 나라의 의사였다. 1892년 9월 어느 선교모임에서 만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의사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 선교에 나섰던 언더우드는 안식년 휴식으로 본국에 귀환해 체류 중이었는데 마침 어비슨을 만나 이 같은 제안을 하였고, 어비슨은 언더우드가 깜짝 놀랐을 정도로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당시 언더우드 제안의 전제는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어비슨은 토론토대학병원 의사 겸 토론토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재임용이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어비슨은 주저 없이 언더우드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이듬해인 1893년 의사와 교수직을 사임하고 캐나다를 횡단해 밴쿠버로 왔다. 1893년 6월 초 아내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밴쿠버를 떠난 어비슨은 일본을 경유, 7월 16일 부산에 상륙했다. 상륙한 지 1주일 후 부산에서 셋째 아들인 더글러스가 태어났을 정도로 주저 없는 행군이었다.

     

    다음 달 8월 서울에 도착한 어비슨은 제중원의 의사가 됐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거니와 제중원은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개화파의 칼을 맞고 빈사 지경이 된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선교의사 알렌이 살려낸 공로로써 개원하게 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처음 명칭은 광혜원) 1893년 11월 에비슨은 제중원 3대 원장 빈튼의 귀국으로 4대 원장이 되었는데, 이는 제중원의 입장에서도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연세대학교 내에 재현된 광혜원 / 본래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 집 사랑채였던 곳이 광혜원이 되었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3대 제중원장 빈튼(Charles C. Vinton)

     

    빈튼은 의료사업보다는 선교에 역점을 두었던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91년 4월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초기부터 제중원 운영비의 사용 권한을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며 이를 반대하는 정부와 다시 충돌했다. 이에 그는 여러 차례 파업과 태업 등으로 시위하며 정부를 괴롭혔다. 이 고래들 싸움에 환자들은 정말로 죽을 맛이거나 혹은 정말로 죽거나 했는데, 어비슨이 부임하며 존폐의 위기까지 놓였던 제중원은 모든 것이 정상화될 수 있었다.

     

    어비슨은 빈튼과는 반대로 선교보다는 의료사업을 중시하였다. 또한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교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본시 그는 캐나다 감리회를 다녔지만 언더우드가 소속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서 조선에 왔으며, 또한 교리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고는 자신의 일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는 아직도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많은 정신적인 질환을 악령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로 여기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일부 선교사는 한국에서 전염병의 빈도가 감소한 것이 분명 기독교의 전파 그 자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건에 대해 예수가 무엇을 했고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한 일부 내용의 정확성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예수가 주었던 가르침과 본보기의 가치를 비방하는 가장 마지막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의사이자 과학자다. 예수의 치료법과는 반(反)하지만, 수천 명의 연구자와 의사들에 의해 진실로 밝혀진 진리를  부득이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비슨은 조선민중의 치료에 있어서도 몇 명의 사람을 더 치료하는 것보다 몇 명의 조선 의사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중원의학교를 건립해 1908년 6월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인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백정의 아들이었던 박서양도 있었다. 단언컨대 박서양의 배출은 어비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1904년 9월 제중원을 새로 짓고 건축비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후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의학교로 불리게 되었는데, 세브란스의학교가 이후 연희전문과 합쳐지며 연세대학교라는 교명을 갖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중원의학교의 제1회 졸업생 / 가운데 교수 오른쪽 인물이 박서양이다.
    어비슨과 졸업생들

     

    어비슨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언더우드는 건강이 나빠져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해 10월 12일 타계했다. 이에 어비슨은 언더우드가 세운 사학(私學)의 2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취임 후 총독부에 지속적인 청원을 넣어 1917년 4월 언더우드 사학의 전문학교 승격을 이루어냈다. 이 학교의 이름이 연희전문으로, 어비슨은 즈음하여 미국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던 언더우드의 형 존의 기부로써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29만 320평의 임야를 매입하였던 바,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자리한 바로 그곳이다.

     

     

    언더우드의 형 존의 회사에서 생산해낸 언더우드 타자기 / 존은 이 타자기로 대박을 쳤다.

     

    어비슨은 학교 설립이 궤도에 이른 1934년 한국인에게 교장의 자리를 미련 없이 물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 한국을 떠나 고국 캐나다로 갔다. 바삐 한국에 오느라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고국의 지인과 친지들을 찾아 인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얼마 후 아내 제니가 별세했고 제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그 안타까움을 회고록 서문에 담았다. 한국에서 43년간을 머물렀던 어비슨은 1956년 캐나다에서 타계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생전의 내 아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마음은 영원히 한국인과 함께 할 것이다.

     

     

    말년의 어비슨 부부 / 연희전문 본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  세브란스병원 설립 비화

     

    어비슨은 12.5평의 한옥 병원 제중원을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병원으로 만들고자 계획하고 설계사에게 이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자금 마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1900년 봄, 운 좋게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해외선교대회에서 이에 관해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넓은 홀 가득히 들어찬 청중에 위축되었던 바, 자연히 떨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한 어비슨은 우선 조선이란 나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 많은 청중들에게 여하히 전달될 수 있을까도 걱정되었다. 그러던 중 어비슨은 우연히 좌석 두 번째 발코니 맨 뒤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게 되었다. '멀리 앉은 저 사람이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어비슨은 오직 그 남자와 눈을 맞추고 그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연설을 이어갔다. 

     

    그런데 연설이 끝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남자가 어비슨을 찾아와서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으며 병원 설립 비용에 관해서도 물었다. 어비슨은 1만 달러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고, 얼마 후 1만 달러를 전달받았다. 그 남자가 바로 록펠러와 더불어 미국 스탠다드 오일을 창업한 창업자 중 한 명이자 CFO(재무담당임원)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였다. 감격한 어비슨에게 세브란스는 "주는 사랑이 받는 사랑보다 더 기쁘다"는 말을 남겼다. 어비슨은 의학교 이름을 세브란스로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04년 11월 서울역 앞에 개원한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식 광경
    루이스 헨리 세버런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1913) / 영어 이름은 세버런스에 가깝다.
    1907년 세버런스(가운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브란스의학교 교장 사택 앞에서 찍은 사진 / 왼쪽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러들로, 오른쪽은 어비슨이다.
    1905년 광주 제중원 사진 / 현  광주기독병원 직장어린이집과 직원주차장 자리에 있었다.
    광주직할시 제중원로 기독병원의 '주는 사랑 백년비' / 광주 제중원 부근에 세워진 대형 비석이다. 대부분 '주'를 주님으로 생각하지만 그 또한 문장이 어색하다. 세브란스의 일화를 모르면 이해가 힘든 비석이다.
    광주기독병원 내의 제중원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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