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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동기의 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7. 8. 00:31

     

    1882년(고종 19) 5월 22일  조선국 전권대관 신헌 (전권부관 김홍집)과 미국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 사이에 수교조약문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서양제국 중 조선과 국교를 체결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는데, 양국이 국교를 맺는 데는 의외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알선의 대가(1860년 북경을 점령했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게 만든 대가)로 흑룡강 이북과 연해주의 거대한 땅을 러시아에 빼앗긴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러시아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렇듯 열강의 침입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어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 했던 바, 어떻게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자신들 청나라가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동아시아에서의 힘의 균형(POWER OF BALANCE)을 맞추고자 했다. 그래서 이미 여러 번 조선에 미국과의 수교를 권했으나 조선은 그저 쇄국만을 고집했다. 뭘 잘 모르니 그냥 대문만 잘 지키겠다는 생각이었다. 답답한 마음의 이홍장은 급기야 1881년 7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슈펠트를 톈진으로 초대해 조미수교조약을 대신 추진하고 나섰다.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1~1895) 제독

    슈펠트(1822-1895) 제독

    슈펠트가 타고 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
    슈펠트의 편지 (인천시립박물관)

     

    이때 슈펠트는 이홍장과 회담하기 앞서 주청 일본공사 나가사키 및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를 만났기에 청나라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882년 조미수교에 앞서 체결된(청나라 이홍장이 대신 체결한) 조미수호조약 협정문에서 이홍장이 강력히 요구한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다」라는 문구를 뺄 수 있었다. 만일 이홍장의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의 목적인 조미간의 통상에서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던 바, 마건충이 미리 써 온 조미수교 조약문 제1항에 명시된 이 문구를 삭제하도록 요청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이홍장이 똥줄 타고 있음을 간파한 슈펠트의 배짱이 작용했다. 이홍장은 청나라가 조선의 전통적 상국(上國)임을 강조하며 문구의 삽입을 고집하였지만 슈펠트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중국측이 제시한 조약문도 새로 쓰게 해 청나라라는 문구를 일절 배제시키고 미국과 조선이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 호혜평등에 입각한 조약문을 만들어 체결하였다. 이것이 미국이 원하는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전문 14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조선국 군주와 대 아메리카 대통령 및 국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며, 만약 상대방 나라가 불공정한 일이나 경멸당하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우선 알리고 반드시 서로 도와주어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는 제1조의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로써 슈펠트는 1866년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해내지 못하고, 이어 1871년 강화도에 쳐들어 온 미국 해병대도 해내지 못한 조선과의 통상과 개국을 대포 한 방, 총알 한 발 쏘지 않고 이루어냈다. 이것은 1853년 대규모 함포 사격을 앞세워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과 비견해 더욱 빛나는데, 게다가 그는 페리가 일본 막부에 강요한 불평등 조항을 조미수교조약문에는 거의 적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호평등과 상호원조 및 거중조정(居中調停)*을 강조하였다. (비록 형식적인 문구라 해도) 

     

    * 국제기구나 국가 또는 개인 등 제삼자가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끼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

     

    고종은 아름다운 문장의 조약문 1조를 철석 같이 믿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금과옥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될 처지에 처해지자 의인(義人) 호머 헐버트는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고 분개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는 "조약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한국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한 것도 위의 조미수교조약문 내용에 근거한 것이었다.*

     

    * 헐버트는 미국 각지를 돌며 루스벨트를 10년 넘게 비난했고, 루스벨트는 1919년 죽기 전 자신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는 반성의 고백을 남겼다.

     

     

    한국인이라면 잊지 않아야 할 사람 호머 헐버트(1863-1964)
    양화진 선교사 묘원의 호머 헐버트 묘비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묘비 옆 기념표석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호머 헐버트 박사 여기 잠들다」

     

    그런데 슈펠트가 애써 조선과 수교통상조약을 맺었음에도 미국은 조선에 대해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했다. 미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는 달리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였다. 미국이 원하는 건 오직 통상을 통한 자국의 이익 확대였으나 조선은 미국의 물건을 사줄 능력도 없어 보였고 가져갈 만한 물건도 없어 보이는 그저 가난한 나라였다. 그들에게 풍부해 보이는 건 너른 들을 덮고 있는 벼(禾)와 바다에서 산출되는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뿐이었으나 그것은 미국이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미국 특명전권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를 태운 모노카시 호가 조선에 입항한 것은 조선이 이렇듯 별 볼 일 없는 나라로서 견적이 나온 후였다. 1883년 5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 푸트는 5월 20일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했고 아더(Arthur) 대통령의 신임장을 바쳤다. 고종은 푸트 공사의 부임을 춤을 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His Majesty danced for joy when Minister Foote arrived) 이 이야기는 푸트가 여러 사람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 그는 자신은 들은 그대로를 워싱턴에 보고했다.

     

     

    초대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1826-1913) / 칠레 총영사에 이어 조선국 공사로 부임했다. 한국 이름은 복덕(福德).

     

    고종도 미국이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요 정의로운 나라라고 듣고 있었다. 이제 그 강대국과 친구 관계를 맺었으니 조선은 종주국 행세를 하는 청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종의 일방적인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였으니, 미국 국무부는 조선을 애써 끼어들 가치가 없는 영양가 없는 나라로 판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은 미국을 향한 구애를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이어간다) 

     

     

    미 국무장관 토마스 베이어드(Thomas Bayard) / 그는 실익이 없는 나라 조선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견지했다.

     

    푸트 대사 부임 후에도 미국은 한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 국부무는 이후 조선과 국교를 맺은 다른 나라 국가들이 돈을 들여 앞다퉈 멋진 공사관을 지을 때도 푸트가 사들인 한식집을 그대로 쓰게 했고, 심지어는 인테리어에 들어간 비용마저 주지 않고 있었다. (푸트는 정동 공사관 건물을 구입할 때까지 종로 박동 묄렌도로프의 집을 숙소로 썼는데, 묄렌도로프가 그 집을 내부를 서양식으로 쓰기 편하게 개조한 것을 보고 자신도 관저를 그렇게 고쳤다.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 I ㅡ갑신정변'

     

     

    정동에서 가장 화려했던 프랑스공사관
    쭈그리한 미국공사관 / 기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이 푸트 공사 부부로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 서 있 사람들은 미국공사관 경비를 맡은 조선의 신식군인 별기군이다.
    정동 미국공사관 관저 / 푸트는 1884년 경운궁 인근 민계호(명성황후 친족) 집 2채를 구입해 사저와 관저로 사용했다.
    공사관 내부 / 푸트는 사비를 들여 내부를 서양식으로 수리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휴 딘스모어(Hugh Dinsmore) 미공사관 조선총영사이다.
    알렌이 자신의 책 《조선의 이모저모(Things Korean)》에서 '공사관이 다른 나라가 세운 큰 건물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하다'고 푸념한 그 건물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 장교 숙소로 쓰였고
    지금도 미국대사관의 영빈관으로 쓰이고 있다. / 당연히 문화재로 지정됐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 반면 조선 정부는 1887년 워싱톤DC 북서쪽에 멋진 건물을 마련했다.
    공사관 내부 / 내부도 멋지게 장식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공사관의 기능을 잃었고 1910년에는 일제에 건물 전체를 빼앗겼다.
    1887년 7월8일 초대 주미공사로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사진 중앙)이임명됐다. 오른쪽은 참참관 이완용.
    다시 태극기 나부끼는 공사관 / 한인사회와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2012년 문화재청이 재매입해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워싱턴에 개설된 외교공관 중 19세기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월 15일 공사관 건물을 찾았다.

     

    푸트는 민계호의 집 구입비용으로 자신의 돈 2천200달러가 들어갔고 다시 사비를 들여 수리했지만 미국 정부로부터의 변제가 없었다. (푸트는 3년 뒤 미국 정부로부터 수리비와 관리비가 포함된 4천400달러를 겨우 받아낸다) 게다가 미국으로의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공사급 관계를 영사급으로 격하시키겠다는 국무성의 연락에 자존심이 상한 푸트는 1885년 1월 공사직을 전격 사임하고 자신이 지방판사로 있던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버렸다.

     

    푸트가 갑자기 귀국해버리자 미국 정부는 공사관 무관이던 29살의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에게 공사대리를 맡겼다. 이 역시 미국 정부의 무성의를 보여준 예였으니 누가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포크는 돈도 한 푼 없었으니 푸트가 그만두면서 공사관 공금을 전부 가져가 버린 까닭이었다. (푸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에 포크는 조선의 우표를 모아 뉴욕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우표수집가들에게 판매해 활동자금을 미련해야 했던 바, 스스로에게 '내가 외교관이 맞는가?' 자문할 지경이었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 (1856-1893) / 미해군 장교으로 근무하다 조선공사관 무관이 되었다. 한국 이름은 복구(福久).

     

    하지만 조선으로 볼 때는 이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몰랐다. 포크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3등 졸업) 미해군 아시아 함대에서 복무했고, 이때 중국어와 일본어를 마스터했으며 또한 한국어도 틈틈이 공부해 어느 정도의 회화가 가능한 상태였다. 까닭에 그는 1883년 9월 한미수교 후 미국의 방문하게 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의 영접관이 되었고, 그들 중의 일부(민영익, 서광범, 변수)가  체스터 아서 미 대통령에 내준 함선으로 유럽을 방문할 때 동행한 바 있었다.

     

    즉 포크는 당시의 미국인 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는 민영익의 무능함과 서광범의 유능함을 파악하고 있었던 바, 지금의 실세인 민영익을 대신하여 서광범이 집권을 하면 조선은 흥할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미국에 보내는 사신(私信)에서 밝혔다. 1884년 서광범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영익을 살해하지만 민영익은 알렌의 치료로 기적적으로 회생했고, 서광범은 대역죄인으로 망명의 길을 걸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포크가 예견한 안 좋은 쪽의 결과를 껴안았다.  

     

     

    보빙사를 수행하던 시절의 조지 포크/ 왼쪽부터 영접관 메이슨 대위, 민영익, 안내를 맡은 퍼시벌 로웰, 서광범, 홍영식, 포크 소위.

     

    포크는 이듬해 5월 말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때 주한미군공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돼 함께 트렌튼 호(USS Trenton)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트렌튼 호는 아서 미 대통령이 보빙사 일행의 세계여행을 위해 내준 배였다. 포크는 조선에 입국한 후 미국 공사관 무관 자격으로 조선을 여행하며 조선에 관한 전반을 미국 정부에 충실히 보고했다. 그가 공사대리가 된 데는 그와 같은 충직함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포크가 타고 온 USS 트렌튼 호

     

    * 2편으로 이어짐 

     

    조지 포크 두 번째 이야기

    오랜만에 포크에 대해 쓴다. 뭔가 테마를 잡아 쓰려고 했는데, -이를 테면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위안스카이에 맞서 싸우다 미국정부에 의해 조선공사대리에서 해임된 이야기 같은 것- 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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