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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 포크 두 번째 이야기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7. 30. 01:30

     

    오랜만에 포크에 대해 쓴다. 뭔가 테마를 잡아 쓰려고 했는데, -이를 테면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위안스카이에 맞서 싸우다 미국정부에 의해 조선공사대리에서 해임된 이야기 같은 것- 딱히 분량이 나오는 스토리가 없어 그냥 이것저것 쓰기로 했다. 
     
    그가 조선의 개혁파와, 그중에서도 서광범과 친했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한 적이 있다. 그는 일찍이 방미사절단(보빙사)의 일원인 민영익, 서광범, 변수를 데리고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그들에 대한 배려로 내준 트렌튼호를 타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돌아 조선의 부산항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 여행기간 동안 서광범과 변수는 서구의 문물에 관심을 갖고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민영익은 허구한 날 중국의 고전만 읽었다. 포크는 민영익의 이런 모습이 적잖이 실망한다. 
     
    반면 서광범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으니, 둘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됐다. 포크는 훗날 미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의 실세인 민영익을 대신하여 서광범이 집권을 하면 조선은 흥할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 서광범에 대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되던지, 아니면 조국을 위해 죽을 것(He will either become a very great man here, or will die for his country)"이라고 예견을 했는데, 불행히도 후자가 적중했다.  
     

     

    보빙사 수행원 시절의 조지 포크/ 왼쪽부터 메이슨 대위, 민영익, 안내를 맡은 퍼시벌 로웰, 서광범, 홍영식, 포크 소위
    당시의 미국 / 민영익은 이와 같은 서구문명 앞에서도 무감했다는 얘기다.
    일행이 탔던 트렌튼(USS Trenton)호 / 3800톤, 77m의 자체 발전기를 탑재한 스크류 증기선이다.

     

    1884년 서광범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포크는 한국의 삼남지방을 여행 중이었다. 그는 개화파의 쿠데타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 일에 말려들기 싫어 일부러 서울을 벗어났을 수도 있다. 그는 약 2달간의 여행 기간 동안 '온갖 종류의 해충과 이를 뒤집어쓴 채' 작은 방에서 잠을 잤고, '마치 무료 박물관에 전시된 다리가 셋 달린 닭'과 같은 끊임없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아주 괴롭고 힘들었던', 그리하여 '순간적으로 한국을 떠나고도 싶었던' 뒷간의 경험을 제외하고는 큰 불만 없이 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조선의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는 그동안 대체적으로 지방관들에게 환대를 받았으나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는 위협적인 언사를 받기도 했고, 실제로 신변에 위협도 겪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도착한 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884년 12월 14일... 나는 밤 11시에 방에 들었다. 하느님의 가호에 감사하며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45일 만에 처음으로 지금 나는 안전하다. 하지만 조선의 고통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조지 포크의 여정
    포크가 소지했던 조선정부의 여행허가서 호조(護照)

     

    포크가 수표교 위에 있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도둑을 맞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좀도둑의 짓이 아니라 갑신정변의 혼란 중에 일어난 변고로, 그는 자신의 실종된 일본인 요리사도 살해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쉴 곳을 잃은 그는 미국공사관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는 그 와중에서도 풍비박산된 서광범의 가족을 도왔다. 이것은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포크가 한 일이기에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험을 감내하고 행한 선행이라 더욱 가치가 빛난다.
     
    1편에서도 말했지만 초대 미국공사 루시어드 푸트는 본국정부가 조선공사에게 대해는 무성의와 푸대접에 격분해 공사직을 전격 사임하고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버렸다.(1885년 1월) 이에 공사관 무관인 포크 중위가 얼떨결에 공사대리를 맡게 되지만 역시 본국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없었다. 까닭에 당시 포크는 조선의 우표를 모아 뉴욕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우표수집가들에게 판매해 활동자금을 마련할 정도였는데, 그와 같은 상황에도 주머니를 털어 서광범의 가족을 도왔던 것이다. 
     
    물론 그 부담이 크지는 않았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엽전 100개를 꿴 3kg의 돈이 미국 돈 1달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밝혀질 경우 그는 조선정부보다도 미국정부의 질책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국사범의 가족들을 돕는 일은 어느 경우든 정당성을 보장받기 힘든 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 돈을 써 서광범 가족들의 출옥을 도왔을 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포크는 서광범의 어머니에게 달러를 전달할 때 항상 미국에 있는 아들 서광범이 보내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포크가 자신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이유는 달랐다. 그는 체면을 생명보다 중시하는 조선 사대부나 그 가족에게 있어 남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 자괴감이 상당하리라 염려한 까닭이었다.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도 말했던, "조선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해 남에게 빌어먹느니 굶어 죽는 쪽을 택한다'"는 그 자존심에 대한 배려였던 것이다.  
     
     

    미해군사관학교 시절의 조지 클레이턴 포크 (1856-1893) /

     
    앞서도 말했지만 포크의 공사대리 시절에도 미국정부의 조선에 대한 무관심 정책은 지속되었다. 포크도 달리 두드러진 정치적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시 포크의 공식 활동이라고는 1884년 6월 24일 인천에 상륙한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맥클레이 이래 알렌, 스크랜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밀려드는 미국 선교사들의 뒤치다꺼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친한적 정치 행보를 보였던 듯, 위안스카이는 고종에게 미국공사를 추방하지 않으면 자신이 떠나겠다며 압박해 댔고, 위싱턴 주재 청나라 공사도 포크를 조선에 계속 두는 것은 두 나라의 관계를 해치는 일이라며 줄기차게 포크의 소환을 요구해 댔다. 
     
    1887년 6월, 포크는 결국 본국 정부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는 본국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깊었는지 자국으로 돌아가가기를 마다하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그리고 연인이 살고 있던 일본으로 떠났다. 그달 29일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울분을 토로했는데, 자신의 직을 잃었데 대한 상실감이 아니라 저 돼먹지 못한 위안스카이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못 견뎌했다. 한마디로 정의가 굴복당했다는 모욕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살, 조선에 온 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 온 5년 후인 1893년 8월 6일 후지산을 등반하다 죽었다. 조선에서 탈진상태로 일본에 온 그는 후지산의 남동쪽 아래 휴양지, 다케다 신겐이라는 옛 무장(武將)의 고향으로 알려진 후지산록 호수 근방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당일 일본인 아내 및 친지와 함께 후지산 등반에 나섰다. 그 도중에 일행과 멀어진 그는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폭행 등을 당한 가해의 흔적은 없었으며, 부검의는 심장 마비 혹은 과로사라는 소견을 밝혔다.  

    몸이 아픈 포크가 왜 갑자기 등반을 하게 되었나, 그리고 일행과는 왜 떨어지게 되었나 등, 죽음에 의혹을 품은 본국의 가족들은 그의 사인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하려 했으나 그의 유해는 이미 일본식으로 화장되어 묻힌 후였다. 이에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저 부검의의 소견이 존중될 수밖에 없었지만 썩 깨끗한 결말은 아니었다.

     
    그가 다닌 미해군사관학교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평생을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미국인의 숭고한 죽음"으로 평가했으며, 그에 대해 연구했던 미국의 한 학자는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었다.
     
    "조지 포크는 자신의 건강을 바쳐 조선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본국 정부는 그의 열정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이해관계가 없는 조선의 미래를 보증하는 위험을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국 정부는 양국 우호 관계의 탁월한 옹호자였던 조지 포크를 불신임하고 퇴출시켰던 것이다." (Robert E. Reordan, 'The Role of George Clayton Foulk in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84~1887)
     
     

    일본 교토 동지사대학 묘역에 있는 조지 포크의 묘 / 그런데 포크의 무덤이 일본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그가 젊음을 바친 한국에 돌아와 묻히기를 희망해본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의 선교사 캠벨 묘 / 배화여고의 창립지로서 묘비에는 "나는 조선의 위하여 일하며 조선으로 돌아가 묻히겠노라"는 그의 평소 말을 새겼다. 조지 포크의 마음도 이러했으리라 여겨진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는 한국전쟁의 포탄 자국이 뚜렷한 무덤도 있다. 이 역사적 장소에 조지 포크의 유해를 모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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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