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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3. 9. 05:2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04∼1910년 사이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으로, 당시 발행되던 일간지 가운데서는 거의 유일한 신문다운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사장이던 베델은 놀랍게도 영국인 청년이었다. 그는 22살 때인 1904년 3월 10일,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내한했다. 

     

    베델이 조선에 온 것은 <데일리 크로니클>의 임시특파원 자격이었다. 당시 일본 고베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청년 베델은 러일전쟁 취재에 흥미를 느끼고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모집에 응했는데, 러일전쟁 직후 파견된 토마스 코웬에 이은 두 번째 임시직 특파원이었다. 일본 업체들의 소송과 형제 간 불화 등으로 일시 사업을 접고 있던 베델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조선에 온 것이었다.

     

    * 1872년 창간된 <데일리 크로니클>은 1930년 <데일리 뉴스>와 합병해 <뉴스 크로니클>로 바뀌었고, 1960년 <데일리 메일>에 흡수 통합되었다.

     

    그는 조선에 온 지 한달만에 일본군인의 방화가 의심되는 경운궁(덕수궁) 화재사건을 특종해 전송했고, 이는 세계 만방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오히려 특파원에서 해고되었던 바, 궁지에 몰린 일제의 강력한 항의에 해고된 듯 여겨진다.

     

    그렇지만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일제의 조선인 탄압과 핍박받는 대한제국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돌아가지 않은 채 조선 땅에 눌러앉았고, 1904년 7월 18일 한국인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대한제국의 권익을 위해 싸우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렸다. 

     

     

    화재 전인 1902년에 찍은 경운궁 중화전 사진
    화재 후 경운궁 광명문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과 이를 지켜보는 일본 경찰들을 그린 삽화 / 베델은 1904년 발생한 경운궁 대화재가 고종이 외국공관과 인접한 경운궁 머무는 것을 싫어하던 일본인들이 저지른 방화로 추측했다.
    1904년 4월 16일자 <데일리 크로니클>에 실린 베델의 ‘한국 황궁의 화재’ 기사
    복원된 중화전 / 중층으로 세울 여력이 없던 대한제국은 1906년 단층으로 복원했다.
    종로구 수송공원의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표석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에 있어 당시의 국제관계를 십분 활용했으니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에 의지하고 있는 일본의 약점을 노렸다. 까닭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가 자신들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며 반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음에도 발행인인 영국인 사장을 어찌하지 못했는데, 대신 주간(主幹)인 양기탁만을 이런 저런 이유로 잡아들였다. 그러면 베델은 그 빈자리를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으로 대신하게 하며 신랄한 대일(對日) 비판을 이어갔다.

     

    《대한매일신보》 / 순한글판, 국한문 혼용판.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의 3종류로 발향되었는데, 월 구독료 30전의 유가지였음에도 발행부수 1만부를 상회했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82-1909)
    양기탁(梁起鐸 1871-1938) / 서대문형무소 수형 때의 사진이다.
    일제의 경천사탑 반출사건을 비난한 대한매일신보 사설 / 1907년 3월7일 대한제국 황태자(순종)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일본인들을 동원해 개성 경천사 10층석탑을 강제로 뜯어간 사실을 특종보도했다. 이에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불리함을 인식한 일제는 탑을 되돌려주었다.
    해체되기 전의 개성 경천사 10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천사 10층석탑

     

    일제는 이 같은 베델을 당연히 눈엣가시로 여겼으니, 영국 유학시절 언론의 힘을 체득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특히 <대한매일신보>를 두려워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을사늑약을 비판하며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놓아 크게 우노라라)이라는 명문(名文)의 사설을 전재(轉載)하고, 영문판에도 번역문을 실어 일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합의 체결된 을사늑약은 조약합의문에 조약의 제목조차 없고, 박제순은 황제의 위임장도 없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둔다는 내용을 합의 체결하였던 바, 국제법상 엄연히 무효였다.

     

    까닭에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친서를 작성하여 일본의 주권침해를 공개 규탄하였으니 1921년 12월 1일 영국 트리뷴지에 이 사실이 보도되었다. 여기에는 필시 베델의 역할이 컸을 터인데, 이듬해 1월 6일 <대한매일신보>에도 같은 내용이 보도되어 을사늑약에 대한 고종의 반대 입장을 온 국민에게 주지시킬 수 있었다.

      

     

    고종이 작성한 을사늑약 무효 선언서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인 이유

     

    이에 일제는 영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베델을 경성주재 영국공사관 법원에 두 차례나 세웠다. 베델은 1908년 6월, 벌금형과 3주 금고형을 받고 상하이로 추방되었고, 신문사측에서는 발행인을 베델의 비서인 A. 만함으로 바꾸어 발행을 지속하였으나 결국 정간되었다.

     

    베델은 형 집행이 끝난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일제에 의해 정간되었던 신문을 복간시켰다. 정의감에 불탔던 언론인 베델은 이와 같은 불굴의 투지로써 일제와 맞서 싸웠으나 병마에는 어쩔 수 없었으니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나는 죽으나 신문은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된 직후인 1910년 8월 28일, 1461호를 마지막으로 총독부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베델에게는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배설(裵說)이란는 한국 이름을 좋아했던 미남청년 어니스트 베델 / 호머 헐버트와 함께 유이(有二)한 외국인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여자이다.
    양화진 베델의 묘
    비석 뒷면의 일생에 관한 명문을 일제가 정으로 쪼아 망실시킨 까닭에(오른쪽) 해방 후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왼쪽) / 뒷 건물은 「100주년 기념선교관」
    개신교 각 교파의 운영권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100주년 기념선교관」
    「100주년 기념선교관」의 나무 그림자
    종로구 홍파동 2-1 베델이 살던 집 / 조선에 정착한 후 사망할 때끼지 가족과 이곳에서 살았다.
    홍파동 월암공원에 세워진 베델 집터 표지석
    베델 집터 바로 밑의 홍난파 가옥 / 친일파 집은 보존되고 애국지사 집은 2002년 무관심 속에 사라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다룬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1908년 일본 군용철도 건설에 용산 둔지미 마을의 민가가 무단 수용된 데 항의하는 <대한매일신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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