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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료봉사에 매진하다 요절한 성공회 선교사 랜디스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4. 11. 00:09

     

    인천광역시 개항로 45번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교회 건물은 1890년 영국 성공회 존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당이다. 본래의 교회 건물인 성미카엘 성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은 중구 내동 성누가병원 자리에 1956년 6월 다시 세워진 것이며, 겉보기와는 달리 지붕은 한국의 전통 목구조에 기와를 앉은 한·양(韓·洋) 절충의 건물이라는 것이 안내문의 설명이다.

     

    성공회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1890년 9월 29일, 조선 초대주교로 서품을 받은 영국인 존 코프(한국명 고요한) 신부가 제물포 항에 도착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전국에 100여 개의 교회를 두게 되었는데,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 주교좌교회 건물을 비롯해 모두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앞서 사진과 함께 설명한 바 있다. (☞ '평택 성공회 성당에서 만난 사람의 아들 예수'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최초의 성공회 교회 성미카엘 성당 /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던 바, 당시 참전했던 영국군 참전 용사들이 본국에 돌아가 모금운동을 벌임으로써 1956년 지금의 복원된 교회가 세워졌다.
    내동교회의 초기 모습
    성공회 내동교회의 외관

     

    고요한 주교는 의료선교에 역점을 두고 선교 의자가 투철한 25살의 젊은 내과의인 엘리 바 랜디스(Eli Bar Landis, 한국명  남득시)를 영입했다. 랜디스는 캐나다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하다 한국의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다. 그는 1890년 8월 26일 캐나다 밴쿠버항에서 출발, 일본 요코하마와 부산항을 거쳐 9월 29일 마침내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그는 사전에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천재적 머리를 지닌 랜디스는 금방 한국어와 한문을 습득하여 인천 내동의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에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 선행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병원/ 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는 성누가병원은 조선인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이니 조선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했던 바, 그가 얼마나 사려 깊고 이해심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말이지 조선 사람에게는 그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에 다름 아니었다. 

     

     

    엘리 바 랜디스(Eli Bar Landis, 1865~1898)

     

    랜디스는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대부분의 형제들은 농부가 되었지만 워낙에 똑똑했던 랜디스는 공부를 하게 하였으니 불과 16살에 명문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5년 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랭커스터 시립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유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정이 많았던 그는 낙후된 곳에 가서 의료 봉사를 하는 쪽을 택했다. 그의 성정이 이러했던 바, 성공회 관계자들이 그에게 5년간의 조선 의료 선교사를 제의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이처럼 각오를 하고 들어온 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랜디스 눈앞의 현실은 녹녹지 않았다. 인천 지역에서는 처음 생긴 이 서양병원으로 인천과 그 근방 지방 및 강화도를 비롯한 섬에 사는 조선인 환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는데, 그는 입원과 왕진을 제외한 외래만도 1년에 만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다. 용한 의사라는 소문에 황해도와 충청도, 멀리는 전라도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의사와 약이 부족했으나 퇴역한 영국 해군 의무관 출신 의사인 와일스와 간호교육을 받은 수녀 2명이 랜디스 못지않은 열정으로 치료를 도왔다.

     

    부족한 약들은 조선의 시장과 산천을 돌며 비슷한 성분의 약재들을 찾아 보충했다. 가난한 조선의 환자들은 대부분 치료비를 지불하지 못했고 과일이나 계란을 두고 가는 일도 흔치 않을 정도였지만 랜디스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조선인들은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고, 병원 뒤의 야산을 '약대인 산'이라 할 정도로 존경했다. 그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5년간의 사역 후 돌아가지 않고 계속 환자들을 돌보았다. 자신이 아니면 버려지게 될 조선인 환자들 생각에 돌아가고 싶어도 차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낮에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무료 의료활동을 하고 밤에는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언제나 몰입을 하여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리고 즈음하여 설립을 준비하던 서울 낙동 성마태병원을 비롯한 성공회 주관의 여러 병원의 설립에도 관여하였고, 인천해관(세관) 촉탁의사로서 검역을 담당하기도 했으며,(1895년) 해관 총세무사 촉탁의사로서 해관 주치의도 맡았던 바,(1898년)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도 돌보았으며, 그곳 아이들을 위해 수시로 왕진을 갔다고 한다. 

     

    그는 1898년 4월 16일 병원 근무 중 문득 쓰러져 약도 쓸 사이 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겨우 33살이었다. 사인에 대해서는 피로 누적에 장티푸스가 겹쳐 발생한 일이라고 하지만, 한마디로 과로사였다. 성누가병원은 랜디스 사망 후 잠시 폐쇄되었다가 임시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병원은 1904년 영국인 웨이어 박사가 이아 받아 의료가 재개되었으나  1916년 그가 인천을 떠나면서 완전히 문을 닫았고, 이후 진료소는 성공회 신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다.

     

     

    앞의 큰 기와집들이 성누가병원이고 뒤의 작은 집이 아펜젤러가 처음 지은 화이트 채플 예배당이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1895년 랜디스 재직시의 입원 환자들 (인천투데이 사진)
    내동교회 내에 남아 있는 성누가병원 진료소 건물
    밖에서 본 모습
    교회 내의 고요한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흉상
    교회 내의 랜디스 박사 기념비

     

    그는 인천 북성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으나 1965년 북성동 외국인 묘지가 청학동 공원묘지로 합쳐지며 이장을 해야 했는데, 그때 무덤에서 길이 8cm, 폭 5cm의 묵주 형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십자고(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조각된) 형태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를 수습한 인천시립박물관 측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뒷면의 흐릿한 명문이 확인되었다. The MISERICORDIA(미세리코르디아), 라틴어로 '자비'를 의미했다. 랜디스는 정말로 그 말을 실천하며 산 사람이었다.  

     

     

    랜디스의 무덤에서 출토된 십자가
    인천가정묘지 외국인 묘역의 랜디스 무덤과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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