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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택 성공회 성당에서 만난 사람의 아들 예수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3. 1. 8. 17:35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공회(聖公會)라는 단어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거룩한 보편적 교회, The Holy Catholic Church)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는 대개 Anglican Church 혹은 Church of England로 불린다. 그 출발이 '영국 국교회(English Church)'로부터 비롯된 까닭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성공회는 영국 국왕 헨리 8세(1491-1547)의 바람기가 불러온 산물이다.

     

    헨리 8세는 부인으로 맞은 아라곤 왕국의 공주 캐서린을 버리고 새 애인인 앤 볼레인과 결혼하려 했지만 로마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가 로마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인데(영국 국교회), 이후 불어닥친 유럽대륙의 종교개혁 열풍에 편승해 성공회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 '성공회의 역사')

     

    성공회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1890년 9월 29일, 조선 초대주교로 서품을 받은 영국인 존 코프(한국명 고요한) 신부가 제물포 항에 도착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포교에 성공하여 지금은 전국에 100여 개의 성당을 두고 있는데,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건물을 비롯해 모두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어 신앙과는 별개로 발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찾아가 보곤 한다.

     

     

    인천시 내동 성공회 성당 / 1890년 존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다. 송학동의 옛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은 중구 내동 성누가병원 자리에 1956년 6월 다시 세워진 것이다.
    1900년 지어진 강화읍 성공회 성당
    강화읍 성공회 성당의 내부
    1906년 건립된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 / 강화읍에 있는 성당에 이어 강화도에서 2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뒤의 로마네스크 건물은 근자에 신축됐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교구 건물 / 존 코프 주교가 1922년 착공하여 1926년 5월 2일 준공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이다.
    2020년 서울시가 성공회 건물 앞에 첨성대를 세웠을 때의 사진 / 이 기발난 발상의 조형물은 욕만 바가지로 먹고 사라졌다.
    1923년 건립된 충북 진천의 성공회 성당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에 위치한 성공회 안중성당을 찾은 것은 그 일환이었으니 아마도 그곳 제단과 성수대(聖水臺)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018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안중성당의 제단과 성수대는 1950년대 만들어진 대리석 소재의 조형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특이한 케이스다.

     

    건물 역시 독특해 역사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건물은 1999년 새로 건립된 것이고 1934년 전통 한옥 양식으로 건축되었던 옛 건물은 보존되지 못했다. 안중성당 정원에 놓인 석조 제단은 미사 때 제물(祭物)을 바치기 위해 마련된 단(壇)이며, 성수대는 성수를 담는 돌확으로 신자들은 이 성수에 손가락을 찍어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성당으로 입장한다.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의 성공회 안중성당
    안중성당의 제단과 성수대
    제단의 뒷면


    그런데 그때 내가 이상의 것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단 근방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려진 예수 상이었다. 유대총독 빌라도가 패에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는 I.N.R.I.의 티툴루스가 선명한.... 티툴루스는 십자가 위에 부착시키는 죄 명패로서 처형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표시하는데,  I.N.R.I.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뜻으로 요한복음에는 히브리어와 라틴어(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십자가 예수 상 머리의  I.N.R.I.는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이라는 라틴어의 첫 글자만을 딴 것으로, 말한 대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뜻이다. 즉 유대 나사렛 사람 예수는 유대인의 지도자를 사칭한 죄로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유대인임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예수 본인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안중성당의 나사렛 사람 예수 상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형상화된 모든 예수는 중동인의 모습이 아닌 백색 피부와 우뚝한 콧날을 가진 유럽인(로마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된 것은 꽤 오래여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맬컴 엑스는 일찍이 '유색인 예수가 진짜 예수'임을 주장했고, 미국의 인권운동가 숀 킹은 "유럽계 백인 형상을 한 예수는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이라며 이와 같은 형상을 한 예수 상에 대한 파괴를 주장하기도 했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이끌고 있는 숀 킹은 성서 마태복음의 내용을 들먹이며 "성서에서 예수 가족이 숨고 섞이고자 한 곳이 어딘 줄 아느냐. 그곳은 유럽 땅이 아닌 아닌 이집트"라며 성서의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백인 예수상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백인이라면 유럽 땅으로 가서 숨었겠지만 그의 가족이 이집트로 간 이유는 여러 가지로 초록이 동색인 까닭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킹은 "예수상뿐만 아니라 그의 유럽 어머니(성모 마리아)와 가족, 친지들을 담은 모든 벽화나 스테인드글라스도 파괴돼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백인 나사렛 예수/ 하지만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백인 아기예수를 든 세인트 메리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워너 셀만(1892~1968)이 그린 '나의 목자이신 주님'(The Lord is My Shepherd)
    백인 예수를 정형화시키는데 절대적 기여를 한 워너 셀만의 '예수의 초상'
    2005년 영국 맨체스터대학 리처드 니브 교수가 복원한 예수의 얼굴
    BBC의 의뢰를 받아 리처드 니브 교수가 복원한 예수의 얼굴은 예루살렘 근방에서 출토된 1세기 유대인의 인골 수천 구의 평균적 특징을 찾아내 복원했으며 키는 당시 사람의 평균인 155cm로 추정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만일 이 그림을 예수의 초상으로서 교회에 내건다면 그 즉시로 교인의 반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서에 반하는 모순은 이뿐만이 아니니 긴 머리의 예수 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 예수가 활동했던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는 삼손과 같은 '나실인 '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기를 수가 없었다. 이는 미풍양속에 반하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근동 유대인들의 장발을 재삼 단속하였다.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 전서 11장 14절)

     

    그러나 긴 머리의 백인 예수가 아주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니니, 앞서 말한 로마병사 판테라(Tiberius Julius Abdes Panthera)의 사생아라면 가능하다. 폼페이우스의 부하 군인이었던 판테라가 점령지 유다 땅의 마리아를 임신시켰다는 설에 대해서는 앞서 '예수가 외계인의 자식이 아닐 경우 생겨날 문제점들(II)''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누구인가(I)'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판테라의 묘비석과 묘비명 / '티베리우스 압데스 판테라'의 퍼스트 네임 티베리우스는 그가 40년을 복무한 후 티베리우스 황제 명의의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을 때 덧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로마 제 1보병대의 궁수로서 40년 간 복무하다 향년 62세로 죽어 이곳에 묻혔다'는 묘비명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 바트 크로이츠나흐 시 뢰메르할레 박물관의 판테라 묘비석 안내문 / 전설처럼 떠돌던 판테라의 존재는 1859년 10월 독일 라인강변 빙게르부르크 도로 공사 현장에서 그의 묘비가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안내문에서는 판테라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뢰메르할레 박물관의 또 다른 로마병사 묘비석
    뢰메르할레 박물관의 로마 관련 유물
    뢰메르할레 박물관의 로마시대 모자이크화
    모자이크화의 상세
    판테라의 묘비석을 실측하고 있는 미 노스케롤라이나 대학 종교학 교수 제임스 타보르(James D. Tabor) /그는 판테라의 묘비 관련해, 유대 세포리스에서 마리아를임신시켰던 있던 판테라가 BC 6년 그리스 북쪽 달마치안으로 전보됐고 AD 9년 게르만족과의 접경지 독일 빙게르브뤼크로 옮겨 주둔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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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