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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 이규경, 성호 이익이 본 기독교 I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3. 5. 26. 23:16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백과사전류의 글 모음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오주(五洲, 이규경의 호)가 쓴 연문(衍文, 거친 문장)을 장전(長箋, 긴 쪽지)에 이어 붙인 잡다한 원고'라는 뜻으로, 당연히 '오주 / 연문 / 장전 / 산고'로 읽힌다. 제목에 부전지(附箋紙)에 길게 이어 붙였다는 사전 설명을 담았지만 막상 보면 60권 60책의 볼륨에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는데, 원래는 더 많았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지금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60책은 육당 최남선에 의해 보존된 분량이라고 한다.

     

    책의 내용은 역사·경학·천문·지리·불교·도교·서학(西學)·예제(禮制)·재이(災異)·문학·음악·음운·병법·광물·초목·어충·의학·농업·광업·화폐 등 총 1,417 항목에 달하니 잡다한 산고(散稿)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흔히들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조부(祖父)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살펴보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영향이 더 큰 듯하니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내용은 거의 같다. <성호사설>은 30책으로 이규경의 책 보다 볼륨은 작으나 3,007 항목으로 취급한 것들은 더 많다. 

     

    < 오주연문장전산고>
    <성호사설>

     

    재미있게도 이규경의 호 '오주'는 '오대양 육대주'를 가리킨다. 즉 그는 세계 각국의 것들을 모두 알고 싶어 했고, 호도 그렇게 지었다. 그래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별별 것이 다 담겼는데, 서양 것들은 청나라의 책들을 참고했다. (사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옛 기록을 무조건 믿지 않고 그 근거를 추적해 들어가 변증한 한 것이 책의 가치를 빛낸다. 그리고 당대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불교나 기독교에 관한 것도 적었는데, 중국에 기독교가 전파 사실도 매우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따르면 당나라 무덕(武德, 당 고조 시기의 연호) 4년(621)에 현사(祆祠, 하늘에 제사하는 사당)와 관리를 두고 서양 사람을 시켜 제사를 드리게 하였는데, 불을 켜 놓고 저주(詛呪,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비는 행위)하였고, 정관(貞觀, 당 태종 시기의 연호) 2년(628)에는 파사사(波斯寺)를 짓게 하였고, 천보(天寶, 당 현종 시기의 연호) 4년(745) 7월에는 칙명을 내려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고치게 하고 천하의 주군(州郡)에 있는 파사사도 이에 준하여 고치게 하였고, 개원(開元) 20년(732) 7월에는 '말마니법(末摩尼法)은 본시 삿된 것으로 망령되이 불교(佛敎)라 칭하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니 엄중히 금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러나 서쪽 오랑캐들은 자기 나라의 법만을 옳게 여기고 그대로 행동할 뿐, 중국의 법에는 응하지 않았다. 

     

    이규경이 당나라 정치가 겸 역사가인 두우의 저서 <통전>을 빌어 말한 위 내용은 AD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판명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중국 전래를 말함이었다. 예수의 신성(神性)보다 인성(人性)을 더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칼케돈 종교회의의 판정에 불복하여 동쪽 페르시아 제국으로 건너왔고, 그 일파가 다시 아라비아와 인도와 중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635년에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고 이후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약 150년 간 당 황실의 비호 속에 성장하였다. 그들이 중국까지 오게 된 사연이 아래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781년 서역인으로서 당나라 관리로 중용된 이자드부지드(중국명 李斯)라는 사람이 거금을 출자해 경교 사찰인 대진사(大秦寺)에 세운 비석이었다. 한자 외에도 시리아어로 경교 승려 70인의 이름을 기록한 특별한 비문이다. 

     

     

    서안 비림(碑林)박물관의 대진경교중국유행비 / '대진'은 로마, '경교'는 기독교를 의미하는 바, '로마 기독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한 사실을 적은 비문'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당(唐) 황실의 지원 속에 화려하게 개화(開花)했던 경교는 당 고종의 사후(死後), 측천무후의 박해(713년)가 있었고, 다시 도교 신봉자인 무종의 박해를 받았다. 이에 교도 3만여 명이 학살되는 대탄압이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몽골 초원 방면으로 다시 이주의 길을 떠났던 바, 이규경의 기록은 그것을 말하고 있음이었다. 그리고 이규경은 청나라의 천주교 전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또 근대(近代)를 들어 말하더라도, 이마두(利瑪竇,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중국식 이름) 이전에 대성덕 사방제(大聖德沙方濟)*라는 사람이 중국에 갔었다. 즉 그는 남회인(南懷仁)**보다 1백 20년 이전에 월동(粤東, 지금의 중국 광둥성)의 내지에까지 들어가 있다가 죽었는데, 이 사적이 남회인의 <서방요기(西方要紀)>에 보이고, 탕약망(湯若望, 선교사 아담 샬의 중국식 이름)의 <진도상설(進圖像說)>에는 "다묵(多黙)***이 직접 중국에 온 이후부터 대대로 왕래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 대성덕 사방제는 스페인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aint Francis Xavier,1506~1552)의 중국식 이름이다. 이규경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거론한 것은 그 자체로도 놀라우나 팩트와는 틀린 부분이 있어 부기한다.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와 일본에서 선교한 후 중국 광둥성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상천도(上川島)에서 죽었다.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

     

    ** 남회인은 벨기에 선교사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를 말함이다. 그는 1659년 중국에 포교를 왔다가,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천문대장)이 되어 역법의 개정에 이바지하였으며 1673년 삼번의 난 때는 대포를 만들어 청나라를 도왔다.

     

    *** 다묵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토마스)를 말함이다. 예수 사후 도마가 동방으로 전도를 떠났다는 전설 차원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나 중국에 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성덕(大聖德) 이전에 이미 왕래하였던 것이고 애유락(艾儒略)*의 말에, "서양과 중국은 그 거리가 거의 9만 리나 되어 예로부터 서로 왕래할 수는 없었으나, 해외에서 중국을 대지납(大知納)이라 존칭해 오다가 최근 백 년 전부터 서양의 선박이 비로소 중국에 왕래했다" 하였다.

     

    * 애유락(Giulio Aleni, 1582~1649) 중국에 입국한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를 말함이다. 예수회 소속의 베네치아인으로 1610년 마카오에 상륙하였다. 이후 1613년 내지로 들어가 복건성과 강서성에 교회당을 짓고 중국에서 30년 이상 머무르며 포교하였다. 

     

     

    줄리오 알레니가 주교로 있던 마카오 성바오로성당

     

    이상을 보면 18~19세기에 살았던 이규경은 21세기 현대 기독교인들도 모르는 기독교의 동방전래에 대해 꿰뚫고 있는 셈인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독교의 대강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 후 스페인 신부 방적아(龐廸我, Diego De Pantoja, 1571~1618)가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칠극(七克)>의 개요와 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

     

    그 교(敎)에서는 야소(耶蘇, 예수)를 글리사독(契利斯督, 크리스트)이라 하고 법왕(法王, 교황)을 비사파(俾斯玻, Bishop)라 하며, 전도사를 살책이탁덕(撒責而鐸德)이라 하니 곧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와 같은 사람이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글리사당(契利斯當, 크리스찬)이라 하니 곧 구양후(丘良厚) 등과 같은 사람이다. 칠일마다 두사(陡斯)를 제사하는 것을 미사(米撒)라 하고, 야소의 탄생이나 승천한 날 등에 제사하는 것을 대미사(大米撒) 라 한다.

     

    그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도들끼리는 서로 벗(敎友)이라 할 뿐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두 야소만을 스승으로 섬긴다. 교리서로는 판본으로 된 이마두의 <천학실의(天學實義=천주실의)> 등의 서적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의 친구인 의서파니아(依西巴尼亞, 에스파니아) 사람 방적아(龐廸我, 디에고 판토하)가 만력(萬曆) 27년(1599)에 도착하여 이마두와 함께 입조(入朝)하였으며 <칠극(七克)>이라는 교리서를 저술했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인생의 모든 일은 없애거나(消) 쌓는 것(積)의 두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악(惡)을 없애고 덕(德)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악한 일이란 욕심에서 비롯되는데, 욕심 자체는 본래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을 간직하여 영신(靈神)을 보호하는 것이 욕심이거늘, 사람이 이 욕심에 빠져 사사로이 행동함으로써 죄와 허물이 비로소 생기고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겠다. 이 뿌리가 마음속에 깊이 박히면 부자가 되고자 하고, 귀(貴)하게 되고자 하고, 편히 살고자 기를 쓰게 된다.

    이 세 가지 큰 악의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 악의 꽃이 피어나고, 그 뿌리가 다시 가지를 낳으면 더 큰 문제이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탐심을 낳고, 귀(貴)히 되고자 하는 마음이 오만을 일으키며, 편안히 지내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스럽고 음란하고 게으른 마음을 일으킨다. 또 부귀와 편안함(逸樂)이 자기보다 나은 이를 보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며, 그것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면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이상이 악의 가지라 하겠다.

    탐내는 마음은 꽉 움켜쥔 마음이라 은혜로써 풀어야 한다. 오만한 마음은 사자(獅子)의 사나움과 같은 것이니 겸양(謙讓)으로써 굴복하자. 욕심내는 마음은 깊은 골짜기와 같은 것이니 절도(節度)로써 메우자. 음란한 마음은 넘쳐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니 정조(貞操)로 막아보자. 게으른 마음은 피곤한 말과 같은 것이니 채찍으로 다루어야겠다. 질투하는 마음은 성난 물결과 같은 것이니 용서로써 가라앉히자. 분노하는 마음은 무서운 불길과 같은 것이니 인내로 삭이면 어떠할까."

     

    * II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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