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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강에서 죽은 토마스 선교사 & 금석지감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3. 9. 8. 23:33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조선 땅에 상륙한 선교사도 꽤 많았으니 대표적으로는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회 맥클레이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뎠으며,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호러스 알렌이 도착했다. 또 그보다도 20년 앞선 1866년 7월 25일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를 타고 조선에 왔다 유명한 '제너럴셔면호 사건' 때 순교했다.
     
    또 그보다도 30년 앞선 1832년 7월 17일 독일 루터교회의 칼 귀츨라프(1803∼1851)가 선교 목적으로 충청도 보령 고대도에 상륙해 전도를 한 전례가 있다. 역사상의 공식적인 첫 외래 선교의 기록이다. 섬의 감기환자를 위한 약도 처방했는데(1832년 8월 2일) 이것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행한 첫 의료행위이기도 하다.
     
     

    고대도 귀츨라프 선교기념비

     
    1820년 베를린의 루터교 야니케 선교학교를 졸업한 귀츨라프는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중국과 동남아 선교에 진력하던 그는 1832년 조선으로 향하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탐사선 로드에머스트호를 탑승할 기회를 만났다. 그가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으로의 항해에 얼마나 기대가 지대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동남아에서 출항한 배는 1832년 2월 26일 중국 산둥반도 웨이하이를 거쳐 7월 17일 Chawang-shan, 즉 황해도 장산곶에 닻을 내렸다.
     
    하지만 귀츨라프는 첫 도착지인 장산곶에서는 하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먼저 내린 무장한 8명의 영국 군인들마저 조선 군인들의 퍼런 서슬에 도망치듯 되돌아와야 했다. 로드에머스트호는 다시 녹도, 볼모도를 거쳐 25일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해 고대도에 닻을 내렸는데, 이때 고대도 어민들은 장산곶 군인들과 달리 그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환대하지도 않았으니  그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이었다.
     
    귀츨라프는 이번에는 하선하여 런던선교회 소속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1782∼1834)이 번역한 한문성경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주민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훗날 당시 그 한문성서를 마을사람들이 기쁘게 받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때 귀츨라프는 영국 군인들과 함께 고대도에 보름 간을 머물렀다. 그는 섬 주민을 위해 산머루 와인 제조법 등을 가르쳐 주었으며 감기환자를 위한 약도 처방했다.
     
    그들이 고대도에 장기간 머문 이유는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보고된 장계에 대한 조선 국왕 순조의 회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 보고서가 어디까지 올라간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결과는 No였다. 당시 귀츨라프는 로드에머스트호 린제이 선장의 권유에 따라 <신천성서> 1질을 정성껏 포장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문서 1부와 함께 국왕에게 선물하였으나 그것들도 린제이 선장이 선물한 망원경과 함께 되돌아왔다. 
     
    귀츨라프의 동방 여행은 이렇듯 별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조선 선교 시도는 중국에 와 있던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1839~1866) 선교사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런던대학 졸업 후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으로 부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왔다. 그는 중국 도착 후 부인 케더린과 사별하는 아픔을 겼었지만 이를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승화시켰는데, 이 무렵 조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1866년 조선에 대한 보복 침공을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 함선에 동승할 계획을 세웠으나 프랑스극동함대가 갑자기 베트남 반란 진압을 위해 떠나는 바람에 계획을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대신 타게 된 배가 조선으로 가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였다.
     
    제너럴셔먼호는 상선이지만 화포를 탑재했고 선원들도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에 진입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이르렀고 운행을 제지한 중군(中軍) 이현익을 붙잡아 배 안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흥분한 평양의 군민들이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위협을 느낀 셔먼호의 상인들은 군중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리고 급히 대동강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썰물에 배가 모래톱에 좌초되며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고, 이틈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 예하의 지방관들이 각각의 군사들로써 셔먼호에 화공을 감행하여 배를 불태워 격침시키고 승무원 23명 대부분을 참살하였다. 토마스 선교사와 조능봉(조선인 동역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즉시 항복하였던 바, 몸이 묶여 강안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자비를 빌었다. 하지만  울분을 참지 못한 군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선원들도 죽여 없앴다. 여기까지가 실록(<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기사)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후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다.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 등을 통해)
     
    그 이야기는 군졸 박춘권이 "내가 오늘 서양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가지고 왔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 책이란 물론 성서이다.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은 필시 귀츨라프가 고대도 사람에게 주었다는 로버트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 <신천성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석에 있어서는 한문에 능통해야 했는데, 일개 병졸이었던 박춘권은 그것을 읽었고 (물론 병졸이라고 일자무식과 병치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조선 인구의 95%는 문맹이었다) 이에 회심하여 조카 이영태에게 신앙을 권유하였으며 이영태 역시 회심하여 훗날 레이놀즈 선교사의 동역자로서 한글성경 번역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 / 레이놀즈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1894년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한글 구약성서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스토리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조선 교회에, 특히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만들 정도로 평안도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한석진 목사의 글과는 다르다. 그의 자신의 편지에서, "제가 평양에 온 것은 임진년 10월, 즉 주후 1892년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26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때 저는 성경을 팔며 전도하러 다니면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탈 때 바깥으로 성경을 던지면서 "야소(예수)!"라고 외치며 죽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황현이 쓴 <매천야록>의 내용과도 다르니, 황현은 "무진년(1868년) 박규수가 평양감사가 되었다. 그때 미국인(영국인의 오기) 최난헌(崔蘭軒, 저메인 토마스)이 군함 한 척을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이 적들은 군함 전체가 타버리자 사나운 불길 속에서 함께 뛰쳐나와 물살을 헤치며 달아났다. 이들을 쏘아 네댓 사람이 쓰러졌고 나머지 사람도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박규수는 품계가 올랐고, 장교(박춘권으로 짐작되는 자)는 상을 받아 진장(鎭將)이 되었다"고 적었다. 
     
    이상의 상이한 기록으로 인해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순교인지 아닌지가 지금도 설왕설래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죽음이 영국 개신교의 평양 선교에 공헌을 했다고 믿는 분위기가 형성된 지 오래인데, 그것이 조금은 무색하게 지금의 영국에서는 개신교 교회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사실은 영국의 신교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 싸움, 즉 구교와 오랜 전쟁을 무색하게 만든다. (☞ '예수 이름으로 자행된 광란의 역사, 종교전쟁과 학살')
     
    물론 가톨릭도 신도가 격감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고, 또 이것은 영국의 신·구교를 떠나 유럽 전체 교회가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럽의 유명 성당이 매물로 나온 지는 오래이니, 그것들은 공공전람장이나 도서관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카페나 술집, 광란의 디스코클럽으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으로 전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 서울 강남의 어느 장로교회는 영국으로 선교를 떠났다. 그래서 무척 놀랐는데, 이에 대해 교회 관계자는 "우리가 영국 선교를 한 지는 꽤 한참됐다"며 조금은 으쓱대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한국에서 장로교의 본산 영국으로 역(逆)선교를 갔다니..... 그리고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닌 듯한데.....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매물로 나온 영국 블랜번의 교회 / 이 건물은 'SALE FOR ONLY£499'('단돈 83만원')이라는 간판을 다시 달았다.
    유서 깊은 이 런던의 교회는 45만 파운드에 매물로 나와 &amp;lt;더 가디안&amp;gt;에서 화제 기사가 되었다.
    영국에서 매물로 나오거나 문 닫힌 교회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상이 됐다. 한국의 가까운 미래를 먼저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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