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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자행된 광란의 역사, 종교전쟁과 학살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10. 27. 22:35
전쟁과 학살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극악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걸고 저지른 전쟁과 학살이 있다. 그 전쟁은 무려 4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통칭하여 종교전쟁이라 불려진다. 신교도와 구교도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살은 생뚱맞게도 개척자 정신이라 불린다. 기독교도들끼리의 싸움은 전쟁이지만 기독교와 이교도와의 싸움은 단순한 정복이요 개척으로 치부되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지금껏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定義)야 어쨌건 그 배경에는 예수가 있다. 인간에 의해 신이 된 예수가 어느덧 괴물이 되어 전쟁과 학살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곡절의 역사를 훑어보려 하는데, 과연 어디서부터 들여다보는 게 적당할까 하다가 콜로세움을 주목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한 자들이 원했던 미래는 결코 이런 상황이 아니었을 터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순교가 광란의 역사의 전주곡이 되리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터이기에....
영화 '글레디에이터' 속의 콜로세움
현재의 콜로세움
로마를 대표하는 건축물 콜로세움은 로마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 네로(재위 54-68년)가 만들기 시작하여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년)와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완공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2군단 군단장 출신의 군인으로 본래 황제의 자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게다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네로 황제가 시를 읊을 때 졸았다는 이유로 외딴 섬에 유배 가 양봉이나 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던 바, 어쩌면 로마에 돌아올 기회마저 없을 뻔하였다.
그를 살려낸 건 60년대 후반 들어 격화되기 시작한 유다 지방 유대인의 반란이었다. 예로부터 여호와 신앙으로 똘똘 뭉쳐온 그들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종종 반란을 일으켜왔는데, 근자에 들어서는 열심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그 세력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자 네로는 유배 중이던 베스파시아누스를 불려들여 진압을 맡겼다. 그는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자연스럽게 힘을 키웠는데, 그러던 중 네로와 갈바 황제가 살해되고 자신과 같은 군인 출신의 오토가 황제에 오르자 베스파시아누스 스스로도 황제를 꿈꾼다. 이른바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의 흉상
베스파시아누스는 결국 오토 황제의 직할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그 아들 티투스(재위 79-81) 역시 황제위에 오름에 있어 유대 반란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 역시 반란 진압의 공을 인정받은 덕에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른바 플라비우스 왕조를 여는 데 용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티투스는 서기 70년, 유대 반란을 완전 진압한 것을 기념하여 콜로세움 곁에 자신의 개선문을 세우기도 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또한 완전 파괴시켰다.(☞ '잃어버린 성궤의 진실을 찾아서')
티투스 황제(Imperator Tit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의 흉상
티투스의 개선문과 콜로세움
이후 서기 114년과 132년에도 유대인의 반란이 있었는데, 132년에 일어난 반란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제국에서 내쫓기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른바 유대인 2천년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즈음 로마는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때에 탄생한 어떤 유대인 청년이 만든 새로운 사조(思潮)에 물들기 시작했다. 인류사의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후세의 동양 사람들은 이 사조를 기독교라고 불렀다. 그 사조를 만든 예수 크리스트를 지칭해 부르는 이름이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처음에는 이 종교 형식의 새로운 사조를 탄압하였다. 예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미완성의 콜로세움 몰아넣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은 네로 황제의 행위는 그 탄압의 대표적 일례이다. 이후로도 도미티아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등의 황제가 기독교 사조를 소멸시키기 위해 진력했다. 그중 303년에 반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은 그 절정을 이루었으니, 교회 건물은 물론 개인주택이라도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면 파괴시켰으며, 그리스도인은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에서 제외됨과 모든 공직에서의 파면을 명시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든 맞아도 되며, 그러다 죽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게 만든 것이었다.
더불어 군인황제 시대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4개로 쪼개 4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하는 체제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권력이 안배되어 그럴싸하게 여겨지던 이 통치 체제는 결국 4명 황제 간의 전쟁을 불러왔는데, 그중 하나였던 영리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역으로 기독교를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으로서,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도의 보호를 명목으로 다른 황제의 영역에 진군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마지막 남은 황제 리키니우스를 누르고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삼위일체의 진실 I - 밀라노 칙령의 진실' / '삼위일체의 진실 II - 황제가 만든 신 예수')
영화 '쿼바디스(Quo vadis)'의 스틸컷
콘스탄티누스 황제상
기독교를 공인했음에도 자신은 끝까지 개종하지 않고 태양신 솔리 인빅투스를 숭배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바바리안들에 멸망했고, 같은 기독교가 국교였던 동로마도 이슬람에 멸망당했다. 그런데 서로마를 점령한 바바리안들도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들 역시 이 종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것이니, 그 첫번째 시행자는 프랑크 왕국의 초대군주 클로비스 1세(클로도베쿠스 1세)였다.(☞ '동서양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들 I')
클로비스 1세(재위 509-511)의 표준 영정
중세 유럽 기독교화(化)에 단초를 꿴 인물로, <다빈치 코드> <성혈과 성배>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해 낳은 '사라'의 후손으로 설명되는 바로 그자이다.(소설의 내용은 물론 허구다)
이후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들이 기독교를 통치 이념으로 사용하였던 바, 기독교는 마침내 권력의 이름으로 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이교도와 오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유명한 십자가 원정으로, 교황권(權)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인류사의 비극이다.(☞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I' / '세계사의 비극 소년 십자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럽의 서방교회는 동로마제국의 동방교회를 힘으로 찍어눌렀던 바, 갈등 끝에 그 둘은 결국 예정된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정교회의 역사')
그러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법. 부패한 절대권력의 교황권은 루터나 칼뱅 등, 이른바 신교도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신교도의 공격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니 구교(가톨릭)에 대항해 신교(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켰고, 또 동부 유럽의 제후국가를 중심으로 신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교가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 만무할 터, 신·구교는 서로를 이단이라 규정지으며 극단으로 치달았다. 한마디로 내 똥이 더 굵다는 것이었는데, 그 극단에서 벌어졌던 대표적 사건이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개척자 존 칼뱅이 제네바에서 행한 집단 살인행각,* 그리고 신·구교간의 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년)**이다.
* 아무리 뛰어난 종교라 할지라도 인간의 이기성을 극복할 수는 없는 법.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선으로 귀결시킨다. 이는 칼뱅의 집단 살인행각에서 잘 드러나는 바, 자신은 선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적극적인 악, 그것도 가장 극악한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장로교회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장 칼뱅은 제네바를 장악한 5년 동안(이른바 신정정치 기간 동안)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였으니, 13명이 고문 끝에 교수형을 당했고 10명은 단두대로 보내졌으며 35명은 화형당했다. 그리고 76명은 국외로 추방됐다. 그러한 칼뱅이 지향한 것도 분명 선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훗날 '제네바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얻는다. ☜ '악마를 찾아서')
**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30년 전쟁'은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에 달했다.(☜ '위키백과')
신교의 아버지 장 칼뱅(1509-1564)의 초상
칼뱅은 제네바에 있던 1555년 3월부터 1556년 7월까지 신명기에 대한 설교를 200번이나 했는데,(Currid, John D. 2006, 《Calvin and the Biblical Languages》) 신명기의 내용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지는 '신명기에 나타난 여호와의 콜스턴 뺨치는 인종차별주의'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칼뱅은 그 내용에 충실했던 것이다.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가 '30년 전쟁'의 비극을 묘사했다. 1632년 작.
그외에도 15~18세기 동안 벌어진 종교전쟁은 아래와 같다.
기사전쟁(1522년), 독일 농민전쟁(1524-1525년), 카펠 전쟁(1529-1531), 뮌스터 반란(1534-1535년), 재세례파 폭동(1535년), 비갓의 난(1537년), 수말카덴 전쟁(1546-1547년), 기도서 반란(1549년), 독일 제후전쟁(1522-1555년)
위그노 전쟁(1562–1598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쾰른 전쟁(1583–1588년),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전쟁(1592–1604년), 지그문트 폐위전쟁(1598–1599년)
17세기 종교전쟁
헤센 전쟁(1567-1648년), 이윌리히 계승전쟁(1609-1614년), 보헤미아 반란(1618-1620), 위그노의 난(1621-1629년), 제1차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625-1630), 제2차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635-1659), 토르스텐손 전쟁(1643-1645), 주교 전쟁(1639-1640년), 잉글랜드 내전(1642-1651년), 스코틀랜드 전쟁(1644-1651년), 아일랜드 전쟁(1614-1653년), 청교도 전쟁(1649-1653년), 사보이아 발도바 전쟁(1655-1690), 제1차 빌메르겐 전쟁(1656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년), 9년 전쟁(1688-1697년)
18세기 종교전쟁
스페인 계승전쟁(1701-1714년), 카미자르의 난(1702-1710년), 제2차 빌메르겐 전쟁(1712년) 외 등등
이런 전쟁들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간 기독교의 일파가 있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에 반대하여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였다.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을 일탈해 생겨난 기독교계의 종교지만 절대 신교적인 면은 없었으니 오히려 가톨릭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였다.(☞ '성공회의 역사') 이에 칼뱅주의 영국 신교도, 즉 청교도들은 17세기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에 몸을 실었다. 검약과 근면을 생활신조로,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주신 천직으로 여겨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이른바 '청교도 정신'은 신생 아메리카가 건실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복원된 메이플라워 호의 항해
유럽에서 주로 포도주를 운반하던 영국 수송선 메이플라워 호는 1620년 9월 16일, 승객 102명을 싣고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 항을 떠난다. 이중에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한 자유를 갈망하는 청교도 36명이 타고 있었다.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전시된 메이플라워 2호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하자면 적어도 이상은 사실이다. 이후 미국은 쇠퇴하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대신하는 신흥 강국이자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프로테스탄트가 1884년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젤러(감리교)라는 젊은 선교사의 가방에 실려 제물포 항에 상륙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본래부터 한국인이 믿던 우리의 고유의 신 '하ᄂᆞ님'에 편승해 승승장구한다.(☞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I - 게일이 말한 조선의 하나님' /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II - 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
예수가 태어난지 2000년 정도가 되어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고종은 혹시라도 미국이 조선을 도와줄까, 선교를 제약하거나 방해하지 않았고, 그와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조선은 급속히 신교화되었으니 서울과 평양에는 '야소쟁이'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특히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이 땅에 프로테스탄트가 상륙한지 채 50년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이것이 가히 놀랍지만 그러한 평양의 목사들이 1938년 9월 10일,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점은 더욱 놀랍다.( ☞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신사참배')
해방 후 기독교는 더욱 승승장구하였으니, 이 땅을 해방시킨 세계 최강국 미국이 믿는 종교라는 타이틀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초대 대통령 등극에 기여하기도 했다. 과거 2000년간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종교가 이렇듯 성세(盛勢)할 줄은 아마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도 몰랐을 것인데, 그 성장세가 정점으로 치닫던 1980년 8월, 스물 두 명의 저명한 목사들이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 광주 민간인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악마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5.18이 일어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이름을 대면 대충 알만한 22인이지만 지금까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 청교도들이 상륙했을 때 원주민(언필칭 인디안)은 그들 이주민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에 다름 아니었다.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땅을 내주어 집을 짓게 하고, 농사법 등 그 땅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원주민은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이렇듯 낯선 자들을 호의로 대했지만, 기독교 정신에 충만한 그들 이주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성서 창세기 28장)는 축복과 명령에 따라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들 이주민의 눈에 있어 원주민은 정복하고 타도해야 할 야만인이자 하나님를 알지 못하는 이교도일 뿐이었다.
이주민들은 답례를 구실로 원주민 유력자 300명을 초대해 몇 개의 집에 몰아넣고 일시에 불을 질러 죽였다. 이들 원주민에게는 마귀 사탄의 앞잡이라는 누명이 씌워졌다.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감염병 세균도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에게는 치명적이었다.(천연두 환자들이 쓰던 담요를 호의를 베푸는 척 원주민에게 나눠주어 의도적으로 세균을 감염시키기도 했다) 이주민은 원주민들의 주검 앞에서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1637년 청교도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민 마을을 습격, 남자 500명을 죽이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서인도제도 스페인 노예상에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들 또한 많은 이교도들은 지옥으로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들에 이어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주민들도 향후 350년 동안 개척과 선교라는 미명 하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땅을 빼앗았으며, 1억2천만 명이 넘는 중남미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아메리카 땅을 정복했다. 그럼에도 그들 이주민 후예는 물론 아메리카의 어느 기독교 단체도 이제껏 유감을 표명한 예가 없다.(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유럽 종교 전쟁 중 희생된 자에 대한 애도나 추모가 신·구교 어느 쪽에서도 없었던 것처럼.....
다만 지난 2005년 미국 의회 상원에서 6천만 명의 북아메리카 인디안을 학살한 데 대한 공식 사과를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후 4년이 지난 2009년 11월 5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인디언 564개 부족의 추장들을 워싱톤으로 초청해 사죄했다. 하지만 희생된 수천 만명의 인디언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가치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배상은 없었다.
미국의 인디언 학살 기록
디 브라운 저 <내 심장을 운디드니에 묻어다오>와 영화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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