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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비 목사 3종 종합선물 세트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8. 15. 23:16

     

     

    사이비(似而非)라는 단어는 언뜻 영어나 라틴어처럼 들리지만 공맹(孔孟)의 말이다. 공자는 <논어> 양화편(陽貨篇)에서 "향원(鄕愿)은 도덕을 훔치는 자(子曰鄕原德之賊也)"라 말하며 사이비(=似是而非, 옳은 것 같은데 틀리다)라는 말을 썼다. 여기서 향원이란 마을 안에서 군자의 평판을 얻고 있지만 내용이 따르지 않는 위선자를 가리킨다. 공자는 향원을 가리켜 "나는 비슷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고 했다. 공자가 향원을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恐其亂德也) <맹자> 진심편(盡心篇)에는 맹자가 이 사이비라는 말을 빌려 다시 향원을 공박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현전(現傳)하는 <논어>에는 위의 말이 없어 <맹자>가 출전이 됐다.

     

    이 향원을 요즘 말로 하면 이중인격자 쯤이 될 수 있겠지만, 향원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대신 사이비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는데, 그 용례를 보면 대개 '사이비 종교', '사이비 교주', '사이비 목사' 등 주로 그릇된 종교나 성직자들의 비유에 쓰인다. 다른 데보다 그쪽이 적절한 용례이기 때문일 것이니, 맹자는 향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자들은 비난하기가 쉽지 않고 공격하려도 공격할 도리가 없다. 겉으로는 올바른 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세속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것이 이들이다. 세속적인 이익은 다 차지하면서도 그 처신은 교묘하여 겉으로는 의젓한 군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들을 '덕의 도둑'이라 한 것이다."

     

    오늘은 '사이비 목사 3종 종합선물 세트'에 대해 말하려 하는데, '종합선물 세트'라는 말이 적절한가는 모르겠다. 나의 어릴 적에는 '종합선물 세트'라는 이름으로서 여러 상품들을 한 데 묶어 명절날 등에 기획판매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먹을 것이 흔하고 다양해진 요즘에야 그것이 먹힐 리 없겠지만 그래도 아직 단어는 살아있는 듯한데, 사이비와 마찬가지로 주로 안 좋은 쪽에 쓰인다. 아무개 연예인이 음주운전까지 해 3관왕을 달성했다든지, 3종 종합선물 세트를 완성했다든지 하는 풍자가 그것인데, 역시 이 말은 사이비 목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하다. 물론 선물일 리는 만무하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는 3종은 '횡령', '헌금 강요', '성폭행'으로, 이중 '횡령'과 '성폭행은 사회적 범죄로서 처벌받지만 헌금을 강요했다 하여 처벌받지는 않는다. 교계에는 이런 사람들을 '일부 목사'라고 칭하므로 여기서도 그 표현을 빌리자면 횡령, 성폭행과 달리 일부 목사들이 헌금 강요로써 입건되거나 처벌받은 적은 없다. 흡사 향원처럼 세속적인 이익은 다 차지하면서도 그 처신은 교묘하여 그것이 강제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저 당한 사람만 불쌍할 따름이다.

     

    사실 3종 종합선물 세트를 다 펼치자면 3박4일로의 필설로도 모자라다. 그리고 성폭행과 헌금 강요에 대해서는 그 필설이 더러워질까 염려되는 부분도 있다. 나열하자면 정말로 추잡하고 너절할뿐더러 더럽고 냄새나기가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와 같은 성격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이(그 집 고양이가 엄청 귀여움) 교회 헌금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락처를 주시면 "십일조 안 해도 됩니다"(이 제목으로 검색하면 나옴)라는 정식 단행본을 무료로 보내주겠다는(택배비도 무료) 게시물을 보기도 했는데, 책을 보지는 않았지만 오죽하면 그런 책을 다 썼을까 공감 백 배였다. 

     

    알라딘 책소개 <십일조 안 해도 됩니다>는 성경 말씀과 당시의 역사적 사실,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 등 여러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십일조와 안식일에 대한 진실들을 전한다. 다양한 방향에서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성경을 전혀 모르는 이들까지도 십일조와 안식일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진실로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의 폐단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짚어낸다.

     

    요즘 민수기, 신명기에 대해 쓰면서도 거기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비판을 애써 피하는 것도 그 때문인데, 다만 한 가지, 며칠 전 어느 목사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모두 십일조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으므로 교리대로 수입의 30%를 바쳐야 한다"고 설교했다는 글을 읽고 뒤집어졌다. 너무 웃겨서..... 물론 그 글은 웃자고 쓴 글은 아니라 현실을 고발한 글이지만, 어쨌든 뒤집어졌다. 그러면서 문득 백성들에게 맞아 죽은 궁예 생각이 났다. 아래는 <한국경제신문> 오춘호 논설위원이 쓴 칼럼  '십일조'에서 그 일부를 빌려온 것이다.

     

     

    [천자칼럼] 십일조 

     

    맹자는 수익의 10%가 가장 훌륭한 세금제도라 여겼다. 그는 당시 중국 제후들과의 대화에서 수차례 십일조(十一租)를 강조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10% 조세가 선정(善政)의 상징이었으며 문란해진 세제를 바로잡는 하나의 불문율로 내려왔다. 우리 역사에서 가혹한 세금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태봉의 궁예다. 그는 생산량의 30%가 넘는 가혹한 세금을 거뒀다. 자영농 계층이 몰락하고 농민들이 유민으로 떠도는 것을 목격한 왕건은 고려를 세우자마자 십일조 세금을 공식화했다. 이 제도는 이성계에까지 이어진다. 세종은 1444년 농작물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는 연분구등법을 실시하면서 정률세를 일종의 정액세로 바꿨다.

     

    나중에 자세히 다룰런지 어쩔는지 모르겠지만 십일조에 대해서는 몇 마디만 하겠다. 십일조의 목적이 되는 목회자의 생활비에 대해서는 '바울의 금욕철학과 전도여행(II) - 바울이 고린도에 오래 머문 이유'/'목사님이 천국 가는 법' 등의 글에서 띄엄띄엄 설명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들도 바울처럼 직업을 가지고 힘껏 일한 후 주말에 봉사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다시금 말하지만, 주말의 설교 한번으로 교인들이 애써 번 돈의 1/10을 털어가겠다는 것은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다.(사람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피땀을 흘렸나니 때로는 참기 힘든 굴욕과 고통을 견뎌냈음을 아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성들에게 실질적으로 나눠준 것이 있으니 그 수익의 1/10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성직자들이 그들에게 나눠준 것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수익의 1/10을 하나님이 직접 가져갔다.(그도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하지만 요즘은 하나님이 가져가지 않는데도 헌금이 하나님에게 바쳐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거나 천당행이 보증되는 것 같은 언급을 하는데 한마디로 개소리다. 그런데도 그걸 믿는 자가 허다하니, 이래서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는 것이 종교'라는 말이 나온 듯하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 하며,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로버트 퍼시그)

     

    그런데 이쯤되면 종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해로운 존재가 된다.

     

    "종교는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해롭다."(버틀란트 러셀)

     

    헌금이 하나님에게 가는 돈이라고 강변하지 말고 차라리 교회 운영비라고 하면 당위성이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목회가 꼭 번듯한 예배당 건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의 규모와 믿음의 정도가 비례하는 것은 물론 더 더욱 아니다. 예전에 학교 강당이나 관청의 공공장소를 빌려 예배당으로 이용하는 기독교 단체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주말에는 그곳 대부분이 빈 공간이 되므로) 지금도 그 바람직한 운영이 계속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교회 앞에 걸린 반기독교 광고
    "요셉의 가난, 이는 하나님이 따라 해야 할 힘든 행동이다" 라는 문구는 헌금에 눈이 먼 교회를 비꼰 것이다. (요셉 역시 예수의 아버지임을 배경으로 깔아.....)
    교회의 강대상 앞에 놓인 투명 헌금함은 가장 나쁜 경우다. 이러한 설정은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신앙인의 마음을 병들게 하니 결국은 금액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돈 앞에서 기도하는 형국이 된다. 이 같은 교회가 아직도 버젓한 현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물론 헌금함이 뒤에 놓인다고 다르지 않으니 이는 투표함이 투명한 것과도 진배없다. 왜 이렇게 돈이 보여야만 되는가를 묻고 싶다.

     

    횡령에 대해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내가 얘기할 바가 못 된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라 신도들의 것이기에..... 다만 작금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목회자의 성폭행, 상습적 강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엊그제(2020. 8. 14) 아래의 쓰레기 목사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다행스러운 판결이 있었다.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부장판사 김성주)가 강간·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A목사(64)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2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북 익산의 한 교회 목사인 A씨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여신도 2명을 교회와 별장 등에서 7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A목사는 거부하는 신도들에게 "나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이렇게 해야 천국 간다"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A목사는 또다른 여성 신도 7명을 상습적으로 추행한 혐의도 받고 있는데 추행 회수만 12차례에 달한다)

     

    경악스러운 것은 당시 피해자 중 2명은 미성년자였으며, 모녀가 추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한 신도에 대해서는 성폭행 후 지속적인 성추행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상당수 범행은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다) A씨는 다른 목사들의 전례처럼 "사귀는 사이였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면서 혐의를 부인했으나 1심 재판부는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중형이 선고되자 A씨는 사실오인 및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징역 18년을 요구한 검찰도 형량이 낮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A씨에게 1심 형량보다 많은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로는 "피고인의 범행이 자신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여성신도들을 대상으로 계획적, 반복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점, 피해자들의 평생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준 점, 피해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점, 실제로 피고인이 한 범행은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판시했는데,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범행을 부인하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있지 않고 있는 점"도 양형의 중요 요인이었다. 

     

    내가 이번 판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다행스럽다고 하는 것은 성서에는 '일부 목사'의 탈선을 막을 수 있는 방편이나 경고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아니 오히려 권장되는 듯한 분위기이므로) 법으로라도 강제되어야 일부 목사도 살고 이 사회도 건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다음 회에서는 탈선한 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커녕 오히려 흥하는 사무엘기(記)의 아주 유명한 일화를, 앞서 말한 전염병의 문제와 함께 다루려 한다. 아울러 여러 해석이 등장하는 아래 문장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려 한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사무엘하 24:15-16)

     

    후기 :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2010년 11월 26일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청소년강간 등),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위 목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지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9명의 신도를 23회에 걸쳐 강제추행 및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특히 지난 2009년에는 미성년자였던 신도를 성추행했으며, 2017~2018년에도 당시 16세였던 피해자를 여러 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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