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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9. 19. 01:45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삼위일체의 진실 I '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 30년 뒤인 360년, 그곳에 제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웅장한 기독교 교회가 건립됐다. 이름하여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였다. 하지만 이 교회는 황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간의 갈등으로 발화된 화재로 불탔고, 11년 뒤인 41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다시 불탔다. 까닭에 당시 건립된 건물이 어떻게 생겼었는가는 유추할 수 없다.
지금의 것은 532년 2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자신의 권위에 걸맞은 최대, 최고의 교회를 짓기로 결심한 후 5년 10개월 만에 완공한 건물이다. 이때의 이름은 아야 소피아(Αγία Σοφία), 즉 '성스러운 지혜'의 교회였다. 이후 몇 차례의 지진으로 인한 파괴와 중건이 되풀이됐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됐으며, 이후 이슬람 시대에 들어와서도 주변에 4개의 첨탑(미나레트)만이 추가되었을 뿐 돔형의 본당은 개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원으로 쓰였다. 비잔틴 시대의 초기 건축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아야 소피아 사원과 보스포러스 해협
오스만 시대에 세워진 첨탑과 작은 모스크
건립 초기와 거의 변함이 없는 내부
1935년 아야 소피아 사원은 진짜 박물관이 되었다. 터키 공화국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의 정교(政敎)분리 원칙에 따라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아야 소피아는 박물관이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세계인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같은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에 지난 달 큰 변화가 있었다. 7월 10일(현지시각), 터키 최고행정법원이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정한 1934년 내각회의 결정을 취소함으로써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전격 회귀된 것이었다.(의미 없는 일이지만, 이에 대해 EU와 동방정교회 등은 유감과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지난 7월 24일, 모스크로 변한 아야 소피아 사원에서 1934년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 금요 예배가 열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꾸란 낭독으로 시작된 이 예배는 터키 전역에서 몰려든 수천 명의 무슬림들로 인해 또 다른 화제가 되었는데, 외신의 관심은 예배 자체보다도 기존에 있던 기독교 유물, 특히 예수의 벽화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에 모아졌다. 과연 벽화는 어찌 되었을까? 종교적 반달리즘으로 성상과 성화들이 전부 파괴되었을까? 아니면 이성 있는 문화국답게 벽화 등의 성화는 그냥 살려두었을까?
아야 소피아 사원의 기독교 벽화
이와 같은 걱정은 공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드라큘라 백작과 콘스탄티노플 함락')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로 전환되었고, 이때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도배되어 본래의 그림이 사라지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으로 보자면 사실 이것은 파괴는 아니니 이교도의 성화를 그대로 두고 모스크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위에서 말한 케말 파샤의 정교분리 선언 이후 박물관으로 개조된 후 회칠이 벗겨지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 세례자 요한, 알렉산드로스 황제의 모습 등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했다시피 현지 시간으로 7월 24일, 아야 소피아 사원에서의 86년만의 이슬람 예배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렸고,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참석해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사실 아야 소피아의 용도변경 조치는 이슬람 세력 결집을 위한 에르도안의 승부수 같은 것이었기에,(일반적 생각과 달리 터키는 이슬람 국가가 아닌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다) 아울러 에르도안은 이 일을 "(콘스탄티노플) 제 2의 정복" 운운해왔기에 성화의 향배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다.
다행히 성화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쿠란의 내용이 쓰여진 천으로만 덮여졌다. 성모자(聖母子)상의 천장화는 천으로 가리기 힘들었던 까닭인지 그대로 노출된 채 예배가 치러졌다. 나 역시 인류의 보물이 지켜졌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안도했는데, 여기서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 아야 소피아 사원의 그림과 조각품들을 파괴시킨 장본인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도였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것은 훗날의 사건이 아니라 아야 소피아가 세워진 동로마제국 당대의 일로서,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 일은 집권 17년차 에르도안이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예배에 참석한 에르도안 대통령
서방세계는 이번 일에 "문명화된 세계에 대한 공개적 도발"이라고 맹비난했으나 다행히 머리 위의 성모자(聖母子)상은 무고했다.
천으로 가려진 성화
사원 앞의 대통령 지지자들
에르도안은 이날 예배에 35만 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1차 파괴
성화와 성상들에 대한 최초의 파괴는 동로마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0)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는 이슬람의 칼리프 오마르 2세(재위 717-720)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을 격퇴시킨 후 기독교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바, 726년 아야 소피아 교회를 비롯한 동로마 모든 교회의 성화와 성상을 파괴하라는 칙령를 내렸다. 왜? 여호와는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에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 명확히 명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원리주의와 같은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동로마제국의 레오 3세와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는 자국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들을 전부 파괴할 것을 명령했고 그대로 행해졌다.(이에 반대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게르마누스는 폐위당해 유배되었다) 아야 소피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들은 아무리 이른 것이라 해도 또다른 성상파괴주의자 데오필루스 황제(재위 829-842) 이후의 것들이다.
2차 파괴
아야 소피아의 두번 째 대규모 파괴는 말 많았던 4차 십자군에 의해서였다. 1204년 4월, 물욕에 눈이 먼 십자군은 이슬람에 대한 공격 대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택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도시를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며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털어갔다. 물론 소피아 사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아가 그들 십자군은 나라까지 빼앗아 라틴제국(Latin Empire, 1204 ~ 1261년)이라는 국가를 세워 통치했다.(☞ '정교회의 역사'/'세계사의 비극 소년 십자군')
날벼락을 맞은 동로마황제 알렉시우스 4세는 남쪽의 니케아로 피신해 망명 국가를 세우나 곧 죽고, 그 반 세기 후, 후예인 미카엘 8세가 이슬람 용병의 도움을 얻어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한다.(1261년) 그동안 유럽의 모든 국가는 동로마를 유기했고 교황 또한 날강도 십자군을 옹호하였던 바,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유럽 기독교도들에 대해 입을 모아 말했다. "십자가를 든 악마에 비하면 초승달 아래의 이교도는 그래도 사람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초승달 아래에서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예언자가 되어 이슬람교를 창시한다.(이슬람 사서 'Jami'al-tawarikh'의 삽화)
반면 오스만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는 정교회의 본산 아야 소피아 교회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리하여 그는 아야 소피아를 닮되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609년 아야 소피아 교회 맞은 편에 거대한 이슬람 사원을 착공했다. 7년 후인 1616년 그의 이름을 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터키어: Sultan Ahmet Camii)가 완공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사원을 아야 소피아와 견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과연 누가 승자였을까?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의 전경
앞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파르테논'에서 말했듯 '미'란 다분히 주관적(aesthetic consciousness)이어서 두 사원은 난형난제로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하지만 aesthetic consciousness를 전제로 언급하자면 내부 인테리어에 있어서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훨씬 더 뛰어나다. 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블루 모스크'로 불리는 이유와도 연관되니,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은 가히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의 내부
단언하거니와 이것은 단지 내부의 통일적 아름다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 기독교의 성 삼위일체는 삼신론의 도그마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진 필연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처음부터 지금껏 '오직 알라(=하나님)'라는 일신론이 통용되고 있다. 알다시피 기독교와 이슬람은 교리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데, 대표적으로 유일신론과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여기서 이슬람은 분명히 해석에 있어서의 교리적 우위를 점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 삼위일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화와 성상이 개입되었던 바, 우상 숭배와 파괴의 과정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화와 성상이 우상이냐 아니냐의 싸움은 기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슬람은 이런 문제가 미연에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까닭에 기독교와 달리 성소(聖所)를 장식할 인테리어 재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바, 광범위한 실내를 커버할 수 있는 연속된 문양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이른바 아라베스크로 그 아라베스크의 정점이 바로 블루 모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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