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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사태 속 해맞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1. 1. 1. 23:56

     

    2021년 벽두, 이른바 해맞이 명소라는 전국의 유명 일출 관람 장소는 출입이 통제되었다. 방송에서도 TV 등으로 중계되는 일출 광경에 만족하자며 계도했다. 이유는 물론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염려해서이다. 그럼에도 통제선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어수선했다. 그걸 보며 '해가 뜨는 것을 보러 이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천동설이 수 천 년을 지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말이 그럴 뿐, 태고 이래로 해가 움직인 적은 없을 터이다. 저 일출과 일몰은 지구 자전의 결과라는 뜻이다.(그런데 그것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아무튼 2021년 새해가 밝았다. Happy New Year. Everybody)

     

     

    호미곶의 일출 /  포항 호미곶은 독도와 울산 간절곶에 이어 3번째로 이른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2021년의 일출 시간은 오전 7시 32분이었다.(SW융합기술지원센터 제공 사진)

     

    우리는 시각적으로 해의 움직임을 느끼지만 사실은 지구 회전의 결과다. 지구는 자체 축을 중심으로 회전할뿐더러 태양의 주위를 엄청난 속력으로 회전한다. 놀랍게도 그 속도는 107,226 km/h나 되니 대략 400m/sec 정도인 총알의 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 이에 대한 대강을 똑똑한 사람들은 이미 알았으니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코페르니쿠스에 백 년이나 앞서 지동설을 주장했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체의 움직임에 관하여(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라는 책에서 지구의 회전을 설명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퍼뜨렸다. 

     

    그로 인해 갈릴레이는 1633년 6월 22일, 로마 교황청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나님과 성서에 반하는 그릇된 교의를 지지하고 믿은 중대한 이단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것이었다. 현명한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번복했다. 앞서 지동설을 주장하다 처형당한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사람도 있었던 바,(☞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누구인가 I') 괜한 죽음을 당하느니 현실과의 타협을 택한 것이었다. 이에 갈릴레이는 연금(軟禁)형으로 감형되었으나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성서 <시편> 102편을 암송해야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갈릴레오의 재판 / 그는 지동설을 부인하여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새해의 유난스러움은 교계에서도 있었으니 모임을 갖지 말아 달라는 당부에도 불구하고 동네 교회는 복작댔다. 입구의 현수막에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위에 다시 '코로나 극복을 위한 신년 기도회'라고 쓴 현수막이 걸렸다. 일출이야 눈에 보이는 바가 그러하니 지구가 자전하는 것보다 해가 뜬다는 편을 믿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우니 여기에는 어떤 딜레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회에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쉬지 않고 부르짖음에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목회자나 신자들은 그와 같은 딜레마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거리두기'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는 것 같다. 놀랍다. 

     

    지금도 교과서에 있는가 모르겠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명상록>이 실려 있었다. 사실 고등학생에게는 어렵고 고급진 글이었는데 필시 영문학자 이양하 교수의 번역문이라고 짐작되는 그 유려한 글 속에는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에 대한 사색과 성찰의 총아 같은 문장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후 조금 나이가 들어 읽은 12편 전권(全券)의 <명상록>에는 한 철인(哲人)의 사색과 성찰이 자연과 우주, 인간의 본성과 선악, 운명과 죽음, 배움과 도덕 등의 전반에 걸쳐 스토이시즘과 도덕성에 기반해 서술돼 있었던 바, 고등학교 시절의 몰이해가 해소될 수 있었고 <명상록>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황제의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게르마니아 전선(戰線)에서 보냈으며 바바리안과의 전쟁 중에 틈틈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 글들을 남겼다. 이것을 묶은 책이 곧 <명상록>이다. 그 책에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철학자 에픽테토스와 세나카 등,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기초로 한 금욕과 절제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와 같은 명징한 생각과 도덕성을 지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의외의 사실인즉 잘 알려져 있지 않다. 4세기 신학자 에 유세비우스의 언급이 없었더라면 끝내 밝혀지지 않았을 황제의 탄압이었는데, 그는 에우세비우스의 인용한 갈리아 총독의 서간문 속에서 표독한 압제자로 등장한다. "황제께서는 기독교도를 사망할 때까지 고문하라 명하시며, 다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사면하라 하셨다."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의 아우렐리우스 황제
    실제로도 황제는 도나우 강 빈도보나(현재의 빈)  막사에서 지병이 악화돼 병사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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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