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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 선지자에 휘둘리는 진실한 기독교인들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3. 9. 30. 21:15

     
    블로그 <아하스 페르츠의 단상>의 주인장으로서 가장 난감할 때가 Tistory에 의해 로그인 제한 조치를 받을 때이다.  로그인 제한 조치란 주인장이 일정기간 동안 글을 포스팅할 수 없게 제한하는 조치로서 이 조치가 취해지는 경우는 주로 읽는 이의 '신고'에 의해서이다. 나는 지금껏 두 번의 조치를 받았는데 두 번 모두 기독교와 관계된 내용이었다. 한 번은 "프레디 머큐리와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글이 었고, 다른 한 번도 기독교에 관련된 글이었다.
     
    그 글은 Tistory에 의해 삭제되어 제목을 정확히 옮길 수 없으나 내용만큼은 분명히 기억난다.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성폭행 성직자 가운데 개신교회 2곳과 천주교 교단 1곳의 성직자를 실명 거론해 비판했던 것인데, 그중의 한 교회로부터 고발장이 접수되어 조치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Tistory 운영자인 '다음'에서는 나름대로 구제 기회를 주어 한 달 내에 복원 신청을 하라고 했으나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일정기간이 지나자 조치가 풀리며 정상복원되었다. 하지만 그 일정기간 동안은 답답하고 무료했다. 
     
    이후 종교적 범법자(주로 성폭행 목사)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확실히 위축되었다. Tistory에는 재판과 같은 절차도 없기에 운영자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해 글쓰기가 제한돼야 하는데, Tistory의 공간을 빌려 쓰는 나로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기에....  
     
    그래서 지난달 무더웠던 일요일에 광화문에서 목격한 기독교 관련 집회에 대해서도 실명으로써 글을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그들 종교집단의 광적인 모습을 사진에도 담았지만 올리지 못했다. 그 기독교집단은 지도자인 목사가 성폭행으로 10년 형을 받고 출소한 바 있고, 출소 이후에도 또 같은 짓을 벌어 재판을 받고 있는데, 내가 목격한 광화문 집회는 그 처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교회청년들의 시위였다. 물론 여자들도 있었다. 
     
    앞서 말한 '신고'가 두려워 차마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그 종교집단과 목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 관심으로 광화문 길가에 서서 그 집회를 주목했다. 그러면서 호소문을 외치는 청년들의 얼굴을 보니 앳되고 순수해 보여 애처로움과 동정심이 일기까지 했는데, 다만 '저들은 왜 이성을 잃었는가'하는 의문은 지울 길 없었다. 굳이 기독교 연구 조사 기관인 바나 그룹(Barna Group)의 조사 결과를 인용할 것도 없이 세계 각국은 청년들의 교회로부터의 탈(脫) 가속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교회에서 해결해주지 까닭인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청년들은 자신들 교단의 목사가 여론재판이 아닌 공정한 재판을 해달라며, 자신들의 지도자가 얼마나 점잖고 인간적인 사람인가를 증명하려 애썼다. 목사가 벌인 파렴치 행위가 영적인 사랑임을 강변하며 그와 같은 영적 간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사회를 탓하면서 울부짖는 젊은 여성신도도 있었다. 그들은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나는 신이다'가 허구로 가득찬 거짓 조작 방송임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사가 풀려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며,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 갈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광기였다. (그것을 누가 종교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이것을 보며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 하며,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로버트 퍼시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신앙이란 증거가 없어도-심지어는 반대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신앙에 대한 정의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래도 믿는다면 어쩔 수 없다. 믿는 자는 어찌 되어도 믿게끔 되어 있고, 안 믿는 자는 어찌 되어도 안 믿게끔 되어 있는 것이 종교의 속성이기도 하므로.... 다만 차제에 성직자를 맹신하는 신도들에게 "당신은 왜 성서를 읽지 않는가" 묻고 싶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글을 몰랐기에 성직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글을 다 알고,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 성경책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성서의 해석이 어느 특정한 성직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그와 같은 시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 좀 더 몰입하고 싶다면 성서를  좀 더 자세히 읽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 혹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은 성서 안에 있는 것이지 그 밖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혹시 그 밖에도 존재한다고 말하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단이다. 그리고 신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계시를 내린다고 하는 직통 계시는 곧 이단이라는 사실은 이미 교계가 공인한 사실이다. 
     
    교계가 공인한 그대로 어느 성직자건 신에게 직통 계시를 받을 수 없고, 성서의 해석도 어느 특정한 성직자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면 성직자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들은 임무와 역할은 신자들의 기도를 돕는 일에 국한된다. 그들이 도덕적 행동으로 타의 모범이 된다면 더욱 좋다. 다만 그것뿐, 목사나 신부가 평신도에 비해 특별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일반 신도들은 스스로 저들에 굴종할 준비돼 있고 또 때로는 위의 사례처럼 광적으로 따를 뿐, 스스로는 성서에 다가가지 않는다.
     
    그러다 더러는 개 같은 더러운 성직자에게 물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회문제가 되면 언제나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 신부은 안 그래요." 다시금 말하지만 이는 "우리 집 개는 안 물어요"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개는 늘 물지는 않지만 때로는 물기도 한다. 얌전해 보이다가도 기습적으로 무는 개도 있다. 

     
     

    정부의 남편에게 맞아 죽은 교황 요한 12세
    그러한 당신도 평안히 영생하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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