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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암(順庵) 안정복이 본 기독교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3. 7. 18. 21:11


    앞서 성호 이익과 오주 이규경이 본 기독교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들 관점의 요지를 말하자면 이익은 "이러이러한 것이 있으나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입장이고, 이규경은 "비판은 하되 흥미있다"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입장이다. 반면 순암의 경우는 매우 비판적이니, 그가 천주교는 "불가(佛家) 내지는 그 '찌꺼기'에 다름 아닌데, 지금껏 불가를 비난해 온 사람들이 서양 천주학에는 왜 빠져드는지 모르겠다"며 어이없어한다. 

     

    순암이 천주학에 대해 가장 비판적으로 생각한 점은 신자들이 천주를 섬기는 동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을 거론하며,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현세 이후 만세(萬世)' 즉 ‘영혼 불멸’을 노래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오직 제 일신(一身)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태도라고 지적한다. 현세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현세에 사는 동안 부지런히 선(善)을 실천하며 하늘이 내려 준 참된 본성을 지키면 되는 일이지, 내세를 바라고 지옥을 무서워해 천주를 공경하는 것은 천한 종교 인식이라는 것이다. 반면 그가 말한 유학(儒學)은 결과에 연연치 않는'공정한 학문(吾儒公正之學)'이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표준영정 / 실학박물관

     

    방대한 독서가였던 그는 천주학에 대한 책들을 읽고 이에 대한 반박을 실은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의 변증서를 썼다. 그는 그 글에서  서양인들이 말하는 '천주'와 동양사상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공자의 '천명(天命)', 자사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맹자의 ‘존심양성 소이사여천(存心養性 所以事天也)' 등은 다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순암집(順菴集)> 권17 <천학문답>에 나오는 이 말을 풀어쓴 <나무위키>의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근래의 이른바 천학이라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있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내리셨으니, 그 변함없는 본성을 따라서 그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고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문왕(文王)께서는 삼가고 조심하여 상제를 잘 섬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 유업(遺業)을 보전하리라'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한다'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儒者)의 학문 또한 하늘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안정복의 강학처이자 사당인 경기 광주시 '이택재'(麗澤齋)
    권철신(암브로시오)과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고향 경기도 양근에 세워진 양근성지 / 권철신과 권일신은 안정복과 같은 성호학파로 권일신은 안정복의 사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길을 달리하였는데, 안정복과 권철신이 나누었던 천주교 관련 서한이 남아 전한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소통했지만 결론은 불통이었으니, 지금 신자와 비신자의 언쟁과도 비슷한 평행선을 걷고 있다. 권철신은 신해박해 때, 권일신은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에 대해서는 기존에 올라와 있는 잘 정리된 글이 있어, 이를 약간 손 봐 올린다. 

      

    1.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그것은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2. 조상의 제사에 대한 거부도 효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효는 인간과 천지가 소통하는 근본원리이다. 서양 종교는 하늘의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으며, 도덕규범이 타락한 것일 뿐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墨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다.
     
    4. 천국과 지옥과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는 일은 불합리하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후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일상적 관심을 벗어나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5.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본 적도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들며 현세의 선악에 대한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6.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혼합되어 이루어지는 개벽의 세계이므로 인격체로서의 조물주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7.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주장도 틀렸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도덕적, 합리적 원리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8. 사후세계를 강조하므로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현세에서의 선행이다. 신과 영혼의 구원을 주위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의 근본적 중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9.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지 신이 될 수는 없다.
     
    10.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신의 모함일 뿐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잘 가르쳤어야지, 어떻게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 놓고 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그것은 어진 스승의 태도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가난과 질병과 죽음 등을 겪는 것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가소로운 논리적 모순이다.
     
    11.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도리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적 선을 행하는 윤리적 바탕이 사람의 본성에 들어있다. 왜 인간이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한 죽은 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이는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다.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는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12. 세례, 죄의 고백, 공개 기도 등의 행위는 고대 신앙(샤머니즘)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안정복의 <성호사설유선> / 스승 이익의 <성호사설> 30책 중 분야별 중요 부분을 선정하여 10책으로 정리하였다.
    안정복의 <열조통기> / 조선 태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역사를 각 시대별로 편찬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 조선 최초의 통사(通史)라고 불릴 만한 책으로 고조선에서 고려말까지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소략(少略)하고 사실과 다르며, <고려사>나 <동국통감> 등의 문제점도 드러나 이 책을 지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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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