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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의 수수께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2. 16. 09:17
분주했던 남도(南道) 출장길에 짬을 내 하동 쌍계사(雙溪寺)를 찾았다. 평소 가보고 싶은 절집이었기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었고 그만큼 기대감도 컸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막상 가보니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그 아쉬움을 상쇄시킬 무엇을 발견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오늘, 그에 관한 것들을 포스팅하기 앞서 '다음 백과'에서 말하는 쌍계사의 개관을 잠시 빌려 보기로 하겠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3교구의 본사로서 43개의 말사를 관리하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723년(성덕왕 22)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840년(문성왕 2)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차 씨를 절 주위에 심고 중창하면서 대가람이 되었다. 886년(정강왕 1) 쌍계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2년(인조 10) 벽암대사가 중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절은 전형적인 산지가람 배치로서 남북축선상에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 대웅전(보물 500호) 등이 일직선으로 있으며 대웅전의 좌우에 설선당과 요사가 있다.
위 아름다운 길들을 거쳐 드디어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는 이름 그대로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절로서, 그 계곡 위에 놓인 석교를 건너면 승(僧)과 속(俗)을 구별한다는 일주문에 이른다. 일주문 지붕 아래에는 '삼신산 쌍계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앞에는 설명문을 세워놨는데, 그 내용을 축약하면 '튼실하지 못한 부재와 조악한 꾸밈새가 조선시대 건물이 아닌 근대 건축물임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약간 두리뭉실하게 설명하긴 했어도 그 솔직함에 썩 마음이 끌렸으나 그것도 잠시,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면 곧 만나게 되는 석탑을 보고 첫 번째로 실망을 하게 된다. 그 8각 9층의 양식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기 때문이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국보 48호)을 그대로 본떠 만든 1990년대의 미술품이다. 신라 선종의 법통(法統)을 강조하는 절에 고려 전기의 탑을 모방해 세운 것도 우습거니와,(당시는 교종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완전 복제품이라는 것은 더욱 우습다.
현대에 건립한 탑도 그 작품성만 뛰어나면 후세에는 얼마든지 문화재가 될 수 있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더라도 어찌 됐든 세월은 흐르는 것이기에..... 하지만 복제품이나 모사품은 영원히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속세의 것이라 스님들께서 KBS 진품명품' 같은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신 듯.....)
더욱 볼썽사나운 것은 탑의 양쪽에 세워진 두 개의 석등이다. 이 또한 오래 생각할 것 없이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국보 12호)을 모방한 것으로서, 그 모방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렇듯 석등을 탑의 양 옆이나 법당의 양쪽에 배치하는 방식은 전례도 없으며 교리에도 벗어난다.
하지만 어차피 모방품 세트이니 그저 거슬린 채로 넘쳐가려는데, 아이쿠, 그 복제품 쌍 석등을 팔영루 뒤 대웅전 계단 앞에서 또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계단 위 대웅전 양쪽에도 있는 바, 이 거듭된 쌍 석등은 결국 두 번째 실망감을 자아낸다.(그 외에도 석등들이 얼마나 많은지, 대량주문으로 싸게 만들려 했던 것인가, 아니면 혹시 석재공장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불경한 의심까지 들게 할 지경이다)
실망감은 마침내 대웅전 뒤에 위치한 금강계단과 삼존불상에서 폭발한다. 이 금강계단 역시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290호)의 것을 최근에 그대로 모방한 것이고, 삼존불상은 경주 남산 탑골 마애불을 흉내 낸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쌍계사는 각지 유명 유적들을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 셈인데, 까닭에 네 멋도 내 멋도 아닌 이상한 절집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이곳 삼존불상은 흉내를 넘어 표절의 여지까지 있는 바, 보는 이를 더욱 실망케 만든다.
전하는 기록('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방연기' 등)에 따르면 쌍계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나라에서 훔쳐온 육조혜능(六朝慧能) 대사의 정상(頂相: 두개골)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절도품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절인데, 그 도둑질해 온 혜능의 두개골이 이 절의 금당(金堂) 안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미심쩍어 금당으로 가는 108계단을 올랐으나, 금당의 입구인 돈오문(頓悟門은) 붉은 글씨로 '출입금지'라고 쓰인 커다란 팻말과 함께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사실 금당 안으로 들어갔어도 혜능의 두개골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예전 사진을 보니 금당 안에는 혜능의 두개골 대신 석탑이 봉안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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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운 좋게 이상의 실망감과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이름 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절의 자랑인 진감선사탑비(국보 47호) 속에 새겨진 최치원(崔致遠, 857-?)이라는 이름 석 자였다. 이 진감선사의 탑비는 최치원이 왕명(헌강왕)으로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유명한데, 이 사산비명의 건립은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었던 산사 금석문에의 지평을 연 사건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 비명의 내용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앞서는 신라 시대의 1차 사료로서, 신라 불교사뿐만 아니라 당대의 한문학, 나아가 정치 사회 전반을 살필 수 있는(아울러 최치원의 사상까지 곁들여 살필 수 있는) 역사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높다.(이는 역대 고승들이 주해서를 편찬했으며, 정약용, 이덕무와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까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진감선사탑비는 최치원의 문장일 뿐 아니라 그가 직접 쓴 글씨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쓴 또 다른 탑비인 경주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망실되었던 바, 그의 글씨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비석이기 때문이다.(성주사 낭혜화상비는 조카인 최언위가, 봉암사 지증대사비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다)
진감선사와 최치원과는 약 30년의 생몰연대 차가 있으므로 최치원이 선사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사적(事蹟)을 중심으로 하여 만당(晩唐) 변려체의 유려한 문장으로 고승을 기리며 한 시대를 노래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글을 올렸다는 아래의 글씨를 남겼다.
여기서 한 가지 불가사의는 최치원이 이 탑비를 삐딱하게 세웠다는 점이다. 눈썰미 좋은 분들은 이미 발견하셨겠지만, 위 대웅전 계단 앞에 세워진 진감선사탑비는 그 축이 대웅전의 중앙과 일치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보면 방향도 서북쪽을 향해 15도가량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파격임이며, 그 파격은 고의성에서 비롯되었음이다.(그렇지 않고는 좌우 선에서 이렇듯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절집이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로 모든 당우가 일축선상에 놓였고, 나머지 당우들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은 누구보다 최치원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발견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 발견 뒤에는 대부분 고민이 뒤따르는 것이 상례다. 나 역시 그러했던지라 대웅전 앞에서 아래를 내려보며 한참 동안 그 수수께끼의 답을 생각해보았다. 왜 그랬을까? 최치원은 왜 이렇듯 심보 고약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종시 그 답을 찾지 못했는데, 아무튼 그 탓에 보고 싶었던 진감선사 부도 찾기를 포기하고 서둘러 산사를 나와야 했다. 거래처와의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보다시피 한 겨울의 아침 산사는 적막해 진감선사 부도에 대해 달리 붙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정확한 진감선사의 부도도 아니요, 단지 추정되는 것으로서 가람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볼 때 찾아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그 부도를 보고자 했던 것은 앞에서 말한 삐딱한 비석의 의문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로서, 오로지 그 아름다움이 연곡사 부도와 맞먹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는데, 어찌 됐든 보지는 못했으니 그저 아래의 사진으로 만족할 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대신 나오는 길에 요사채 앞에 앉은 사람 따르는 고양이를 보고 한 가지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진감선사비 건립 명령이 내려진 때가 신라 헌강왕 시절이니, 바로 아라비아에서 처용이라는 장사꾼이 왔을 무렵이렸다? 그는 저 고양이처럼 왕에게 착착 감기며 귀한 선물로 알랑방귀를 뀌었을 터, 아름다운 아내도 하사받고 나아가는 관직도 얻었음직해. 반면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황소의 대란까지 겪었던 최치원은 혹시 제 나라도 저리될까, 귀국 후 나라 위한 일편단심으로 바른 소리만을 해대다 결국 한직으로 물러나고 말지. 그래도 헌강왕 때는 제법 행세를 했지만, 진감선사탑비가 세워진 정강왕 시절에는 거의 찬밥 신세였어. 까닭에 탑비의 삐딱함은 그가 나름대로 행한 저항감의 표시거나 소심한 복수의 산물은 아니었을는지....?'
그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최치원은 이미 자신이 쓴 위 탑비에 남겼다.
"비록 달을 얻었다 해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못내 쉽지 않으니, 흡사 바람을 잡아매는 것과 같고 그림자처럼 붙잡기가 힘들도다....."
* 그 정강왕에 이어 진성여왕의 국정 문란 시대가 도래하자 각지에서는 호적과 도적이 창궐한다. 최치원은 이를 바로 잡고자 894년 시무책 10조(당장에 시급한 10가지 조항)를 상소하였고, 이에 개혁을 주도할 아찬(6두품의 최고 관직)의 벼슬이 주어지나 이미 때가 늦은 상태인 데다 진성여왕의 개혁 의지마저 박약했다. 그 이듬해 진성여왕은 결국 국정 문란의 책임을 지고 태자인 김요(효공왕)에게 왕위를 선양하게 되고, 최치원 역시 따라 힘을 잃게 된다.
김요는 헌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에 의해 태자로 책봉됐다. 그러다 얼떨결에 왕이 된 자로서, 폭군은 아니었으되 일신의 안락만큼은 소중한 자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최치원의 시무책은 도덕 책 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김요는 최치원을 멀리 하였고, 더 이상의 의욕을 상실한 최치원 역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바람처럼 물결처럼 떠돌다 언제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날, 해인사에 들렀다 객사한다. 날짜까지는 정확지 않으나 궁예가 신라를 공격해 북쪽의 30여 개 성을 빼앗고, 견훤 역시 동쪽의 10개 성을 공탈하던 시절임은 분명한 바, 이후 신라는 급속한 쇠망의 길을 걷는다.
분황사 원효대사 탑비(신라의 서당화상비, 고려의 화쟁국사비) 등에서 보이듯 고승의 탑비가 경내에 세워지는 경우가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의 조화를 특별히 깨거나 축을 부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쌍계사의 축을 부순 진감선사비의 비밀을 이렇게 풀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일지니 관심 있는 강호제현께서 보다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으면 한다.
아울러 앞서 말한 금당 안에 있다는 육조혜능 두개골의 진위에 대해서도 밝혀져야 할 점이 있다. 왜냐 하면 육조 혜능 스님은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음)한 것으로 유명하고, 그 좌탈입망의 상태 그대로 등신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등신불은 중국 광동성 조계산 남화사(南華寺)에 그대로 모셔져 몰려드는 불자와 관광객들을 맞이 한다. 결국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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