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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가와 예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4. 30. 18:59


    예수가 십가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 십자가 형상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은 눈을 뜨면 보고 싶지 않다도 보아야 되는 형상이 됐다.(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고 대한민국에 그만큼 교회가 많다는 소리다. 지금 당장 창문 커튼을 열어젖혀도 세 개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바, 편의점 수보다도 3배나 많다는 대한민국의 교회가 정말로 실감난다. ☞ '거대한 공동묘지 서울?)


    예전에 읽은 글 중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기 망정이지 형틀에서 맞아 죽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 괴상한 형틀을 목에 걸고 다닐 뻔했다'는 시니컬한 문장이 문득 생각난다. 필시 그 흔한 십자가 목거리를 빗대 한 말일 터인데, 어디서 읽었는지는 종래 기억이 안 나지만 참으로 기발한 문장인 듯하다.(그러고 보니 사실 유대의 전통 사형법은 십자가 형이 아닌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던 바, 만일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가지 않고 산헤드린의 판결에 의해 죽었다면 아뿔싸! 돌덩이를 달고 다닐 뻔했다) 아무튼 십자가는 그만큼 우리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조금 놀라운 반전이 있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다는 뜻은 아님)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그 십자가 처형 방법에 대한 로마의 역사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로마 제국에서의 십자가 형은 가장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고 넓은 로마 제국 영토 전역에서 행해졌다. 물론 십자가 형은 그 후대에도 행해졌으며 그 전대에도 있었지만 로마 제국은 이 처형 방법을 특히 선호했던 바, 아마도 로마 법의 준엄함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은 것이었으리라.(전시효과가 가장 큰 형벌이므로)


    ~ 십자가 형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칼데아(신바빌로니아) 군사 3천 명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역사적 기록으로는 최초일 듯하다.


    ~ 반면 동양에서는 십자가 형이 없었고 대규모 처형은 매장이었다. 기원전 3세기 중국 진나라 장수 백기가 장평(長坪)에서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집단 몰살시킬 때, 진시황이 책을 불 태우고 서생들을 죽일 때 택한 방법은 모두 생매장이었다.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는 근본적으로는 생사관(生死觀)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예수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니니, 그 수를 짐작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기 매달려 죽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과정의 기록이 존재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도 죽음 이후의 것, 말하자면 사후 세계에 대해 무관심했던 로마 사회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렇게 죽은 자들은 대부분 중한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을 터, 죽음에 관한 기록을 따로 남기지 않았을 법도 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황제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으니 그들의 장사(葬事)에 대한 기록 또한 특별히 없다. 아울러 황제들의 무덤이라해도 특별하지 않았으니, 지금 로마에 남아 있는 황제들의 영묘(마우솔레움)들은 당대의 중국 제후 무덤들만도 못할 뿐하다.(그저 들짐승에 의해 시신이 훼손되는 정도만 막은 듯한데, 어찌 보면 현실 세계에만 충실하자는 합리적인 사고로도 여겨지지만, 우리의 동양 정서로서는 가히 놀라울 뿐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마우솔레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는 그나마 모양이라도 갖췄지만.....(사후 세계에의 의미 부여가 달랐으니 중국 진시황의 무덤 등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만서도 웬지 안습이다 --;;)


    압피아 가도에 조형된 다른 황제들의 영묘들은 겨우 이 정도이고,(사후 관리라는 개념도 아예 없었던 듯)


    어떤 관짝은 아예 길거리에 나앉았다.(압피아 가도에는 귀족들의 무덤도 있었으니 황제의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까닭에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십자가 형에 대한 이렇다 할 로마 역사서에의 기록은 크랏수스(☞ '사라진 로마군단 이야기')에 의해 압피아 국도 수십리에 매달려졌다는 6천 명의 반란 노예들과, 티투스(☞ '사라진 성궤의 행방 IV')에 의해 하루 500명 씩 매달려졌다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이야기 정도다. (요세푸스는 기원전 88년 하스몬 왕조의 왕 얀나이우스에 의해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 800명이 십자가 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나 기실 로마 제국과는 무관한 일이다/요세푸스 ☞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예수의 기적에 대한 나의 결론')


    ~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그 유명했던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는 6천 명의 잔당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지지만 정작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그의 장렬한 전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십자가 형을 당한 방법이라든가 유언 따위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아래의 미드 '스파르타쿠스'가 방영되었을 때는 그의 죽음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었다.(그 드라마는 심야에 종편에서 방영되었음에도 지상파를 능가하는 이례적인 시청율을 올렸다. 그 이유를 눈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

     


    미드 '스파르타쿠스'(2011년)는 끝까지 안 봐 결말을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렇게 된 것 같고,



    영화 속 스파르타쿠스 역시 이렇게 됐다.


    미드 '스파르타쿠스'가 인기 많았던 또 다른 이유.(이것 때문에 본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의 리뷰는 곤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스파르타쿠스 상

    검투사 출신의 노예로 BC 73년부터 2년 간 최대 10만의 반란 노예를 이끌며 로마정부와 맞싸웠으나 크랏수스와 폼페이우스에 의해 진압당했다. BC 71년 크랏수스와의 최후 일전에서 전사했다.


    20세기의 스파르타쿠스 '로자 룩셈부르그'

    독일 출생의 사상가로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가 만든 스파르타쿠스 단은 유럽의 사회주의를 이끌었으며 특히 레닌을 도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으나 1919년 베를린에서 독일군에게 사살당했다. 그의 사상과 '프로레탈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유명한 테제는 일제 시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십자가의 형태는 크게 열 십자(十) 형태의 크룩스 이미사(crux immissa)와 T자 형태의 크룩스 코미사(crux commissa)로 나뉘는데, 로마 시대에는 위 영화와 달리 十자 형태의 크룩스 이미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세에 크룩스 이미사가 라틴 크로스(Latin Cross, 로마 시대의 그것이라고 해서)로 불린 점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크룩스 코미사는 그 형태가 그리스어의 '타우'(τ)와 비슷하다고 해서 타우 크로스로 불렸고, 중세에는 X자 형태의 데쿠사타(decussata)도 많이 사용되었다.(영어 '꾸짖다'의 뜻인 ducussate의 어원이다)




    ~ 모르긴 해도 가끔 로마 시대 영화에 등장하는 세딜레(sedile)라 불리는 의자 같은 나무 판(십자가 기둥에 박아 죄인을 앉히는)이나 꼬르누(Cornu)라 불리는 발 받침대도 중세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무엇보다 발음이 그러함)


    ~ 중세의 십자가 형은 로마 시대의 것에 비해 훨씬 잔인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세딜레나 꼬르누가 죄인에게는 조금 편안했을 듯 여겨지지만, 실상인즉 그 반대다. 세딜레와 꼬르누는 죄인을 빨리 죽지 않게 만들어 전시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쓰였던 것이니, 오히려 며칠을 더 괴로워하다 죽어야 했다.



     세딜레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대의 예수는 크로스 형태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짊어지고 올라간 것은 파티불룸(patibulum)이라 불리는 십자가의 횡대(橫帶)이니, 로마 시대의 죄인들이 지고 올라간 횡대는 형장에 상시적으로 비치돼 있는 스티페스(stipes)라는 기둥 나무와 결합되어졌다. 따라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한 모든 거의 모든 기독교 영화에서의 예수 십자가 형은 전부 고증이 틀렸다 할 수 있겠다.(시각적 효과를 위해 알고도 그렇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파티불룸과 스티페스의 결합 도해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형장으로 가는 예수의 모습이나,


    실제로는 이와 가까웠을 것이다.


    아울러 퀴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했다는 내용(누가복음 23:26)에 기인했을 이 같은 장면 또한 부적절하니, 시몬은 필시 파티불룸을 대신 메고 앞에 가는 예수를 힘겹게 따라갔을 것이다.(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스틸컷)



    하지만 항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때나 유대 전쟁 등에서는 이와 같은 절차는 생략됐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때 크랏수스와 티투스는 단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으므로 위와 같이 번거로운 절차를 거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지난 1968년 예수의 십자가 형을 유추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골함이 이스라엘에서 발견됐다. 그 유골함 속에는 산재되긴 했어도 신체의 거의 모든 뼈가 일습으로 들어 있었는데, 그 유골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발뒤꿈치 뼈를 관통한 대못 때문이었다. 분석 결과 유골의 주인은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으로 유골함에 적혀진 이름은 예호아난 벤 하그콜,(Yehohanan ben Hagkol/하그콜의 아들 예호아난) 나이 24~20세, 키 167cm 정도의 유대인 청년이었다.(예호아난은 요한의 히브리식 발음임)


    예호아난이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여겨진 까닭은 당연히 발뒤꿈치 뼈를 뚫은 로마 시대의 대못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못은 휘어져 있었고, 바로 그 까닭에 시신은 못을 빼지 못한 채 수습되어진 것이다. 그 못에 묻은 나무 성분은 올리브 나무로서, 학자들은 못이 올리브 나무의 단단한 옹이에 부딪히며 휘어진 것이라 분석했다. 이로써 예호아난의 뼈는 로마 시대에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의 뼈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십자가 형에 대한 문헌상의 자료가 거의 없는 가운데 발견된 역사상의 유일무이한 고고학적 증거가 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골이었다.



    예호아난의 발뒤꿈치 뼈

    사형수의 뼈가 유골함에서 발견된 것, 즉 장례가 치러진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유력자였던 사형수의 친구가 깊은 우정으로써 수습했다거나 혹은 사형수의 가족이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고 다만 이 유골이 AD 60년 경의 것이라는 분석에 의거, 그 시대에 빈번했던 반란의 주모자거나 혹은 주요 참가자로 보는 의견은 타당할 수 있겠다. 


    예호아난의 유골함



    아니나 다를까, 이 유골은 십자가 형 집행 내역에 목말라 있던 (특히 예수 시대의 형 집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많은 대답을 쏟아내었으니, 우선은 못이 박히는 발의 모양새를 알려주었다. 그간의 성화에서 보면 예수는 두 발이 포개진 채 못이 박혀진 그림이 일반적이었으나, 이 뼈는 그것이 아닌 십자가의 스티페스(기둥)에 양 발의 한쪽 씩이 박혔음을 말해주고 있었던 바, 예수 역시 그렇게 처리됐을 가능성이 컸다.



    분석된 발뒤꿈치 뼈의 분석 결과,


    발이 포개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


    세딜레에 앉아 무릎이 구부려진 채 양 발이 박히는 형태도 아닌,


    이와 같이 양 발이 각각 나무 기둥의 양쪽에 박히는 형식이 유력했다.


    위 주장의 증명 사진



    손의 처리도 그러했으니, 이제껏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는 아래 짤과 같이 손바닥에 대못이 꽝꽝 박히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유골의 분석 결과 손바닥에서는 그와 같은 자국을 발견하기 힘들었고, 다만 팔목의 뼈 사이에서 약간의 긁임이 발견되었던 바, 못이 양 팔목을 관통해 박혔거나 혹은 위의 그림처럼 파티불룸에 얹혀진 채 묶여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GIF



    법의학자가 분석한 도해

    이럴 경우 동맥과 뼈의 손상 없이 팔목의 관통이 가능하다고 하며 오랜 시간 손목의 찢어짐 없이 신체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십자가의 예수 및 나머지 두 사형수의 모습은 아래 사진에 가깝다.




    아울러 법의학자들은 예수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몸의 비틀림에 따른 폐부 압박과, 자중(自重)에 따른 호흡 곤란으로 분석했다. 예수 뿐만 아니라 이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거의 공통된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호흡 곤란을 해소시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위로 끌어올리게 되고 이때 양 팔목과 발목에는 부하에 따른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었을 것이니, 어쩌면 십자가는 그와 같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형구(刑具)로도 여겨진다.  


     




    한마디로 예수의 사망 원인은 질식사로,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진 후 6시간 만에 사망했다. 대사장 안네스와 가야바의 집,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가학이 조기 사망을 불러온 듯하다. 반면 당시 형장의 나머지 두 사형수들은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바, 로마 병정들이 그들의 정강이 뼈를 부러뜨렸다.(요한복음 19:32) 이는 폐가 몸의 하중을 더 많이 받아 일찍 사망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위 예호아난의 정강이 뼈에서도 외부 충격에 의한 골절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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