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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I) - 마지막 어전회의와 통감부 합병 비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30. 00:07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와 회동하여 상의 협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은 짐이 뜻을 세운 바를 체득하여 봉행토록 하라.
순종은 일제를 무서워해 매사에 끽소리 못하고 하자는 대로 따른 위인이었다. 따라서 합병의 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는 소리를 하기가 차마 낯 뜨겁다. 다만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후가 되시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다. 당 16세의 어린 황후께서 어전회의를 엿들고 있다가 위임장에의 날인을 막고자 치마 속에 어보를 감추었던 것이다. 신하들은 어보가 황후의 치마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그 틈에 황후는 대조전 뜰로 냅다 뛰어 달아났다.
좌중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큰아버지 윤덕영(尹德榮)이 유일했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 윤덕영은 왕후의 치마 속에 손을 넣어 강제로 어보를 빼앗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들어 바쳤고, 이완용은 다시 그것을 순종에게 건네 위임장에 도장을 찍게 했다.(윤덕영은 이 일로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1940년 죽을 때까지 내내 요직을 섭렵한다)
~ 이날 어전 회의의 참석자는 총리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황족대표 이재면, 원로대표 김윤식, 시종원경 윤덕영․ 승녕부 총관 조민희, 친위부 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등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당시의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전기인 <원수(元帥) 데라우치 백작전> 등의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황족대표 이재면(고종의 형)과 원로대표 김윤식(중추원 의장)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 반면, 김윤식의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자신과 이재면은 반대했다고 돼 있다.하지만 어느 쪽 기록에서도 각료들은 전원 찬성한 것으로 돼 있으며, 김윤식 또한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자작의 작위와 5만 원(10억)을 받았던 바, '경술 9적'으로 불림에 마땅하다 여겨진다. 이재면이 반대를 했다는 사실 또한 믿기 어려우니 그는 병탄 후 일제로부터 83만 원(166억)이라는 거금을 하사받았다. 저들의 병합조약문 제 5조에는 '일한합병에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에게 영작(榮爵)을 제수하고 은금(恩金)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음을 상기하자. 참고로 이완용은 이때 15만 원(30억)을 받았다.
이완용은 그 위임장을 들고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통감 관저로 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합병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이날의 합병과정이 매우 순조로웠으며 조약체결 후 위임장을 궁내부에 반환했다고 담담히 술회했다. 서로 부딪힐 게 없으니 당연히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그 담담함은 자못 괘씸하다. 반면 데라우치는 합병 축하 만찬에서 당시 희열을 다음과 같이 표출했다."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 가토(加藤淸正) · 고니시(小西行長)가 살아 있다면 오늘 밤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데라우치가 말한 그 세 놈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들로서, 그들의 숙원이 드디어 달성되었다는 감격 어린 일성(一聲)을 뱉었던 것이다. 총 8조로 돼 있는 병합조약문의 제1조와 2조는 다음과 같았던 바, 그로서는 감격스럽지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 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제 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1조에 게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차제에 한국을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
병탄(竝呑)이 체결된 후 참석자들과 관계자들이 정전(正殿)인 인정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이후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 덕수궁은 차례로 훼철되었다. 왕조가 망했으니 궁궐이 온전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창덕궁은 마구잡이 식의 훼철을 면했던 바, 이왕(李王) 전하로 격하된 순종이 계속 이곳에서 기거한 까닭이었다.(이에 순종은 이왕 전하보다 창덕궁 전하로 불려지게 된다) 아무리 잔악한 일제라 해도 차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다만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흥복헌은 궁중 이발소로 꾸며졌으니 황실 격하 작업 내지는 '망신주기' 같은 것이었으리라.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일본은 한일병탄을 위해 민·관·군이 최선을 다했다. 아래 이토 히로부미전(伊藤博文傳)에 실린 당시 외무부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키츠(倉知鐵吉)의 글을 보자면 문자 하나에까지 고심한 노고(?)에 소름마저 돋는다.당시 일본에서는 관청과 민간에서 한국합병의 논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합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분명하지 았았다. 그중에는 일본과 조선이 대등하게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국가를 만드는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표현 또한 '합방'이나 '병합'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여 없어지고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를 명확히 밝히고 동시에 그한 의미를 표현하기에 그리 과격하지 않은 용어를 찾으려 했다.
여러모로 고심했지만 마지막까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아직 일반에게는 사용되지 않았던 문자를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합병'이라는 문자를 각의결정 문서에 사용했다. 이후 공문서에는 언제나 '합병'이라는 문자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슌보공추송회(春畝公追頌會) 이또 히로부미전(傳) 하권>
일본 육군은 이날의 소요를 대비해 미리부터 대규모의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켰고, 그 가운데는 다수의 기병부대도 있었다. 일본군 제2사단 참모 요시다 겐지로(吉田源次郞)는 <한일합병시말(韓日合倂始末)>이란 책에서 기병부대를 소집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기병연대를 소집한 이유는 합병을 위해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미리 예상했기 떄문인데, 기병이야말로 이 목적을 위해 가장 적당했다. 왜냐하면 미개한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지닌 보병보다도 오히려 겉보기에 위엄 있는 기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를 '미개한 백성'으로 보았고, 또 그렇게 대했으니, 합병 당일 일본 헌병들은 서울 거리를 순회하며 조선인 두 사람이 말을 건네도 심문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 나카쓰카 아키라, 2003) 하지만 백성들은 아직은 뭐가 뭔지를 몰라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순종황제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황제의 국새가 찍히지 않은 가짜 칙유조서인 병합조약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칙유(勅諭)
짐이 부덕한데도 간대(艱大)한 왕업을 계승하여 다스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를 유신하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시책을 마련하고 이를 시행하여 일찍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국가는 더욱 쇠미해졌고 도처에서 매우 피폐해져 단시일 안에 만회할 조치도 생각나지 않는도다. 한밤중까지 걱정해 보아도 최선의 방책을 알지 못하겠는데, 이를 마음대로 한다면 더욱 지리쇠잔(支離衰殘)해져 끝내 수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국가를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시킬 방안을 묻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짐은 이에 반성하고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천황폐하께 양여하여 밖으로는 동양의 평화를 굳건히 하고 안으로는 조선 백성을 보호하려 한다. 너희 대소 신료와 백성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성찰하여 소요하지 말고 각자 맡은 바를 안정적으로 하며 일본제국의 문명한 신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모두 누려라. 짐의 오늘의 이 행동은 너희 백성들을 잊어서가 아니라 진실로 너희를 구제하려 하는 정성 가득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유념하라. 융희 4년 8월 29일.
이 칙유를 읽는 한국 사람이면 뭐 이런 넋 빠진 황제가 다 있나 싶어 기분이 몹시 상하겠지만, 다행히도 지난 2010년, 이상의 칙유가 전혀 황제의 뜻이 아님을 증명하는 문서가 발견돼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었다.(다음 회에 설명할 예정임) 하지만 어찌됐든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 조칙을 밀어붙여 공표했고, 이 합병에 대해 한반도를 놓고 싸웠던 러시아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바,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순종실록>을 보면 그 나흘 뒤 순종 황제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등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명으로 훗날 예외 없이 매국노로 불린 자들이다. 그 사흘 뒤인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었다. 그런데 순종이 매국노들에게 훈장을 내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라 팔아먹느라 고생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거 고종이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 및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이하 전(全) 일본 공사관 직원에게 훈장을 수여한 일을 본받은 것일까?
* '대한제국 최후의 날(IV) - 순종황제의 국토순행'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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