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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8. 23:40
이태원 경리단 길이 거짓말처럼 떴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느낌이다. 경리단 길이 유래된 경리단은 육군의 회계, 계약, 급여 등 재정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인데, 지금은 국군재정관리단에 흡수되며 도로명으로서 그 이름만 남게 되었다. 경리(經理)란 말은 회사의 재정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나 직책명으로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나 엄격히 말하자면 게리(けいり)에서 비롯된 왜색 짙은 단어다. 경리단은 상무(尙武)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전, 직업 운동선수들이 군복무를 대신하는 팀의 이름으도 쓰였으며, 까닭에 과거 경리단 야구팀은 언제나 실업리그를 휩쓸었다. 선수층이 두꺼우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리단이 있던 그 길은 언제부턴가 맛집과 멋집이 어우러진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미군부대와 외국 대사관의 영향으로 이태원은 다양한 문화와 먹거리를 갖춘 장소가 되었고, 이에 저변이 넓혀지며 의욕 있는 소상공인들이 이태원의 외각 경리단 길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태원 중앙상권으로 가기에는 자금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공을 들인 이색적 분위기의 가게로써 이태원의 분위기를 살렸고, 마침내 중구난방의 이태원보다 훨씬 개성 있는 거리를 만들어냈다.(입지와 교통도 썩 좋지 못했음에도)
에조틱한 경리단 길이 만들어지며 입소문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거리는 어느덧 명품거리로 재탄생되었다. 아울러 그 길을 모방한 망리단길을 비롯해 ○○단길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지방에도 생겨나며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표방됐던 창조경제의 유일한 성공사례요, 가히 소공상인들의 성공신화라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예쁜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언뜻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 것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혹시 가게가 팔리지 않을까 쉬쉬하던 상인들의 속내가 밝혀진 것은 그 길에 폐업한, 혹은 '임대 문의'의 점포가 확연히 늘어가면서부터였다.
이유는 명료했다. 활성화된 거리가 임대료의 상승을 불렀고 이를 이기지 못한 점주들이 결국 가게를 내놓게 된 것이었다. 임대료의 상승이 상권 자체를 구축시키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은 어느 곳에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경리단 길은 그와 같은 현상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경리단 길이 유명해 찾아가 봤더니 의외로 썰렁하더라는 말은 그 생명이 얼마나 짧았는지에 대한 방증이 될 것이었다. 자신의 열정을 고스란히 놔두고 놓고 떠나야 하는 임차인 신세도 안쓰럽기 그지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른 임대인의 처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황금알을 영원히 만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에....
상생(相生)을 마다하면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한말 이미 이 길이 증명했다.
1882년 임오년에 조선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한 해 전인 1881년 고종은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겠다며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 부대를 창설했다. 그러자 훈련도감을 비롯한 과거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 군인들은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던 바, 이에 반발하여 군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쿠데타는 성공하여 정권은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고, 이에 근왕파였던 어윤중은 천진(天津)에 있는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조선 국왕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여창은 이를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에게 보고했고 장수성은 사태를 진압하라는 명령과 함께 오장경을 사령으로 하는 등주(登州) 병력 2,460명을 파견시켰다.
7월 7일 경기도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한 오장경은 한양으로 올라와 7월 13일 고종을 알현하고 이어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 답례를 하러 온 흥선대원군을 불문곡직 붙잡아 가둬버렸다.(체포는 마건충이 주도했으며,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대원군은 천진 보정부에 무려 4년간이나 유폐된다)
이로써 정권은 고종에게 되돌아오게 되었지만 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들을 그대로 놔둘 리 없었을 터, 오장경에게 왕십리와 이태원에 살고 있는 구식 군사들에 대한 토벌을 요청했다.
7월 16일 밤,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살고 있는 조선 군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왕십리에 사는 군인들은 주로 5군영 군사훈련장인 훈련원(구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근무하던 인원이었고 이태원에 사는 군인들은 훈련도감의 남영(南營, 현 남영동)에서 근무하는 인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주로 하급 군인이 많이 모여 살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만큼 많은 불이익을 당했을 터, 반란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황현은 <매천야록>에 그들이 난리를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갑술년(1874) 이래 대궐에서 쓰는 비용이 끝이 없다 보니 호조나 선혜청 창고가 고갈돼 서울에서 근무하는 관리들도 급료가 지급되지 못했고 5군영 군사들은 자주 끼니를 걸러야 했다. 게다가 5영을 없애고 2영(營)을 두어 노약자를 내쫓자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청군은, 왕십리 쪽으로는 마건충이 원세개, 오주유, 장간정, 하승오 등을 데리고 움직였고, 이태원으로는 오장경이 직접 출동했다. 오장경은 약수동 고개를 넘어 경리단 길로 진입한 후, 길 안내인 조선인이 마구잡이로 지목하는 민가에 마구잡이로 쳐들어가 잠든 장정과 그 가족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했다. 그들은 피차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바, 저항하는 자는 신문도 없이 참수되었는데, 참수된 자 중에서 훈련도감의 군인이 11명이었다.붙잡힌 자 중에서 군인의 요패(腰牌)를 지닌 자는 이튿날 새벽에 동묘로 압송됐다. 왕십리에서 학살된 자는 수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끌려온 자는 150여 명, 이태원에서 붙잡혀 온 자는 20여 명이었다. 이후 조병창, 이회정, 조위희, 임은준, 이재만 등, 군란을 주도했거나 군란 후 감투를 쓴 자에 대한 처벌이 뒤를 이었으니 붙잡혀온 170여 가운데 20명이 처형당했다.이로써 구식 군인들의 쿠데타는 3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고종은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일에, 그것도 국가 간의 일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신이 동급으로 취급됐고,(500년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이 주어졌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서였다.외교권도 제한돼, 조선 관리들은 조선 주재 외교관들과의 면담 때 청국 공사의 허락을 맡도록 돼 있었으며, 청국 외교관의 입회 하에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아울러 회의장에서나 연회석상, 기타 어떤 좌석에서도 조선의 관리는 청국 외교관의 윗자리, 혹은 동등한 자리에 서거나 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믿어지지 않는 일이나 상황은 2020년 지금도 비슷하니, 중국에서 한국의 관리는 중국 관리보다 낮은 곳에 자리해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은, 그래도 사대가 낫지 않겠냐는 듯 싸워 이길 생각은 도무지 않는다. 이것을 약소국의 숙명이라 여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루저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굴종할 자세가 돼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폭군이 군림한다. 나는 이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을 옮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누군가는 일을 해야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외교관이라 부른다. 비겁하게 중국의 핵우산 밑에 안주하려는 자, 차라리 중국에 가 살아라. 그러면 훨씬 안전하리니.'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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