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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와 홍영식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3. 23:57
앞에서 김옥균의 화려한 스팩을 말했지만 부마도위(駙馬都尉) 박영효(1861-1939)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우선 부마도위라는 위호(位號)를 주목해볼 만한데 이는 임금이 사위에게 내리는 호칭을 말한다. 즉 그는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가 되며 이로 인해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를 받아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는데, 그가 철종의 딸과 결혼하게 된 데는 그 할아버지 우의정 박규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아울러 내각 총리대신과 주미전권공사를 지낸 박정양 역시 그의 집안이니 한마디로 금수저 출신이다. 과거는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워낙에 집안이 빵빵하다 보니 굳이 볼 필요도 없었을 터, 1878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시작으로 판의금부사까지 한 걸음에 내닫는다.
이미 설명한 김옥균과 서광범, 그리고 오늘 말하려는 박영효와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4인방이다. 언급한대로 박영효의 할아버지가 대표적 개국론자 환재 박규수였으니 그와 그의 형 박영교는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체득했을 것인데, 박규수를 매개로 김옥균, 홍영식 등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소시적부터 끈끈한 동지애가 형성되었을 터, 훗날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큰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에 모이곤 했소."('박영효씨를 만나다' 이광수 1931년 『동광』19호)~ 홍영식(1855-1884)의 집은 박규수의 집과 지호지간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에 물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식은 박영교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혁명 발발 이틀 후 북묘(北廟)에서 고종을 호위하다 청나라 군사에 의해 한날 한시에 죽는다.박영효는 구식 군대 훈련도감의 반란인 임오군란의 처리를 위해 1882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건너가는데(이때 김옥균과 서광범도 동행한다) 이후 그들은 고베 산업단지의 근대화된 대규모 산업 시설을 보고 맨붕에 빠지게 된다.(일본 정부의 의도에 제대로 당했다) 그외 교토와 도쿄를 거쳐 돌아온 박영효는 개화의 의지를 굳히고, 돌아오자마자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써 치도·경순·박문의 3국을 설치한다.
즉 도로정비와 민생치안 확립, 교육을 위한 인쇄 출판 장려 정책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영효로서는 최소한의 개혁에 발을 디딘 것이지만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는 그나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그는 수구 대신들의 항거로 오히려 광주유수(성남시장)로 좌천되고 만다.(박영효가 혁명을 생각한 것은 필시 이 무렵이리라)
박영효는 자신의 좌천을 오히려 기화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휘하의 남한산성 수어청 병사들을 쿠데타에 동원하려 했던 바, 김옥균을 일본에 보내 이들을 양성할 차관을 얻어오게 한다. 박영효는 이를 국책사업에 일부 사용하고 나머지는 횡령한 후 사병(私兵)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는데, 김옥균이 빈손 귀국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게 된다. 이렇듯 박영효는 모든 일에 치밀했으니, 거사 한 달 전인 1884년 11월 4일 혁명의 주역들이 모인 박영효의 사랑채에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가 나타나 쿠데타의 지원을 약속했을 때, 김옥균은 마치 일이 다 성사된 것처럼 기뻐했지만 박영효는 실패 후의 일까지 논의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달아났던 박영효는 암살 위험에 처하자 다시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항구 등에서 막노동을 전전하던 그는 귀족인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일본으로 돌아가 야마자키(山崎永春)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그즈음 일어난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그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친일 관료 박제순의 주선에 의해서)일본이 득세하자 고종도 사면령을 내려 그를 받아주게 되었고 이에 박영효는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과 총리대신 서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갑신정변 이후 꼭 10년 만이었다. 이후 그는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의 세력이 후퇴하고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는 명성황후 암살의 누명을 쓰고 1885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막강 발틱함대가 부서지고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물러나자 박영효는 다시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주선에 의해서) 그리하여 이번에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조선을 위한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고종의 퇴위를 막기 위해 분투하였고, 그러다 결국 친일파 관료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써 제주도에 유배가게 된다.(참 파란만장하다) 그의 유배 기간 동안 결국 한일병탄은 이루어지고 조선왕조 500년과 대한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는 지킬 나라조차 없어졌기 때문일까, 이후 그는 본격적인 친일행각에 나서니 1910년 일본 후작 작위를 받아 정계에 복귀했고,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 1926년에는 중추원 의장에 올랐으며 1932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피선되기까지 했다. 그의 말년은 죽을 때까지 화려했으니 1936년 9월 21일, 사망할 때의 직위는 중추원 부의장이었다. 그는 생전에 점지해두었던 부산 다대동 묘지에 묻혔는데, 장례를 일본인 경남 도지사가 집전할 만큼 죽어서도 위세를 부렸다. 일본 왕실에서 내린 후작이라는 직위와 중추원 부의장 직함의 위력이었다.
부산 다대동 묘소는 박영효가 생전에 지관을 고용해 전국 최고 명당을 찾아낸 곳으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누가 봐도 길지(吉地)라 할 만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죽은 그가 이곳에 운구되어 묻힐 때까지의 장례 또한 뻑적지근했으니,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 또한 인산인해였다. 부산시 사하구 다대 본동, 그의 무덤 자리는 태백산맥의 혈맥이 마지막 용트림을 한다는 소문난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명당이 그러하듯 이 또한 헛소리였던 듯하니 광복 후 그는 친일 부역자로 지탄받아 묘소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던 바, 이후 그의 손자 박찬범이 그 유해를 화장해 아내 영혜옹주의 유골과 함께 경기도 화도군 모란공원에 안장했다. 그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는 송도 유명 요리점의 사장이 묻혔는데, 그 아들은 사업이 망해 송도 요리점 건물도 팔렸다 하며, 무덤 일대는 지금 라파 요양 병원이 들어서 있다. 부산 지하철 다대포항 3번 출구로 나와 돌아가면 만난 수 있는 라파 요양병원 자리가 박영효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 여담: 라파 요양병원 건물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ATM기를 이용한 적이 있다. 일대는 지금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심이 됐다)
홍영식(1855-1884)은 혁명의 주역 중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 갑신정변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있어 스팩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만은 굳이 따지자면 혁명의 주역 중 가장 화려할 지도 모르겠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당대에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이요, 자신은 18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던 바, 배경과 실력이 겸비된 인재 중의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온후한 인격이었으니 갑신 개혁파는 물론이요, 수구파 인사들까지도 그를 존경해 친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 특히 수구파 거두 민영익과의 친교가 깊었으니, 갑신정변 당일 칼날 세례를 당한 민영익을 홍영식이 부축해 알렌의 치료를 받게 한 일은 그의 인격을 증명해준 사례라고 할까.....)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최초로 일본에 다녀왔고 보빙사로서 미국에 다녀오며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는데, 특히 유럽의 신흥강국 프로이센을 흉내 내 군대를 개혁한 일본의 신식군사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귀국 후 '일본육군총제'와 '일본육군조전'을 작성해 보고하고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 부경리사(軍務司 副經理使)가 되어 군비 개혁에 착수한다.
미국에 다녀와서는 신품종 농작물과 농기계 수입에 진력하는데, 그는 국방과 농업이라는 국가의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그런데 이것이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때까지 수구파와 개혁파의 사이에 섰던 홍영식은 이후 급진 개혁파로 급격히 기운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여긴 것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의 실세 민영익은 그를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로 임명해 멀리 내쫓지만 개화파들은 곧 그를 다시 협판군 군사무로서 불러들이고 병조참판에 올린다.
그와는 번외로 그는 1884년 4월 일본과 미국의 우정 시스템을 벤치마킹한 우정총국을 만들어 그곳 우정국총판을 겸임하며 우정사업의 문을 열었던 바, 근자에 중앙우체국 앞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우정총국 건물 내에 흉상을 만든 것은 우정사업 총판으로서의 공로를 기린 것이라 하겠다. 그는 이렇듯 묵묵히 제 소임에 매진하면서도 혁명 과업에도 충실하였으니, 훗날 박영효가 일본에서 취생몽사의 김옥균을 만난 후 뱉었다는 다음 말은 홍영식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었는가를 설명해준다.
"김옥균은 덕이 없고 지략이 모자란 자인데, 매일 저렇듯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찌 내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갑신년의 정변도 다 홍영식과 내가 준비해 일으킨 것이지 고균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갑신정변' 박영효 1926년 『신민』)
홍영식은 정변을 일으킨 후 좌우영사 겸 우포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좌의정에 올라 혁명정부를 대표하게 된다. 정변 발발 전 그는 병조참판으로 개혁당 인사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있었으니 좌의정으로서 혁명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불행히도 좌의정으로서의 영화는 단 하루, 곧 민비가 불러들인 청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치자 그는 박영효의 형 박영교, 그리고 7명의 사관생도와 함께 고종이 피신한 북묘(北廟)로 달려간다. 그리고 청군이 들고가려는 고종의 사인교(四人轎)를 막아서며 어의(御衣)를 붙들고 매달리다 박영교와 함께 처참히 죽는다. 1
* 북묘는 민비가 총애하던 무당 진령군의 거처 겸 관우 사당이 있던 곳으로, 고종은 청군을 청병한 후 창덕궁을 빠져 나와 북묘에 머물렀다가 선인문 밖 청나라 장수 오조유의 진영으로 옮긴다. 이후 고종은 다시 북묘로 갔다가 홍영식과 박영교를 만나게 된다.
청군이 몰려왔을 때 그가 다른 4명(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의 향방과 달리 북묘에 이르렀던 것은 임금을 붙잡고 있으면 혁명과업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즉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인천으로 도망가 일본행 배를 탄 다른 4명과 달리 어떡해든 혁명을 완수해보려 노력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비협조적이었고 청군을 막아내기에도 역부족이었던 바, 북묘에서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시신은 육시를 당해 전국에 조리돌려졌고 동대문 밖에 버려졌던 몸뚱이는 이복형 홍만식에 의해 경기도 초월면 쌍룡리 야산에 묻혔으나 김옥균이 육시를 당할 때 다시 꺼내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이후 그의 양자 홍성겸에 의해 경기도 여주군 문장리로 이장돼 묻혔다.
여주 문장리 홍영식의 무덤은 돌보는 이가 없어 1970년대 초까지 주변이 물이 고인 흉물스러운 형태로 방치되었으나,(<한국일보> 1971년 12월 4일자) 지금은 여주군 향토유적 제 7호 '홍영식 선생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공식 지번은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문장리 산 8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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