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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서광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8. 23:09
전라도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공주 우금치에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날렸다.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농민군의 희망은 거기서 끝났고 그들 농민군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꿈도 거기서 날아갔다. 수적으로는 4만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으나 대부분이 구식 화포에 죽창을 들었던지라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개틀링 기관총과 무라타 소총을 갈겨대는 일본군의 속사(速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
1894년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약 20일간의 공주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0월 25일 1차 전투가 끝났을 때 4만이던 병력은 1만으로 줄어 있었고, 2차 전투(우금치 전투/11월 9일~12일)가 끝났을 때는 겨우 500명만 남아 있었다. 이로써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던 바, 결국 전봉준은 그들 패잔병을 이끌고 다시 전주성으로 회군을 해야 했다.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세 좋게 북상한 그였으나 돌아가는 그는 제 한 몸 가누기도 힘겨운 몰골이었다.(상대의 우세한 화기 앞에 부적대기를 붙이고 '무조건 공격'을 외친 전봉준의 지휘법은 사실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동학군의 상대는 관군이 1,500여 명, 일본군이 200명으로 아무리 많이 잡아도 2천 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화기(火器)가 전투의 향배를 결정지었다. 관군과의 전투에서는 백중지세를 보이던 농민군이었지만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공주에 도착하고부터는 급격히 기울어졌던 바, 4만 명이던 병력이 500명만 남는 처참한 신세가 됐던 것이었다.(그렇다고 39,500명이 다 죽은 것은 아니고, 아마도 도망간 숫자가 반쯤은 됐으리라 본다. 화력에 겁은 먹은 것도 있지만 우선은 추위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이상 숫자는 모두 음력이다)
동학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고부군수(정읍군 고부현) 조병갑의 학정(虐政)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갖은 명목으로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던 전형적인 탐관오리였음에도 1894년 고종이 그를 포잉(褒仍, 치적을 쌓은 지방관을 포상해 연임시킴)함으로써 결국 고부 주민들을 폭발하게 만든 것이었다.(조병갑은 잽싸게 전주감영으로 달아남) 그런데 이를 바로잡으러 온 안핵사 이영태는 오히려 고부 주민들에게 죄를 물었던 바, 그 억울함에 드디어 주변의 온 동네가 모두 들고일어나게 된 것인데, 때마침 동학(東學)이라는 민중종교가 구심점이 되었다. 이에 그들 농민 반란을 동학혁명, 혹은 동학농민운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의 말대로 '동학과 난민이 한데 합쳐져' 일어난 민중봉기라 하겠다.
~ 어처구니없는 일은 동학난을 촉발시킨 탐관오리 조병갑의 출세가도였다. 이후 그는 1898년 집안 배경으로 정4품 평리원(平理院, 갑오개혁 때 생긴 고등재판소) 민사국장에 임명되고,(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서조카) 몇 달 뒤 평리원 판사를 맡아 1898년 5월 30일,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갑오개혁은 갑오농민항쟁의 영향으로 생겨 난 시대적 산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시류(時流)에 힘입어 역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고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리게 되는 바, 역사의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안핵사 이용태 역시 1897년 중추원 2등 의관을 시작으로 중추원 찬의까지 친일 요직을 섭렵하다 1910년 한일병탄에 기여한 공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고 만수무강한다)
조병갑이 처음부터 잘 풀린 건 아니었다. 그는 고종 31년(1894년 4월 24일) 의금부에서 고부 사건을 신문을 받을 때 한사코 모르쇠로 일관하다 결국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를 갔다. 하지만 그 이듬해(1895년 3월 12일)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온다. 사면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실권자였던 총리대신 박영효와 법무대신 서광범이 그의 죄가 가볍게 처리되었다 하여 재심문하겠다고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갑신정변 주역들의 의기(義氣)가 드러나 보이는데,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조병갑에게 날개를 붙여주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그 전후 사정을 '월간 참여연대'의 글을 빌려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다시 대한제국의 판사가 되어 동학의 2세 교조인 최시형 선생에게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 해답은 황현 선생이 지은 『매천야록』에 나와 있다. 조병갑이 체포되어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박영효가 도주하고 조정에서 다시 변란이 발생하여 그 죄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황현 선생은 “7월에 대사면령을 내려 조병갑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고 기록하며, 이때 지식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을 탄식하고 있다. 월간조선과 조기숙 전 수석은 황현 선생의 이러한 탄식에 귀 기울이길 부탁한다. 자신과 그 조상의 범죄행위와 죄상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박상표 참여연대 회원)
전봉준은 전주성으로 후퇴한 후 세력을 규합해 음력 11월 25일, 원평 벌판(김제시 금산군 원평리)에서 뒤쫓아온 관군 및 일본군과 한판을 벌였지만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틀 후 전봉준은 태인에서 재차 전투를 벌였지만 결과가 뒤바뀌지는 않았다. 그 최후 전투에서도 패한 전봉준은 열댓 명의 수하들과 함께 장성 입암산성 → 백양사 암자 → 순창 피노리 방면으로 도피하며 추격군들을 따돌렸다. 그는 공주 돌격전에 반대하고 전라도에 남았던 또 다른 동학지도자 김개남과 합세해 권토중래를 도모할 요량이었으나 김개남은 그때 이미 피체된 상태였던 바,(김개남은 친구 임병찬의 집에 숨어 있다 그자의 고발로 붙잡혔다) 옛 부하였던 피노리 김경천의 집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이 고부 접주였을 때 그 밑에서 접사 일을 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전봉준을 보자 매우 반가워 하며 주막으로 안내해 술과 밥을 대접했다. 그리고는 유회군(儒會軍, 유생들 부대)을 조직해 잔당 소탕에 앞장서던 동네 선비 한신현에게 몰래 알렸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한신현은 무리들과 함께 주막을 덮쳤는데, 모처럼 휴식에 들었던 전봉준은 낯선 인기척에 총 한 자루와 함께 뒷 담을 뛰어넘다 몽둥이 세례를 당하고 떨어졌다. 무리들을 그 자리에서 전봉준을 죽지 않을 만큼 팼다. 일본 기자의 표현대로 '불세출의 영웅 전봉준'은 하찮은 부하의 밀고와 장정들의 손에 잡힌 것이었다. 음력 12월 2일 밤이었다.(이이화 저 '전봉준 혁명의 기록'에서)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황현은, 전봉준이 순창까지 온 사실은 같으나 그는 그곳에서 김경천의 집에 가지 않고 부하들과 주막에 들렀다 마을사람들의 연락을 받은 전주 군교(軍校) 김아무개에게 잡혔다고 했다. 어찌 됐든 그는 허무하게 붙잡혔고, 가장 먼저 일본군 제19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담양으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1월 11일, 나주 '대일본제국 동학정토군' 사령부 재판소 감옥으로 송치됐다. 그 사령부와 재판소는 일본이 조선 국왕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세운 기관이었으나 조정이 일본군을 불러들인 마당이었으니 제멋대로여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망국의 기운이 깃든 조선 땅이었던 것이었다.
전봉준은 1895년 1월 24일, 손화중 등 나주 사령부에 구금돼 있던 다른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돼 진고개에 있는 일본영사관 순사청에 인도되었다.(김개남은 전주 감영에서 즉결처분되어 시신이 저자거리에 조리돌려졌다) 일본에서는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밀약 같은 것을 캐내기 위해 이리저리 회유했으나 그에게서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봉준은 일본인 변호사의 조력도 거부했다. "일본은 나의 적국인데, 구차한 생명을 위해 적국으로부터 살 길을 찾음은 도리가 아니다." 이것이 이유였다. 그는 일본으로의 도피 권유 또한 거부했다. 여러 가지로 전봉준에게 감명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는 전봉준을 조선 정부에 넘기면서 '사형시키지 말아 달라'는 특별 조건을 붙여 인도했다.
전봉준이 인도돼 갇힌 곳은 서린방(지금의 종로 영풍문고 일대) 전옥서(典獄署)였고, 신문과 재판을 받은 곳은 길 건너 의금부 자리에 새로운 법으로 신설된 법무아문(法務衙門) 산하의 권설(임시)재판소였다. 쉽게 얘기해 신식 재판소에서 신문도 받고 재판도 받은 것인데, 그러면서도 서린방 전옥서 옛날 감옥에 수감되었다. 의금부가 바뀐 곳이 법무아문이니 그곳에도 감옥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는 역대로 양반가문의 범죄자가 투옥되는 곳이었으므로 전봉준 및 같이 잡혀온 상것들에게는 감옥마저 내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새 옷을 입었으나 옷 속의 때는 그대로인 조선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서린방 전옥서에 갇혀 있다 신문을 받을 때면 아래와 같은 가마를 타고 길 건너 권설재판소까지 갔는데, 귀하신 몸이라서가 아니라 체포 당시 부상을 크게 입은 까닭이었다.(그는 나주에서 서울까지 내내 이 같은 가마를 타고 주위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며 왔다) 그는 한 달 동안 권설재판소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았고 일본 영사관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았는데, 아래 사진은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 일본영사의 허락을 받아 촬영한 귀한 사진이다. 그는 이와 같은 몸으로 법무아문 참의인 장박(張博)에게 여섯 차례의 호된 신문을 받았지만 내내 의연한 모습으로 임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한다.
전봉준의 재판을 맡은 사람은 법무대신 서광범(1859-1897)이었다. 그는 1884년 일어난 저 유명한 갑신정변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쿠데타 실패 후 일본으로 도망갔다 조선 정부의 송환 독촉에 그 이듬해 아예 미국으로 달아나 망명을 해버렸는데, 그 후 10년이 지난 1894년 12월 일본 외무성의 주선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정부가 특사령을 내려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시대적 요구인 개혁에 있어 일찌부터 선진문물을 익힌 그들 만큼 적당한 인물을 찾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이에 박영효는 개혁정부의 내무대신에 올랐고, 서광범은 스스로 법무대신에 올라 사법제도를 개혁시켰으니 의금부를 법무아문에 속한 권설재판소로 변모시킨 것도 바로 그였다.
서광범은 전봉준의 판결을 놓고 박영효와 함께 고심했다. 되도록 살려주기를 희망하는 일본의 압력과 극력으로 사형을 바라는 조선 대신들 사이에서의 눈치보기였다. 서광범은 결국 전봉준을 사형시키기로 마음 먹었으니, 그와 같은 거물을 살려둔다는 건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은 과거 자신들 개화파들의 지향점과 분명 거리가 있는 것이었으니 그 당시 그들은 신분의 차별없는 사회를 꿈꿨고, 국가에 심한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에의 처벌은 자신들의 혁명공약에도 들어 있던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을 택했다. 1
1895년 4월 23일 전봉준의 공판이 있던 날, 재판장 석에 오른 법무아문 참의 장박은 판결에 앞서 긴 주문을 읽었다. 그리고 사형을 언도했는데, 판결 사유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명시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이었다. '군복을 입거나 말을 타고 관(官)에 대항해 변란을 일으킨 자는 기다리지 않고 즉시 참한다'는 분명한 법조항을 적용한 것이었다. 동학교도로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그외에도 손화중, 성두한 등의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신법(新法)이 적용된 때문이었다.(이 신법도 서광범이 만들었다) 2
참형을 금한 신법은 사형수의 시신이라도 훼손할 수 없다는 근대인권법 사상이 반영된 합리적 법조항이었지만 전봉준은 오히려 이것이 불만이었던 듯, "죽이라면 마땅히 종로 네 거리에서 내 목을 베어 다른 사람에게 그 피를 뿌려줘야 옳겠거늘 어찌 어두컴컴한 도둑굴 속에서 남몰래 죽이려 하느냐"고 외쳤다. 그는 죽음에 임해서도 영웅다운 최후를 원했던 것이었다. 서광범은 전봉준에게 사형을 내린 그날 고종에게 서둘러 보고해 사형을 윤지(재가)받고 다음날(24일) 새벽 2시 사형을 집행했다. 장소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필시 전옥서에서였을 것이며 교수형 대신 단단한 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41살되는 해였다.
서광범은 전봉준의 사형을 초고속으로 집행했다. 그를 빨리 죽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라 다시는 전봉준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봉준의 신문은 참의인 정박이 담당하였고(공초 기록으로는 서광범은 단 1차례만 직접 신문을 했다) 재판정에도 정박을 세웠지만 다음 공판에서는 꼼짝없이 법무아문의 최고 우두머리인 자신이 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들어 고종의 윤지를 받은 새로운 사법제도에는 복심제(覆審制)를 두었던 바, 민·형사상의 모든 사건은 2심 재판을 거치도록 했는데, 그 시행일이 바로 다음날인 25일이었던 것이다.(재판소구성과 재판소처무규정통칙)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새 법의 효력이 발휘되므로 서두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 복심제의 취지는, 항소 법원이 원심의 심리와 무관하게 새로 심리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전봉준 사건은 다시 심리해도 결과가 뒤바뀌기는 힘들 터, 여기서 재판을 종결시키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 서광범의 판단이었던 듯싶다.
서광범은 그해(1895년) 7월 을미사변 이후 결성된 4차 김홍집 내각에서 학부대신(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주미특명전권대사를 자원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주미대사 생활은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며 7개월만에 해임통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조국에 돌아오지 않았고, 같은 해 중추원 일등의관(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 정도)으로 위촉되었지만 역시 귀국을 거부했다.(총리대신 김홍집이 거리에서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상황, 아관파천 후 더욱 혼미해진 정국이 그를 조국으로부터 내몰았을 터였다)
이후 그가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지병인 폐병으로 고생하다 1897년 필라델피아에서 죽은 것은 확실하니 그의 나이 38살에 불과했다. 그의 후사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굶어 죽었고 아내와 가족들도 모두 감옥에서 죽거나 처형됐는데, 미국에서는 아마도 미혼으로 지낸 듯하다.
이듬해 그의 유골은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현재 강남구 논현동)에 매장되었다는데, 장소를 추적해보니 강남 학동 거리에 있는 남포면옥이라는 음식점 자리였다.(인터넷에도 많이 소개돼 있는 유명 맛집으로, 사진을 찍어오긴 했지만 올리기는 어려울 듯 보인다) 이후 서광범의 묘는 몇 차례 이장되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번지 야산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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