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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광해군의 꿈 (II)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1. 21. 06:04

     

    그가 만든 인왕산 밑 인경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창덕궁 선정전에 화재가 나자 급한 대로 인경궁의 정전을 떼 갔고, 중국 사신을 위한 홍제원 참(站) 건립에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 갖다 쓰기도 하는 등 관리가 부재하였으니, 약 한 세기 반이 지난 영조 때는 궁중에서조차 인경궁이 있던 위치를 몰라 동네 노인에게 묻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영조실록> 45년 기사)

     

    임금(영조)이 세손(정조)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가 승지에게 명하여 인정전의 옛 터를 살피게 했다.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인목왕후가 인경궁에서 승하하였다는 글이 있으므로 그 터를 찾아보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에 승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동네 노인에게 물어봤더니 인왕산 아래 사직단의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하였다.

     

    반면 경덕궁은 오래 갔으니 우선은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이곳에서 살았고, 현종과 숙종도 내 이곳에서 살다 죽었다. 경종은 이곳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임금으로 역시 이곳에서 죽었으며, 헌종과 정조 역시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영조 시절,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이름의 피휘(避諱)해 궁궐의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꾸는데, 이후 영조도 반쯤은 이곳에서 머물렀고 정조는 세손 시절을 보냈다. 순조 때는 화재가 나 많은 전각이 불탔으나 중건해 사용했고,(순조는 이곳 회상전에서 죽었다) 철종은 한 2년 정도만 쓰다 창덕궁으로 옮겨갔는데, 이후 고종 때는 조금 수리만 했을 뿐 사용되지 않았다.

     

     

    숭전문과  숭전전
    숭전전과 품계석
    경희궁의 정전 숭전전 /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복원된 태녕전 / 처음의 쓰임새는 알 수 없으나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자 경희궁은 아작나기 시작했으니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인 숭전전만 빼고 거의 훼철되어 경복궁의 부재로 쓰였다. 일본에게 나라가 반쯤 넘어간 1908년,(융희 2년) 일제가 비어 있는 궁궐에 일본인을 위한 교육기관인 거류민 중학교(경성중학교, 서울 중고등학교의 전신)의 터를 닦으며 경희궁은 아예 궁의 모습을 상실했는데, 1910년 병탄이 되며 총독부의 소유가 되자 몇 동 남지 않은 건물에 대한 매각이 이루어졌다.(조선인이 버린 궁궐을 일제가 보존할 리 만무할 터.....)

     

    이에 정전인 숭전전은 남산 기슭의 일본인 사찰 조계사의 법당으로 쓰였고,(이후 1976년 동국대학교로 옮겨와 법당인 정각원이 되었다)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이등박문의 사당인 장충동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가 광복 후에는 다시 그 자리에 세워진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이후로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였는데, 1988년 경희궁 복원공사와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이렇듯 오욕으로 점철되긴 했으나 경희궁으로 돌아온 유일무이한 건물이다)

     

     

    훼철되기 직전의 회상전 / 왕비의 침전으로 숙종이 태어난 곳이며 순조가 이곳에서 죽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산 활 터의 황학정 / 일제에 의해 사직공원으로 옮겨진 경희궁 황학정은 지금은 국궁장(國弓場)의 부속건물이 되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흥화문 곁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놓았다.


    광해군은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인왕산 자락에 경덕궁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리한 공사였다. 광해군은 공사 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문을 단층으로 세웠다. 최근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1988년 이곳으로 옮겼지만, 이곳이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흥화문이 있던 곳 / 옆으로 경희궁 금천교가 보인다.
    흥화문 터 표석 / 종로구 새문안로 69에 위치한다.
    종로구 신문로 2가 1-36 주택가 담벼락의 경희궁 유적 표지 / 경희궁의 담장 기초,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왜 광해군은 그렇듯 무리한 공사를 강행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국을 누볐기에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을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즉위하자마자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들의 세 부담을 경감시켰을 것이며, 의관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케 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자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애민정신은 실은 쇼였고 정작의 본심은 궁궐을 크게 지어 왕실의 권위를 표출하는 것으로서, 그의 영건 사업들은 그 본심이 드러난 사례들이었을까?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이다 보니 문득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9월 기사) 

     

    찬수청이 아뢰기를,

     

    "<광해군일기> 1백 86개월 동안의 사적을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찬수청을 설치하여 <일기>를 편찬하면서 일반 여염(閭閻)에서 조보(朝報)나 장주(章奏)를 수집하고 당시에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었던 사실을 참고하여 겨우 두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에 1백 32개월 분은 이미 중초(中草)를 만들었고 54개월 분은 난초(亂草) 상태로서 미처 베껴 쓰지 못하였는데, 또 호란(胡亂)을 만나 갑작스레 찬수청을 철수했었습니다. 그 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일기>의 자료가 분실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미 계청(啓請)하여 찬수청을 설치해 지금 수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머지 않아 끝마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처음 생각에는 중초를 다 베끼기를 기다려 사국(史局)에 간직해 두었다가 사세를 보아 가면서 인쇄해 내려고 하였습니다. 논의한 자들이 대부분 ‘간신히 모아 놓았는데 초안만 잡아 놓으면 뜻밖에 재앙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찬수청을 설치한 이 기회에 기한을 정하여 인쇄해 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빠른 시일 내에 인쇄하여 내는 것이 좋겠다."

     

    내가 이 대목을 주목하는 것은 광해군의 영건 사업이 폄하되는 진짜 이유를 찾는 단서로써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 뒤라는 상황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광해군의 영건 사업은 훗날 정조의 그것과 비교해 비판적 차별성이 따른다. 정조의 수원 화성은 그야말로 칭찬 일색이나 광해군이 한 일은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정조는 궁궐뿐 아니라 궁궐(화성 행궁)을 포함한 하나의 성(城), 요즘 말로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었으니 스케일에 있어서는 광해군이 따라올 바가 못된다.

     

    그럼에도 수원 화성 건립은 정조의 치적이요, 광해군의 영건 사업은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한 못된 짓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좀 억울하다. 막말로 경희궁은 잘 써먹기나 했지만 수원 화성은 막대한 공력에 비해 별 쓸모가 없던 무익한 건축물이었지 않는가.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화성 완공 후 나라의 곳간은 텅텅 비었고, 화성 건설과 비대한 장용영 운영으로 인해 발생한 국가재정의 격감은 순조 이래의 왕들을 내내 어렵게 만들었다)

     

    어찌 됐든 정조의 사업은 좋은 소리를 듣고 있고 광해군은 욕을 먹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수수께끼 같은 이유를 간단하게 '쩐'(錢)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말해 정조는 건설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품삯을 지불했고, 광해군은 날로 부려먹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광해군은 절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품삯을 지불했다는 <정조실록>의 기사와 달리 <광해군일기>에서는 그 같은 내용이 없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달리해 찾아보면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그래서 백성들이 불만이었다는) 내용 또한 없다. 그도 정조와 같이 품삯을 주었을 수도 있었단 말이고, 나아가 지속적인 궁궐 건축은 전쟁으로 직업을 잃은(부상이나 농지의 황폐화 등으로 인해) 자에게 일거리를 제공해 호구지책을 해결함과 동시에 민생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뉴딜 사업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그렇지 않고서는 미치광이라는 것 외에, 그의 끊임없는 영건 사업을 설명할 길이 없다) 잃어버린 <광해군일기>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 물론 그렇다 해도 국가의 재정이 자꾸 지출되니 신하들은 건축을 만류했을 터이다. 임진왜란 전 700칸이었다고 하는 경복궁이 재건된 건 그로부터 280년이 지난 고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역대 왕들이 엄두를 못 냈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뚝심으로 밀어붙였던 것인데, 그 거대한 프로젝트로 5,500칸 인경궁이나 1,500칸 경희궁에 비하면 초가집 짓기에 불과하다.(하지만 대원군은 경복궁을 본래의 10배가 넘는 7,225칸의 규모로 중건했던 바, 이야말로 무리한 영건이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창경궁과 창덕궁을 재건하고 인경궁과 경희궁을 신축했다.(말했다시피 반정으로 쫓겨나지 않았다면 필시 경복궁도 중건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이와 같은 광해군의 미치광이 사업을 '공공근로를 제공해 빈민을 구제하려는 일종의 사회보장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소수의 의견 개진이 없지 않았다.(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1999 역사비평사) 

     

    잃어버린 <광해군일기>를 복간하기 위해 급조되고 축소된 아래 내용의 사관들(광해군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구시대에 대해 비판적이며 아울러 현 정권에 빌붙어 출세하고자 하는) 또한 폐주(廢主) 광해군에 대해 결코 좋은 소리를 쓸 리 없었을 것이다. 이에 그의 애민정신과 확립된 왕권으로써 새 시대를 펼쳐보고자 했던 그의 잃어버린 꿈을 찾아 기록했을 리는 더더욱 만무했을 터..... (본문에서 자주 등장한 능양군의 아비 정원군은 그 악행이 살인마 임해군과 순화군을 찜 쪄 먹었다 하는데, 공식적인 기록은 미사여구 일색이다. 아들 인조대왕 때의 기록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재현된 경희궁 금천교 / 옛 자리에 가까운 서울역사박물관 마당 입구에 만들어 놓았다. 복원이라기보다는 재현이다.
    마당에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재도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도 볼 수 있다.  / 아현고가·홍제육교·홍제고가·서대문고가의 흔적들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있어서 지극히 엄중하고도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은 사책(史冊)으로, 사람마다 참여하여 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찬수관(纂修官)·등록관(謄錄官)을 계하(啓下)한 수가 무려 70명이나 되고 전후 교체될 즈음에 문관이란 자들은 모두 참여되었으니, 난잡하게 충당시켜 전혀 엄밀히 하는 뜻이 없습니다. 기일이 몇 달 간 지체되더라도 별로 대단히 방해로울 것이 없으니, 숫자를 줄여 정하게 뽑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들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총재관(摠裁官)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조 때 춘추관 당상으로 있었습니다. 갑진·을사 연간에 조종조의 <실록>을 등서, 인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당상 10명, 겸춘추 50명을 더 뽑아 각방(各房)에 나누어 일을 맡겨서 기일을 앞당겨 일을 끝마쳤습니다.

     

    이번 <광해일기(光海日記>는 불에 타고 산실된 끝에 수습하다 보니 쉽게 일을 해나가지 못했고 중간에 변란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여 여러 해를 거쳐서야 겨우 끝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인출(印出)하기 어려우므로 선사(繕寫)할 것을 품정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전례에 의거하여 많은 관원을 뽑도록 청하여 몇 달 내에 완전히 끝마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원수가 많다 보니 과연 난잡하여 구차하게 충당시킨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비단 외부 의논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신의 마음에도 미안스럽게 여깁니다. 베껴 쓰는 기한이 몇 달 간 지체되더라도 전조(銓曹)로 하여금 숫자를 줄여 정하게 뽑도록 하고, 연로한 사람과 글씨체가 정하지 못한 자도 개차(改差)시켜야 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실록 29권> 인조 12년 1월 기사)

     

    광해군은 경덕궁(경희궁)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623년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전라도 태안과 다시 강화도, 교동도를 거쳐 멀리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혹 청나라에서 광해군을 복위시킬까 두려워한 신료들이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이에 그는 제주 구좌읍에서 빛나는 바다를 접하며 살다 죽어야 했으니 그 이름처럼 살다 갔다고나 할까?

     

    죽이려 데려가는가 하는 염려와 달리 그는 일단 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병졸들보다 험한 데서 자야 했으며 하찮은 관노(官奴)에게까지 천대를 받았던 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터였다. 그는 1641년(인조 1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주도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지만, 뜻밖에도 유언이 받아들여져 남양주 금곡에 있는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소 곁에 묻힐 수 있었다.

     

     

    광해군의 묘
    광해군(왼쪽)과 부인 유씨의 묘 / 반정의 무리들에게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냐,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냐?" 물었다는 기개 있는 부인과 함께 묻혔다. 부인 유씨는 제주도에 함께 유배되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강화도 유배지에서 48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가 묻힌 땅은 여전히 황량하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264번길에 위치한다.(사릉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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