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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광해군의 꿈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20. 06:59

     

    광해군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많은 궁궐을 지은 왕이다. 그는 1608년 왕위에 올라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의 15년간 궁궐만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궁궐 영건(營建)에 공을 들였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을 비롯해 인경궁, 경덕궁(경희궁), 자수궁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까지 복원하려 하였으니 폐위되지 않았다면 경복궁도 복원했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경희궁과 경복궁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만들어 그 두 곳을 하나의 궁궐로 연결하려는 SF와 같은 구상도 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듯 궁궐 건설에 집착했을까? 누구나 말하는 것처럼 서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의 컴플렉스 때문이었을까? 대규모 건축 사업은 국력의 낭비를 불러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는 상식과도 같은 역사의 범례를 몰랐던 것일까?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니 아마도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에 죽은 자를 대신하여 한 마디 얹을까 하는데,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양의 궁궐이 사라졌던 바, 그가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조가 한양으로 되돌아온 1593년, 그는 갈 곳이 없어 월산대군(성종의 형)이 살던 집에 행궁을 지어 거처하게 되는데, 다른 궁이 없었으니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그곳이 나중에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이 된다) 선조도 당연히 궁궐을 재건하고 싶어했다. 경복궁 중건은 엄두도 못내었고 작은 창덕궁을 택했다. 하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고 결국 그 과업을 광해군이 이어야 했다.

     

    ~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몽진하자 성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선조실록>의 수정본인 <선조수정실록>의 내용, 즉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난민(亂民)이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한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고시니(小西行長) 휘하 오제키(大關)의 <조선정벌기>에는 진나라 황제의 궁전 같은 조선의 궁궐에 놀라는 기록이 있고, 뒤이어 들어온 가토(加藤淸正) 휘하 제타쿠(是琢)의 <조선일기>에도 궁궐이 그대로 였는데, 승려 텐케이(天荊)의 <서정일기>부터 불에 탄 이야기가 나오는 바, 아마도 가토의 부하들이 방화를 한 듯하다.(무엇보다 조선의 백성 중에서 그만한 배짱을 가진 자가 없었을 터....)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작자 미상의 궁궐 그림이다.(국보 제249호) 이름만 다를 뿐 두 궁궐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답답하게 복원된 경희궁(경덕궁)

     

    서궐도

    창덕궁 서쪽에 위치한 경희궁을 그린 그림이다.

    복원된 부분

     

     

    복원된 자정전

     

    복원된 숭정문과 숭전전

     

     

    하지만 인왕산 밑 인경궁의 영건부터는 좀 과하다 싶었는데, 거기에 새문안 경덕궁의 창건은 아닌게 아니라 광기도 느껴진다. 

     

    경덕궁은 그의 재위 9년째되는 해부터 짓기 시작했다. 광해군이 이에 앞서 영건한 인경궁은 그 규모가 경복궁에 미칠 정도로 장대했거니와 모든 전각에 청기와가 씌워질 정도로 미려한 궁궐이었다. 이에 전국의 와공(瓦工)이 모두 동원되었고 각지의 가마 굴뚝에서는 연기 그칠 날이 없었는데, 그것이 채 완공되기도 전 또다시 경덕궁을 창건하였으니 이쯤에서는 정말로 정신 감정을 받아봐야 마땅할 듯싶었다. 게다가 때는 7년 전쟁 임진왜란으로 민생이 무척 피폐해져 있던 시절이 아닌가?

     

    잘 알려진대로 경덕궁은 정원군(광해군의 이복 형제)의 사저가 있던 곳이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術師) 김일룡의 말을 듣고 그 집을 뺏고 주변 민가 200여 채를 철거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조선왕조실록> 광해군 9년 기사) 아니게 아니라 훗날 정원군의 아들이 반정의 무리들에 추대돼 왕위에 올랐으니(16대 왕 인조) 술사 김일용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닐 수 있겠는데, 광해군이 정말로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광해군의 중립외교 I'에서 언급했듯 그는 명·청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청나라의 승리를 예측한 조선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영민한 군주가 한낱 술사의 말을 듣고 또한번의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켰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선조의 서자인 그가 적자인 영창대군이나 형인 임해군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한 것은 그만큼 영민하다는 뜻이었겠으니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둘째 아들 광해군 이혼(李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명하고 학문이 정밀하며 일찍부터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니 오래전부터 많은 백성들이 기대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했다. 이에 선왕의 기업을 계승할 만할지어다. 이에 혼을 세자로 책봉하고 군국(軍國)을 위무하고 감독하도록 하니 비록 갑작스레 거행하는 일이지만 계획은 실로 예전부터 정해진 바였다. 신공(臣工)들은 내가 우연히 했다고 여기지 말라.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은 갑작스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광해는 임진왜란 중에 의주로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하여 분조(分朝)의 왕으로써 팔도를 돌며 백성들을 격려하며 왜군과 싸워야 했다. 아울러 팔도에 의병을 일으켜 난중(亂中)의 나라를 구했지만, 어명으로 함경도에 근왕병을 모으러 간 그의 형 임해군은 백성들을 한량없이 괴롭혔으니 분심을 참지 못한 백성들에게 붙잡혀 오히려 왜장 가토에 넘겨지고 만다.

     

    어릴 적부터 폭력, 강간, 살인을 일삼던 임해군이었던 터,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밖이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이에 그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바, 나라 망신은 자치하고서라도 당장의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그는 이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으로 겨우 풀려난다)

     

    그럼에도 임해군은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의 승계 후에도 왕위에 미련을 두고 껄떡대었던 바, 부담을 느낀 북인(北人) 신료들에 의해 살해당해야 했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결과였다. 못나기는 아비 선조도 마찬가지였으니 전쟁이 끝나자마자 적통의 자식을 얻겠다고 영돈녕부사 김제남의 어린 딸을 계비(繼妃)로 맞아들였다.(이 여자가 인목대비다)

     

    이에 광해군은 아홉 살이나 어린 처자를 어머니로 모시며 고개를 조아려야 했는데, 그녀에게서 결국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이번에는 목숨마저 위태롭워졌다.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려 마음껏 힘을 펴보겠다는 서인(西人)의 무리들이 끊임없이 반정을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첫 타로 희생되고, 뒤 이어 늘 반정의 씨앗이 돼 온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과잉 충성을 보인 강화부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어미 인목대비는 서인(庶人)이 되어 남편이 살던 월산대군의 사저에 갇혔다. 그로부터 10년 후,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추대하는 반정이 일어나자 서열상 가장 높은 인목대비는 능양군의 옹립에 적극 호응하며 반정 세력에 힘을 실어준다. 복수심에 불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폐서자의 죽음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그것만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위에 앉았던 자는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목대비가 유폐됐던  석어당(昔御堂)

    반정 후 이곳으로 끌려온 광해군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이 꿇려진 채 36개의 죄를 질타당한다. 이때 능양군은 인목대비에게 어보를 건네받고 뒷 건물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갖는다.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른 즉조당(卽祚堂)

    이후 이곳은 관심 밖의 장소가 됐으나 구한말 고종이 외국 공사관들이 많은 정동으로 거처를 옮기며 궁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던 1904년 큰 불이 나 석어당과 즉조전이 소실됐으나 이듬해 재건됐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무리는 정변의 명분으로 크게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여 유폐시키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일, 둘째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위태롭게 만든 일, 세째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이었다. 명(明)과 청(淸), 양 강대국 사이에서의 자주 · 균형외교로써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도모한 일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I, II'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더 이상 언급은 않겠고, 이번에는 반정의 무리들이 주장하는 광해군의 죄를 살펴보자.(<광해군 일기> 15년조)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00여 년, 의리로서는 군신이요, 은혜로는 어버이와 같도다.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은 만세토록 잊을 수 없도다. 선왕(선조)이 임금으로 계실 때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중국이 있는) 서쪽 방향에 대고 앉은 적이 없도다. 그러나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잊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쳤으니 기미년 오랑캐를 전역(戰役, 1619년 사르후 전투)에 참가하며 그 장수에게 항복을 권하였도다..... 그리하여 우리 삼한이 오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던 바, 통탄하고 또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Daum백과] 광해군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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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정의 무리들이 내세운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2편에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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