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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암 허준과 송강 정철에 관한 일화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8. 6. 18. 09:11

     

    국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언제나 비정상적으로 여겨진다. 만날 정신 없이 싸움질만하면서도 세비는 꼬박꼬박 챙겨간다. 에에 극단적으로는 국회 무용론이 나오기도 하고, 배가 뒤짚어지면 국회의원부터 구해야 된다는 좀 old한 우스개도 있다. 물론 물이 오염될까 봐서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 제도를 표방하고 있으니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회의 여야 싸움이 격화될 때마다 연상되는 것이 과거의 사색당파다. 아울러 과거의 조선은 그 같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 또한 연상된다. 하긴 조선 역사에 비춰 보면 지금 국회의원들의 정쟁(政爭)은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다. 그때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지는 쪽은 생명을 잃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파면되어 낙향하는 자는 그야말로 Lucky guy다. 

     

    그런데 조선이 정말로 당쟁(黨爭) 때문에 망했을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찾을 수 있으니 조선이 망한 원인은 안동 김씨의 일당독재 때문이다. 견제세력이 없으니 헌종 대에서부터 철종 대까지 이어지는 60년 세도정치가 이어지게 된 것이고, 그것이 결국 망국의 비극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정치 패턴이 그대로 답습된 경우이다. 

     

    반대로 당쟁이 심할 때는 오히려 살 만했으니, 겉으로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 당파에 환국(換局)이 거듭되어 언뜻 개판의 정치판이 이어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 민생은 안정되었다. 부정부패 시에는 곧바로 탄핵의 대상이 되는 시절인 바, 요즘 말로 적폐라는 것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반대파에서 뭐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던 시절이니 몸가짐이 바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노론이 정치 권력을 독점한 안동 김씨 시절에는 따로 눈치 살필 일이 없었다. 조선말 민생 피폐의 대명사 격인 '삼정(三政)의 문란' 뒤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있었고, 이 같은 민생 경제의 피폐는 국부(國富)를 좀 먹었다. 이에 부국강병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 제국주의 시절에 임해 나라가 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를 일이다.

     

    당파 싸움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 및 그에 동조한 노론 학자의 논리이다. 그래서 조선은 망해도 싸다는 그와 같은 논리가 지금껏 통용되고 있는 것인데, 그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데 앞장 선 훈위 76인(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후, 그에 공헌을 한 자에게 내린 작위와 훈장을 받은 사람)마저 그 대부분은 노론이었다.(사학자 이덕일의 주장을 빌려왔다) 

     

    당파 싸움이 처음 시작된 건 선조 8년(1572), 관료추천권을 쥔 이조정랑의 자리를 둘러싸고 한양 동쪽 정동에 모여 살던 심의겸의 세력과 서쪽 연동에 모여 살던 김효원의 세력이 대립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이 각자 세를 불리면서 동·서 붕당(朋黨)이 생겨난 것인데, 이후 임진왜란을 전후해 동서의 싸움은 더욱 격화되었으니 왜적이 쳐들어올 것인가를 두고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이 각각 상반된 보고를 올린 일은 매우 유명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까지 도망갔던 임금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서인의 우두머리는 국어 교과서에 마르고 닳도록 등장하는 그 유명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었고, 소설과 드라마로써 그보다 더 유명해진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은 동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술 좋아하는 것과 약 잘 짓는 것으로 소문이 난 터, 그 두 사람의 사연도 그로부터 탄생했다. 

     

     

    정철이 두드려 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은잔(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사진출처: KBS) 

     

     

    임금 선조가 하루 한 잔만 마시라고 하사한 은잔(銀盞)을 두드려 넓게 만들었다는 야사가 전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던 정철이었던 바, 그 위(胃)가 배겨날 리 없었다. 이에 만성 위궤양에 시달리던 정철은 허준에게 약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동인이었다. 게다가 허준은 동인의 거두 허엽(許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아버지)의 8촌 동생이었던 바, 조제의 의뢰는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하지만 위통이 너무 심해지자 결국 제 아들을 종명을 불렀다. 

     

      "도저히 안 되겠다. 너, 허 의원의 집에 가서 약 좀 지어 오너라."

     

    그러자 정종명이 펄쩍 뛰었다. 

     

      "아니 됩니다. 그자는 동인이고 게다가 허엽의 친족입니다. 저 정여립의 역모 사건 때 우리 서인의 손에 죽어나간 허엽 일당이 어디 한 두 명입니까? 틀림없이 이번 기회에 아버님을 위해(危害)할 것입니다. 신의(神醫)라고도 불리는 자이거늘 무슨 조화를 부릴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걸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허나 다른 의원들의 약으로는 통 낫지가 않고, 또 지금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 네게 말은 안 했지만 의주에서도 그 자의 처방을 받아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전시(戰時)라 약재도 변변찮은 시절이었는 데도 말이다. 그자가 죽일 요량이었다면 그때 죽였을 것이야." 

     

    정철이 임진난 초기 선조를 호종했을 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말하자 그 아들 종명도 더 이상은 반대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종명은 몰래 허준을 찾아갔는데, 그를 만난 허준 역시 은밀함을 강조하였다.  

     

      "자네 부친의 환우는 매우 심하나, 자네가 내 집에 찾아오는 것은 자네에게나 나에게나 모두 좋지 않은 일일세. 그래서 내가 특별히 처방을 했으니 꼭 이 두 첩을 모두 먹여야 되네. 물론 내가 이 약을 처방했다는 말도 주위에 해서는 아니 되네."

     

    허준이 약 두 첩을 건네며 한 말이었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의심할 구석이 한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는 길에 다른 의원에 들러 살펴보게 하니 첩약 안에 부자(附子)가 들어 있었다. 사약(賜藥)의 재료로 쓰이던 맹독성 약재였다. 망설이던 종명은 일단 약 한 첩만을 다려 올렸는데, 심려와는 달리 아버지 정철의 위장병은 언제 아팠냐는 듯 깨끗이 나았다. 

     

      "과연 명의일세. 내가 그토록 오래 고생한 병을 약 한 첩으로 해결하다니...."

     

    정철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씻은 듯 나았던 병이 몇 달쯤 지나자 재발을 했다. 정철은 다시 아들을 불러 허준에게 약을 부탁했을 터, 그런데 허준은 이번에는 약을 조제해 주지 않았고, 대신 이렇게 물었다.

     

      "병이 재발하다니, 그럴 리 없을 텐데..... 자네 혹시 그때 내가 지어 준 약을 한 첩만 다려 올리지 않았나?"

     

    종명은 허준의 쪽집게 같은 질문에 엎드려 사죄하며 다시 한번 약을 지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허준의 대답은 차가웠는데, 그것이 종명의 행위에 대한 문책은 결코 아니었다. 

     

      "소용 없네. 이젠 백약이 무효하단 말일세. 일전 내가 말한대로 그 약은 극약 처방이었네. 자네도 그걸 의심해 한 첩만 다렸던 것이지만, 그로 인해 자네 아버지는 죽게 됐네. 만일 그때 자네가 약 두 첩을 모두 다려 올렸다면 부친께서는 남은 생을 재발 없이 사셨을 텐데, 지금은 그 극약으로 인해 위의 반이 상했네. 말하자면 반만 낫고 반은 낫지 않은 것이지. 따라서 지금 약을 쓰면 상한 위의 반이 완전히 상하게 되어 바로 절명하게 되네. 안타깝지만 그대로 좀 더 사시는 편이 낫네."

     

    종명은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와야 했는데, 그해 정철은 관운까지 안 좋아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거기서 결국 절명했다. 

     

    이상의 이야기에 대한 출처는 없다.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저것 편린의 야사를 채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훈은 오롯하니,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믿음의 중요성이다.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믿음이 상실됐을 때, 그 댓가는 이처럼 혹독하다. 

     

     

     

    중국에서 간행된 동의보감 

    1596년 선조의 명으로 집필된 의서로서 허준, 정작, 양예수 등이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 후 허준이 다시 편찬하여 1610년 완성시켰다. 25권 25책으로 된 동양 최고의 의학서적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7번이 간행되었다.   

     

     

    동양 의학의 보고를 탄생시킨 허가 바위?

    서울 가양동 영등포 공고 앞에 있는 이 바위굴에는 위와 같은 설명을 단 5개국어의 안내판이 있다. 동굴은 서울시 기념물(11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만큼 뭔가 스토리가 따라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안내문의 내용 중 믿음이 가는 내용은 전혀 없다. 안내문 그대로 선사시대의 주거지라는 것은 추측이고, 비록 설화라 해도 허선문의 출생지라는 것도 사실 좀 웃긴다.(허선문은 고려 초의 인물이다. 그때가 원시시대도 아니거늘 왜 이런 동굴에서 태어났을까?) 압권은 허준이 이곳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했다는 내용인데, 얼토당토않은 말이다.(좋은 집을 놔두고, 습하며 어둔 이곳에서 그 많은 양의 책을 썼다고?)

     

    양천 향교 

    허준과 가양동을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은 근방의 양천 향교 뿐으로 일대의 양천이란 지명이 양천 허씨의 본관이 되었다. 양천 향교는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로 역시 서울시 기념물(8호)이다. 근방의 허준 박물관과 허준 공원이 조성된 것은 허준의 본관이 이곳 양천이라는 데 기인했을 뿐 그가 이 일대에서 살았다는 근거는 없다. 동인이던 그는 동인들의 주거지였던 정동 일대에 살았을 것이고 동의보감도 그곳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저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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