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노기(乃木) 신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2. 00:17
노기신사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라는 근대 일본군 장수를 기리는 신사이다. 우리는 대부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거니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노기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본인들에게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인들과는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대 타이완 총독을 지냈기 때문에 대만 사람들에게는 민감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조선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나 초대 총독 데라우찌 마사다케를 대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타이완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일본에 할양됐다)
그런데도 내가 그를 주목함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가끔 이곳을 찾아오는 일본인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의 신사는 서울에 자리를 잡았을까? 물론 이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뭘 알아야 욕도 하고 반성도 하는 법이다.*
* 요즘 이에 관한 글을 올리면 그저 반박부터 하는 분이 계신데 참으로 답답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뚫어져라 바라보는지..... 지피지기면(知彼知己면,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지만 부(不)지피부(不)지기면 백전백패라고 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쌩기초다.
노기 마레스케에 대해서 짧게 얘기하자면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 육군 사령관이다.(해군 사령관은 발틱함대를 침몰시킨 도고 헤이하치로) 그는 대만 총독 사임 후 사실상 휴직 상태에 있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개전하자 대장으로 승진됨과 동시에 제3군 사령관으로서 여순 전투를 지휘했다. 1905년의 봉천 전투와 함께 육전의 향배를 가른 중요한 전투였다. 결과만 논하자면 일본군은 전투의 목표였던 러시아군 요새 203고지를 쟁탈했던 바, 일본의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혹독했다. 노기는 쟁취의 일념으로 오직 육탄 공격의 일로(一路)를 달렸던 바, 13만의 병사 중 6만5천 명(2만 사망, 4만5천 부상)의 사상자라는, 나폴레옹의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최대의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최악의 기록을 남겼다.* 군국주의 일본 사회 내에서도 이에 대한 비난이 비등했고 노기 스스로도 책임을 물어 메이지 일왕에게 할복을 청했으나 '내 생전에는 할복할 수 없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이 203고지 쟁탈전이 일본 민족주의 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비장하게 그려졌다. 최악의 전투를 비장하게 그려낸 건 확실히 작가의 재주다. 러일전쟁 중 일본군의 사상자는 총 10만 정도로, 그 반 수 이상이 여순 전투에서 나왔음에도 말이다.
사회 한편에서는 노기에 대한 동정론도 일었으니 초급 장교였던 그의 두 아들도 여순 전투에서 전사한 까닭이었다. 일은 그가 군복을 벗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는 퇴임 후 일본 귀족 자제들의 학교인 가쿠슈잉(學習園) 원장으로 취임했는데, 시종 검약했으며 훗날 일왕에 오른 왕세손 히로이토에게도 다른 사람과 같은 잣대로써 엄격히 다룬 일화를 남겼다.
주제로 돌아가 말하자면 노기의 신사가 서울에 세워진 것은 그가 유예해 두었던 할복을 결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7년 뒤 일왕 메이지가 죽자 그 장례식 날 부부가 함께 할복해 자결했다. 어찌 됐든 그는 명령 복종과 책임 이행이라는 신하와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던 바, 이와 같은 사고를 조선 땅에 이식시키고자 한 것 같다. 말하자면 너희들도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1934년 9월 그의 신사는 일본 최고의 귀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御神) 등을 합사한 남산대신궁(경성신사)의 옆에 두었으나 그보다도 높은 격을 유지했다.
노기신사의 흔적은 작년까지만 해도 사회복지시설 남산원에서 아래의 유구 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사용 펜스가 둘러처져 있는데, 앞으로 그 흔적은 서울역사박물관 내에서만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그곳에 유구의 일부가 복제돼 전시 중이다) 숭의여대 본관(위 지도 가운데) 자리에 있던 경성신사는 남산자락 회현동 왜인 거주지에 살던 일본인들이 본토에 있는 이세신궁의 신체(神體)를 얻어와 지은 신사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철거되었다. 이후 이곳에 숭의 학교가 들어섰는데, 학교 측에서 본관 앞에 주춧돌 몇 개와 함께 신사의 사진을 게시해 놓았다.※ '신체'란 별 게 아니고 신을 상징하는 장난감 같은 물건이다. 짙은 색의 옥사리(玉砂利, 옥을 깎아 만든 작은 구슬)를 주로 쓰는데 신사에서 '신체'를 구경하기란 한늘의 별따기다.
노기신사를 찾아간 김에 남산에 올라 일제 시대의 대표 신사가 있었던 조선신궁 자리를 찾아가 보았다. 경성신사가 주로 일본인을 위한 참배 장소라면 조선신궁은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악명 높은 장소였다. 숭의 학교처럼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자진폐교한 민족정신의 학교와 단체도 더러 있었지만 조선 기독교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천주교 등의 단체는 오히려 신사참배에 앞장섰다(☞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신사참배')그 어처구니없던 일이 행해지던 조선신궁은 본전 자리에 지어진 식물원마저 이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지막 유구였던 분수대 앞의 배전(拜殿) 계단도 뜯겼다. 지금은 근방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관계로 언제부턴가 '안의사 광장'으로 명명됐는데, 아직은 귀에 친숙하지 않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나이에 따라 어린이 회관, 국립중앙도서관, 남산과학관 등으로써 다르게 기억될 이 건물은 지금은 서울특별시 교육정보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공무원의 자세를 논하기는 마땅치 않은 자리이나 뉴스에 나왔던 공무원의 초과근무수당 부정수급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공무원들이 월급 외의 수당을 받고자 편법으로써 출장과 초과근무를 조작해 수당을 부정수급해 온 일. 사실 이 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퇴근 후 저녁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퇴근 카드를 찍으면(요즘 자자체에서는 지문인식이나 혈관인식으로 많아 바뀌었음) 초과 근무로 처리된다. 주부 같으면 장을 보기도 하고, 남자들은 스크린 골프장에 가서 한번 휘두르고 오거나 사우나에 갔다 오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술 처먹고 들어와 퇴근 카드를 찍기도 한다. 한 달 내내 이런 식의 허위근무 타임카드를 찍는 놈도 허다하다.
출장 수당을 챙기는 방법 역시 가관이다. 보도된 사례를 빌리자면, 구청 공무원이 구청 옆 의회 건물로 50m 정도를 다녀와도 출장이다. 이렇게 국민의 혈세가 마구 새는 데도 공무원들은 전혀 거림 낌이 없는 듯하다. 이는 조선말 망국의 도화선이 된 벼슬아치 및 아전들의 부정부패와 별다를 게 없다. 굳이 다름이 있다면 그들은 직접적으로 가렴(苛斂)을 한 것이고, 지금의 공무원들은 간접적으로 주구(誅求)를 하는 것인데, 어쩌면 지금의 행태가 더 무서운지도 모른다. 손톱 밑에 비접드는 건 알아도 염통 밑이 쉬스는 건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당장의 표시도 없고 고통도 안 느껴지지만 염통이 곪으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무원이 이런 짓을 해서는 곤란하다. 아니, 곤란할 정도가 아니라 이건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라의 곳간을 지켜야 할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돈을 훔쳐가면 그 나라는 망하기밖에 더하겠는가? 아울러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과연 어떤 일을 하겠는가?(과거와 달리 이제는 보수도 괜찮아 국민 모두가 선호하는 직장이 아닌가? 그럼에도 욕심을 챙기는 꼴이 진실로 안습이다)
나는 이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정말로 가슴이 미어지는데,(나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빈도와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다. 그것을 막아야 할 사람이 공무원인데 그 당사자가 썩었으니 달리 막을 방법도 없는 것이다. 또 한번 나라가 망해서 이 땅에 남의 귀신 신사가 들어오고, 그 귀신들에게 휘둘려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내려가다 보니 일제가 신사를 짓기 위해 철거했던 남산 구간의 한양 성곽이 거의 복원돼 있었는데,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공복(公僕)으로서의 본분 회복과 인간성 회복이 아닐는지..... 보도는 늘 공무원들의 도덕불감증이 극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극에 달한 그래프가 내려갈 것 같지는 않다. 백년대계라는 이 나라의 교육은 대체 무엇을 가르치기에 우리는 늘 백년하청의 물 위에 서 있어야 하는가?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욕의 땅 이태원 - 임진왜란과 잉태원 (0) 2019.12.05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0) 2019.12.04 대한제국 최후의 날 (2) 2019.11.23 이완용과 독립협회 (I) (0) 2019.10.31 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 (0) 2019.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