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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이단아 백호 임제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1. 8. 5. 11:20

     

    조선 중기의 풍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梯, 1549-1587)는 과거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시조가 실린 까닭에 보통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그 시조는 임제가 평안도 평사(評事)의 발령을 받아 가던 길에 송도(개성)에 들러 당대의 날리던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묘소 앞에서 읊은 것으로, 아마도 그는 평소에 셀럽 황진이와 질펀하게 놀아보는 게 소원인 듯했다.(물론 시문도 논하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송도에 갔을 때  황진이는 이미 고인이 되었던 바, 그 무덤가에서나마 시를 읊으며 애통해한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윘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구나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개성직할시 선적리 도로변의 황진이 묘/뉴시스 사진

     

    실화인지 야담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신이 읊은 이 시조가 공직자 윤리법에 저촉돼 (사대부의 체면을 실추시켰다 하여) 파면되었다고 하는 얘기는 시조와 함께 꽤 유명하다. 더불어 아래의 얘기도 제법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실화인지 야담인지는 불분명하다.

     

    황진이에게는 설홍이라는 수양딸이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이 시조를 듣고 임제에게 러브레터를 보냈으나 임제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때 임제는 이미 불치의 병에 들었던 바, 피차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던 것이다. 설홍은 임제가 죽고 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산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야그.

     

    임제는 생전에 풍류객으로서의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인지 여러 야사가 따라붙으나 그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아래 유언은 사실이니 그의 고향인 전남 나주시 다시면 화진리에는 임제 시비(詩碑)와 함께 그의 유명한 유언을 새긴 물곡사비(勿哭辭碑)가 세워졌다. '물곡사'란 '"울지 마란 말이야!"라는 뜻으로 그의 유언 서두에 나오는 단어를 옮긴 것이다.

     

     

    나주 화진리의 물곡사비(勿哭辭碑)/전남일보 사진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임종에 앞서 가족들이 슬피 울어대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 울지 마라. 육조오계(六朝五季: 역대의 모든 왕조)가 다 황(皇)을 칭하고 구이팔만(九夷八蠻: 세상의 모든 오랑캐)이 모두 제(帝)를 칭하였던바 그것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는 알 수 없으되, 홀로 우리나라만이 그렇지 못하고 타국의 피폐를 일삼을 뿐이요 한번 자립하여 중국에 입주해보지 못했으니 어찌 가련타 하지 않으리오. 이런 나라에 태어난 몸이 죽지 않으면 무엇하겠느냐?”

     

    임제는 29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관서도사, 예조정랑, 홍문관지제교 등을 지냈다. 하지만 워낙에 성격이 자유롭고 호방한 데다 주위의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한다.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세상을 떠돌던 그는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의 한문소설과 700여 편의 한시, 한글 시조 두 수를 남기고 1587년 음력 8월 11일, 잔기침 끝에 영면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동서 양반의 붕당이 이루어지며 당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요즘의 여야(與野)처럼 서로를 헐뜯고 흠집 내기 바빴는데, 때로는 붕당의 헤게모니 다툼에 목숨을 걸기도 해야 했으니 그가 죽은 후 2년 뒤에 벌어진 이른바 기축옥사 때는 관련된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보자면 요즘은 차라리 점잖으니 정쟁이 아무리 극심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살다 간 임제가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구한말의 이규환은 임제 약전(略傳)을 쓰며 그의 유언을 위와 같이 옮겼는데, 이 '물곡사'는 임제 문종 족보인 <나주임씨세승(羅州林氏世乘)>과 <성호사설>의 것이 일부 글귀가 다르며, 기타 전해지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문맥은 일관되니, 이규환은 임제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좁고 좁은 나라, 하잘 것 없는 시기에 태어나 서로 저 잘났다고 싸우는 붕당의 무리 속에 섞여, 스스로의 일신(一身)을 구속하여 일언일소(一言一笑)를 조심하고 사대(주의)를 법도로 알며 출세를 한들 무엇할 것이냐?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럭저럭 놀다 가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 아니었나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도 그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어쩌면 오히려 퇴보한 듯도 하다. 이전투구의 정치판을 뒤로하고 '보검을 차고 준마를 타고 하루 수백 리를 달리며 세상을 주유하며'* 세태를 계고하는 명망가를 아직까지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의 작품 <원생몽유록>은 사육신의 혼령을 불러내 당대 간신들을 질타한다는 스토리이고, <화사>는 간신 무리에 혹했다가 망해간 왕조들을 꽃들에 비유한 풍자소설이며, <수성지>는 충신과 간신 사이의 갈등이 주된 테마이다.(그러니 당대의 위정자들이 그를 싫어했을밖에) 

     

    * 택당 이식의 문집 <택당집> 속의 '오평사영'(五評事詠)에서의 인물평. 

     

    그렇다고 그의 글이 모두 이처럼 시니컬했던 것은 아니니 혹자는 임제의 글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글을 보지 못했다고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어릴 적에 지었다는 아래의 '무어별'(無語別)이라는 시는 임제의 천재성과 함께 서정미가 물씬 배어 있다. '무어별'은 '말 못 하는 이별'이라는 뜻인데, 누가 이런 노랫말을 쓸 수 있을까? '채련가'를 지은 당대의 허난설헌이 그쯤 되었을까, (☞ '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 요즘의 김이나라는 작사가가 그쯤 되었을까?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歸來淹重門 

    泣向梨花月

     

    열다섯 살 아름다운 처녀 

    부끄러워 한마디 못한 채 님을 보내고는
    돌아와 간신히 문을 닫은 뒤에야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허균이 "정이 담겨 있다(有情)"고 평한 이 시는 왕사정(王士禎)이 펴낸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수록되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임제의 시는 이처럼 쉽고 간결하면서도 울림을 주었으나 사대부들 사이에서 임제 자체가 배척되었던지라 그의 글도 따라 배척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문으로써 시류에 영합함을 거부하고 제 길을 걸어갔던 바, 백사 이항복은 임제 문집 <백호집>의 서문에 "굳이 먹을 갈아 입을 검게 만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고 찬(讚)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여금학가초처진망'(如今鶴駕超塵網)'이라는 자신의 추모시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먼지 그물 같은 세상을 학을 타고 벗어난다'는 뜻이다. 과연 임백호다운 문장이랄까.....

     

     

    임제의 고향에 세워진 영모정(永慕亭). 임제의 종중인 나주임씨 가문에서 1556년 영산강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세운 정자이다. 임제가 소시적에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무등일보 사진

     

    * 이어지는 글: '임제 <남명소승> 중의 우도(牛島)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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