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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군과 간언(諫言)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0. 12. 6. 14:30

     

    폐주 연산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라 사실 특별히 설명할 것이 없다. 그의 엽기적 행각은 우리 시대의 코드와 부합됐는지 영화나 드라마 역시 히트 치지 않은 것이 드문데, 2006년 개봉된 영화 '왕의 남자'는 급기야 닫혀 있던 방학동 연산군 무덤의 문을 개봉하게 만들었다.(말하자면 문화의 힘인데, 그 영향으로 남양주 광해군의 묘도 개방된 듯하다) 아무튼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폐주 연산의 무덤을 찾게 되었고 더불어 그 앞에 자리한 방학동 은행나무를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제는 아니나 먼저 이 은행나무를 주목하고 넘어가자. 예전 유홍준 선생은 혜화동 성균관 명륜당 앞 은행나무를 상찬해 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에서는 수령 500년의 그 은행나무를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의 수령 1천년의 국보급 나무와 견주었고, 또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신무문 사이의 고졸한 은행나무 가로수길과도 견주었는데, 아래 문장을 보면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주었던 듯싶다. 


    그러나 똑같은 은행나무라도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마을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주암리와 반계리, 절집 한쪽에 비껴 서 있는 그것과 달리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명륜당 앞마당에 동재·서재 대성전을 품은 채 의연히 자리하고 있어 이 뜻깊고 연륜 높은 공간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라는 역사의 향기가 풍기는 서정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고루 가지가 뻗어 풍성한 느낌이 있고 밝은 노란색 단풍이 주위 건물의 붉은 단청과 검은 기와지붕과 조화롭게 아우러져서 더욱 웅장하고 거룩한 느낌을 준다. 


    누구든 단 한번이라도 성균관 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에 달한 11월 '그날'에 여기에 가본다면 나처럼 이듬해에 다시 찾겠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못 옮기고는 사정에 따라 달라지니 나도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런 생각 없이 여기를 떠났다면 정서가 너무 메마른 것은 아닌지 한번 의심해볼 일이다. 시인이라면 '그날'의 은행나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화가라면 이 환상적인 장면을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도상봉의 '성균관 풍경'(1953년 작) 



    위 그림은 그러면서 소개한 화가 도상봉(1902∼19779)의 그림이다. 그런데 유홍준 선생은 방학동 은행나무를 본 적이 있을까? 명륜당 앞 은행나무보다 더 오래 되었으며 더 풍성하며 색도 더욱 밝은 듯한 이곳 방학동의 은행나무를..... 만일 보았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반촌에 태어나지 못한 태생적 한계를 안타까워 했을까? 이웃을 잘못 만나 지속적인 피해를 입어야 하는 억울한 처지를 위로했을까?(아무튼 생물은 이웃을 잘 만나고 볼 일이니 조용하고 평판 좋던 사람이 층간 소음에 시달리다 어느 날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진작에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됐던 성균관 명륜당 앞 은행나무와 달리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높은 수령에도 불구하고 2013년에야 비로소 서울시기념물 제33호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주제로 돌아가 말하자면 이 은행나무의 나쁜 이웃은 죽어 교동도에 묻혔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고 위리안치된 처소에서 두 달 만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7년 후 부인이었던 폐비 신씨가 도성 근방으로의 이장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폐위 전 사위였던 구문중의 묘 위에 자리가 마련되었던 바, 지금의 방학동 묘가 그것이다.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연산군 유배지의 교동도 유배문화관

    강화에 유배 왔던 고려·조선의 왕과 왕족에 대해 설명해 놓은 곳이다. 

     

    재현된 연산군 위리안치소

    연산군은 탱자나무가 둘러처진 이곳 초가에서 두 달을 살다 31살의 나이로 죽었다. 역병이 표면상의 이유지만 위리안치로 민간의 접촉이 없던 자가 역병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필시 독살되었을 터이다. 

     


    연산군 위리안치소 안내문

    「왕족이나 고위관리에 적용된 유배의 형태에 안치(安置)가 있으며 이는 일정한 장소에 죄인을 격리하여 구속시키는 형벌로 절도안치(絶島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또는 가극안치), 본향안치(本鄕安置)가 있다. 현 시설물은 연산군이 유배되어 안치 기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위리안치소를 재현하여 찾는 이들에게 시대적 상황을 이해시키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적 가치와 역사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조형물이다」

     

     

    연산군 묘

    화살 표시 무덤으로, 앞줄 왼쪽은 연산군의 사위 구문중, 오른쪽은 딸 휘순공주의 묘이다.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 신씨의 묘(오른쪽)


    연산군 묘


    입구의 표석


     


    입구의 은행나무


    높이 25m, 둘레 10.7m의 노거수(老巨樹)다.

     

     

    폭군 연산은 월탄 박종화가 <금삼의 피>라는 소설에 데뷰시킨 이래 간혹 <햄릿>의 고뇌를 지닌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를 보면 그의 잔혹함은 도를 넘는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미 폐비 윤씨를 괴롭힌 엄귀인과 정귀인(당시는 숙의와 소용일 때로 내명부 내관의 품계와 명칭은 아래와 같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제 손으로 반쯤 죽이고 그 아들들의 매질로 하여금 마저 죽게 만드는 기막힌 발상을 해내었다.(다행히 엄귀인은 딸만 두었고 일찍 출가해 자신의 자식에게 맞아 죽지는 않았지만 좌우지간 타살됐다) 


    마찬가지로 폐비 윤씨를 괴롭히고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든 할머니 인수대비도 손자인 연산에게 욕을 먹고 흉한 꼴을 겪어야 했는데, 역시 압권은 엄귀인과 정귀인의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산천에 뿌렸다는 대목이리라. 

     

     

    내명부
    중전
    내관
    정1품 
    희빈(禧嬪)
    종1품
    귀인(貴人)
    정2품
    소의(昭儀)
    종2품
    숙의(淑儀)
    정3품
    소용(昭容)
    종3품
    숙용(淑容)
    정4품
    소원(昭媛)
    종4품
    숙원(淑媛)

     

     

      <연산군일기> 내용 

     

    (연산군 10년 3월 11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과  창경궁으로 잡아오라."


    하고,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와 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와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 정씨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대비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와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 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드라마에서는 엄귀인과 정귀인을 자루에 담아 아들들로 하여금 패게 만들었다. 


    위의 참극이 벌어진 창경궁 뜰 


     

    임금이 이와 같은데도 임금에게 간(諫)하는 자가 없었으니 좋은 말로는 명철보신이요, 적합한 말로는 쓰레기였다. 그 썩어빠진 벼슬아치 사이에서 김처선이란 환관 한 명이 바른 생활을 간했다. 연산 10년 7월 16일의 일로 그는 이로 인해 곤장 100대를 맞고 하옥됐다. 이후 그는 옥에서는 풀려났으나 몸은 반병신이 됐는데 이듬해 4월 1일 겨우 몸을 추스리고 궁으로 향했다. 이날 김처선은 집을 나서며 오늘 궁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니나 다를까 연산군을 만난 처선은 직언을 퍼부었다. 

     

    "늙은 몸이 그동안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도 대강 통했는데, 고금을 통틀어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발 연회를 거두시고 종사를 살피는 성군이 되소서."

     

    열 받은 연산군이 활을 꺼내 들었다. 연산군이 쏜 화살은 가까이 있는 처선의 늑골에 깊이 박혔으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신(臣)은 다만 전하께서 오래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만 같아 그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더욱 열이 뻗친 연산군은 칼로 처선의 다리를 쳐 정강이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일어나 걸어라! 어명이다!"

     

    김처선이 무릎을 꿇고 연산군을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을 수 있사옵니까?"

     

    그러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냈는데, 당시 김처선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실록>이 아닌 조신의 <소문쇄록>에 나오지만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죽이고 7촌까지 단죄한 일,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파내고 석물을 없앤 일가산을 적몰하고 가택에 못을 파 그 흔적까지 없애고 고향마저 파괴시켰다는 내용이 <실록>에 전다. 아울러 그의 시체는 산에 버려 짐승의 밥이 되게 했으며 김처선의 이름자인 처(處)자와 선(善)자를 쓰지 못 하도록 하는 금자령(禁字令) 내렸다.






    이상 김처선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며, 감동적인 까닭에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하지만 아래 광대 공길(孔吉)의 이야기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니, 광대 공길(이준기 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이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가공의 인물인 또 다른 광대 장생(감우성 분)을 통해 그 뜻이 전달된다. 


    (연산군 11년 12월 29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주례(周禮)>에 방상씨(方相氏)*가 나례(儺禮)**를 맡아 역질을 쫓았다면 역질 쫓는 것과 나례가 진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 풍속이 이미 역질은 쫓았는데 또 나례를 하여 역질을 쫓는 것은, 묵은 재앙을 쫓아버리고 새로운 경사를 맞아들이려는 것이니, 비록 풍속을 따라 행하더라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본디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



    국가민속문화재 제16호 방상시 탈


    * 방상시(方相氏)는 중국 주(周), 한(漢)  시대부터 유래된 축사(逐邪)의 신이다. 이후 방상시 탈을 만들어 나례 의식에 사용했다. 


    ** 예전, 석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귀신과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해 베푸는 의식. 



    이보다 앞서 배우 공길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어>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그 이듬해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어 교동도에 유폐되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그는 그해 명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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