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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혜현스님과 쿠마라지바의 혀(舌头) 사리탑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1. 2. 25. 01:43

     

    앞서 살펴본 구산선문 혜철 스님의 승탑인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예전에는 '태안사 적인선사 부도', 혹은 '태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으로 불렸다. 다른 승탑들 역시 마찬가지로 주인이 밝혀진 승탑은 망자(亡者)의 법명과 시호 등을 이어붙인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무명씨의 승탑은 절의 이름이나 소재지의 지명 부도(浮屠)라는 명칭이 붙어 '○○○ 부도'로 불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명칭이 모두 사라졌으니 2010년 문화재청의 석조문화재 명칭변경에 의거, 망자의 이름이 밝혀진 부도는 시호만을 사용하여 '○○○탑', 부도비는 '○○○탑비'라고 부르고, 무명씨의 부도는 절의 이름이나 소재지 지명에 승탑을 붙여 '○○○ 승탑'으로 부르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설명을 덧붙이자면 승탑은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작은 석탑으로,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 책의 원광서학조와 혜현구정조에 신라승 원광법사(542-640)와 백제승 혜현(惠現, 575-630)의 승탑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 두 스님은 생전에도 워낙 유명했던지 당나라 도선이 쓴 <속 고승전>에도 소개돼 있다.(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쓰며 <속 고승전>의 내용을 빌려온 듯 보인다)
     
    이를 보면 승탑은 삼국시대 말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 같으나 전하는 것은 없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승탑은 예전에 '전흥법사염거화상탑'으로 불리던 '염거화상탑'으로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만들어진 것이다.('다음백과'/문화재청) 앞서 말한 대로 이 승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데, 다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염거화상탑
    안내문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건 염거화상은 우리나라 남종선의 태두 도의선사의 제자이며,(☞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 그 도의선사의 승탑은 설악산 진전사지에 엄연한데 왜 그것을 최초의 승탑이라 칭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도의선사탑은 그 탑비만이 전하지 않을 뿐 100% 믿어 의심치 않는 승탑이거늘..... (보물 제439호로, 명칭도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다)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

    얼마 전 완벽 복원되어 시범 공개된 국보 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에 이어 또 하나의 명품 승탑을 감상하게 되었다. 전남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그것이다. 군(郡)이 보물 27

    kibaek.tistory.com

    도의선사탑

    눈덮인 설악산을 마주보고 서 있는, 한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멋진 '떠도는 사진'이다. 석탑기단에 8각탑신을 얹은 '탑+석등'의 어쩡쩡한 모습이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임을 웅변한다. 

     

     

    그런데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실물은 전하지 않고)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백제 스님 혜현의 승탑에 관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혜현은 워낙에 대덕(大德)이었던지라 그가 수덕사에 머무는 동안 불제자들의 발길로 문 밖에는 신발이 가득했다.(戶外之履滿矣)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그는 고요함을 찾아(惠現求靜) 절을 떠나 강남 달라산으로 들어갔다. 그 산은 매우 험준해 사람들이 찾아갈 수 없었던 바, 혜현은 고요히 앉아 생각을 잊고(現靜坐求忘) 산속에서 인생을 마쳤다.(終于山中)
     
    그가 죽은 후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시신을 동굴에 옮겼는데, 산짐승이 유해를 다 먹어치우고 오직 유골과 혀만 남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혀는 그대로 붉고 연하였고,(三周寒暑 舌猶紅軟) 그후 점점 변하여 검붉고 단단해져 돌과 같이 되었다.(過後方變 紫硬如石) 이에 스님과 속인들이 그것을 공경하여 석탑에 모셨으니,(道俗敬之 藏于石塔)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58세로 정관(貞觀, 당나라 연호) 초년(627년)이었다.
     
    혜현은 중국으로 가서 배운 일이 없고 고요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現不西學 精退以終)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傳記)가 씌어져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而乃名流諸夏立傳 在唐聲著矣) 
     
    이상을 보면 혜현의 유신(遺身)을 모신 곳이 기존의 탑이었는지 아니면 보관을 위해 새로 만든 승탑인지 확실치 않다. 따라서 그 탑을 한국 최초의 승탑이라 하기는 어폐가 있는데, 다만 중국 쿠마라지마의 스토리를 빌리자면 그 탑은 승탑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양나라 혜교(慧皎: 497-554)가 집필한 <고승전>에 전하는 혜현과 비슷한 쿠마라지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키질석굴과 쿠마라지바상

    쿠차국(현재의 신장 쿠차)에서 태어난 쿠마라지바(344-413)는 인도에서 불법을 배워와 고국에 대승을 설파하던 중,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장안에서 약 300권의 불교 경전을 한역(漢譯)하며  불교 보급에 이바지하게 된다. 

     

     

    쿠마라지바는 413년(혹은 409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과연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鸠摩罗什说, 的舌头永在 死后焚烧肉身 果然舌头不烂) 
     
    혜현과 쿠마라지바의 스토리에서 강조된 혀(舌头)는 '말씀'이러니 혜현은 백제 삼론종(三論宗)의 개창자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법화경 강론은 매우 유명했다. 그리고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던 바, 뭔가 연관성이 느껴지는데 놀랍게도 쿠마라지바의 혀와 그것을 모신 승탑은 현존한다. 
     
     

    쿠마라지바의 혀
    유리 사리함 안의 혀
    쿠마라지바의 사리탑
    우리나라에는 없는 풍경

    종남산 초당사

    초당사(草堂寺)는 시안(西安) 시내에서 25km 떨어진 절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쿠마라지바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불경을 번역했다 하여 초당사가 되었다. 이 정문 왼쪽에 있는 보호각 안에 쿠마라지바의 혀가 보관된 높이 2.9m의 사리탑이 있다. 
     

    초당사 대웅보전
    사리각 안의 쿠마라지바 사리탑

     

    국보 제49호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는 백제 시대 것으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로 혜현이 이곳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로서 이 당우 하나로도 법력의 증명은 충분하다. 그런데도 미흡함을 느끼는지 절을 꾸미지 못해 안달이니 지금 절 마당에 놓인 희안한 석탑의 상륜부는 금붙이로 번쩍이고 주변에도 화려한 단청의 당우들이 들어섰다.
     

    이 탑과 좌우의 당우들은 예전 내가 갔을 때 모두 없던 것들인데, 통계상으로는 승려도 불자도 모두 그때보다 줄었음에도 절은 자꾸 커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과거 유홍준 교수가 무협영화 세트장 같다고 탄식했던 사찰 입구 누각은 이듬해 장맛비에 개박살 났음에도 중생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듯 어느덧 다시 고대광실이 되었다.
     

    혜현스님의 전설이 전하는 속리산

     

    그 혜현의 삶을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찬(讚)했다. 

    鹿尾傳經倦一場(녹미전경권일장)
    去年淸誦倚蕓藏(거년청송의운장) 
    風前靑史名流遠(풍전청사명류원) 
    火後紅蓮舌帶芳(화후홍련설대방) 
     
    불경을 설법함도 일장춘몽인 듯
    지난 날 청연히 외던 독경 소리 구름 속에 감추었네.
    모진 바람 앞에서도 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니
    님의 사후, 홍연(紅蓮)처럼 붉은 혀가 더욱 아름다워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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