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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그 어원을 찾아서)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0. 6. 7. 18:47
'낭만에 대하여'
'자연인 되기'는 MBN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부터의 로망이었다. 사실 이것이 나뿐만의 생각은 아닐지니 MBN 자체에서도 '과연, 될까?' 싶었던 것이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이는 도시 생활에 찌든 많은 현대인의 로망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기에 그 로망을 이룰 수 없는 것뿐.....
그런데 그것이 현실화되는 경우는 인간에 대한 깊은 배신감(혹은 그 배신으로부터 비롯된 사업 실패)이나 불치병으로부터의 마지막 지푸라기 잡기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아 로망이라는 어의(語意)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사의 로망이란 어쩌면 그게 진실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여행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돈과 시간이 없어 못 가고 늙어서는 몸이 말을 안 들어 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이 상존한다.
췌언일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그 로망이란 단어의 어원을 좇아 글을 쓰고자 한다. 로망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2세기 중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주로 기사도를 다룬 허구적 설화 양식'이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풀이가 등장한다.('다음' 국어사전 참조)
영어로는
- 1. roman
- 2. a novel
이고, 어원은 프랑스어로 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프랑스어를 빌려 와 쓴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로망'이라는 단어는 '기사도를 다룬 허구적 설화 양식'이라는 의미여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망'의 일본어 한자인 '낭만'(浪漫)이란 단어를 찾으면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라는 해석이 나와 우리가 원하는 '로망'의 의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영어로는
- 1. romantic
- 2. romance
- 3. sweet
- 4. dreamy
이다. '로맨틱하게 로망스를 즐기는 달콤한 꿈'이 '낭만'이란 단어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뜻을 '로망'에서 찾을 수 없고 '낭만'에서 찾게 되는 걸까?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浪漫'이라는 일본어의 발음이 곧 '로망'(ろうまん)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학자들이 자국의 개화기 때 들어온 roman이란 단어를 발음이 같은 한자어로 만들어 '로망'의 뜻과 뉘앙스를 살린 것인데* 우리는 그 '로망'에 대한 우리말 단어를 만들지 못하고 일본어 한자 '낭만'을 그대로 갖다 썼기에 어의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임승차에 대한 값을 치르는 셈이다. 아무튼 무임승차나마 올라탔으면 그대로 가야 한다. 그 '로망'은 아직 우리말 사전에 없으니 낭만으로 가자는 소리다. 지금 우리에겐 '낭만'은 없어지고 '로망'만 남았는데, '남자의 로망'이니 '여자의 로망'이니 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두 번의 굴욕이다.
* 처음 쓴 사람은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나쓰메 소세키(1867~1916)로, 그가 자신의 '문학론'에서 Romanticism을 '낭만주의'로 번역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로망'을 사전에서 찾으면 '12세기 중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주로 기사도를 다룬 허구적 설화 양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5세기 게르만 족의 일파였던 프랑크족은 서쪽으로 이주한 후 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 또 사실이 그러했으니 프랑크 왕국이 갈라진 세 나라는 지금의 프랑스, 이태리,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중 독일이 로마의 이름을 선점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을 세운 이후로 프랑스에게 로마는 그야말로 '로망'이 되어버렸다.
즉, '낭만'은 '로망'에서, '로망'은 중세 유럽제국들이 동경하던 로마 문화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그 로마시대가 과연 로맨틱한 시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 잃어버린 로망을 그리워하며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기사 문학'을 탄생시켰다. 우리 말 사전의 뜻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비록 프랑스의 그것과 일본의 그것에 무임승차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값을 지불했다. 바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해서'라는 곡이니 그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그야말로 낭만의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손색이 없다.
아. 세월은 속절없이 가고, 음유시인 최백호는 이제 이른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생각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과거 미사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가끔 이 노래를 멋지게 불러 젖혀 직업가수들을 무색하게 만들던 광창이라는 친구는 지금 무얼할는지.....
2006년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스틸컷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를 다룬 1995년 영화 '카멜롯의 전설'
최백호가 그린 '불꽃나무'
2009년 가수 최백호 씨가 지인 신병철 씨에게 그려 준 그림
이 사람은 누구일까?
소설가 황석영으로 그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낭만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사진을 찾아봤다. 혹시 그의 문학관이 세워지게 되면 기증하려 한다. 우연찮게 그가 오늘 '철도원 삼대'라는 신작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이쯤되면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43년 만주 신경(新京, 장춘)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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