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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과 와사등(瓦斯燈)작가의 고향 2023. 3. 9. 00:18
앞서 김소월을 말하며 그를 시업(詩業)과 사업을 병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사업 실패는 시업도 접게 만들었으며 결국 다량의 아편을 술에 타 먹음으로써 스스로 삶도 접었다. 소월의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이면은 어쩌면 그를 신비롭게 만들었으니 32살의 나이로 사라진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시인으로 남았다.
반면 시업과 사업을 병행하면서 두 분야에서 모두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는 김소월, 백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국어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도 서너 편이니, '설야'(雪夜), '추일서정'(秋日抒情), '와사등'(瓦斯燈)은 확실히 실렸고, '외인촌'(外人村)은 수록 여부가 확실치 않치만 제목만큼은 충분히 귀에 익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아래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라는 시는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를 무척 좋아했고, 모르긴 해도 다른 사람들도 좋아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그 첫 구절이 그러했다. 시를 다시 음미하자면 다음과 같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이쯤 되면 시인의 이름을 모두 다 알 것이다. 그 양반 김광균은 원래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송도상고 졸업 후 (그의 고향은 개성이다) 고무공장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시를 발표했는데, 신춘문예나 추천 등의 등단 코스를 거치지 않은 시인임에도 반향이 뜨거웠으니, 김기림이나 백철 같은 평론가는 그의 시를 보고 '청각조차 시각화하는 기이한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 혹은 '무형적인 것을 유형화하는 문재(文材)'를 지닌 시인으로서 높이 평가했다. 이를 테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 "멀리 여인의 옷 벗는 소리"와 같은 표현 등이다.
그것을 우리는 '공감각적 표현', '회화적 이미지의 모더니즘 '이라 배웠다. 당대의 평론가들 역시 그를 김기림의 대를 잇는 뛰어난 신세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상찬해 마지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모더니즘은 아마도 그의 현실이 불러온 감각일 듯하였다. 즉 그는 당시에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사업가여서 1950년 6·25 때 납북된 동생을 대신해 운영하던 무역업체 '건설실업'은 우리나라 60년대 대표 중견기업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의 국제 비즈니스적 감각은 시어(詩語)로 투영되기도 했으니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이 시는 1940년 초 발표됐다)
김광균은 1939년 9월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먼저 알았고 그것을 시에 담았다. 무수히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당시의 극심해진 인플레이션 앞에서의 폴란드 지폐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는 무역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고 70년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이사직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당시까지 일본어 일색이던 경제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수표(일본어 小切手), 어음(手形), 환(爲替), 환전(兩替) 등의 용어도 그가 만든 것이다.
김광균은 시인 친구들을 만나면 기업 경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없는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시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주변의 문인(文人)들을 기리는 작업에는 아낌없이 시간을 냈다. 그는 먼저 간 친구 문인이나 선후배를 위한 시비나 문학비를 사비(私費)로 제작해 세웠는데, 비석으로 쓸 돌을 찾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여러 돌 공장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세운 시비는 친구 장만영 시인(1975년 작고)의 것으로 용인 기독교 묘원 내에 있다. (당시 그는 무덤 곁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봉구, 김기림, 백철 등의 문학비도 세워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시비는 매우 늦게 세워졌으니 그가 죽은 11년 후인 2004년 시인 구상 등이 대학로 근방에 자리를 마련하여 건립했다. 시비에는 '설야'가 새겨졌는데,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식 시인이 되게 만든 시이다.
설야(雪夜)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와사등은 가스등의 일본어 단어로서 석탄가스를 도관(導管)에 흐르게 하여 불을 밝히던 근세 유럽의 조명기구였다. '와사'(瓦斯: '가스'로 읽는다)는 화란어(네덜란드어)의 gas를 일본어로 음차한 것으로, 막부시대부터 교류하던 네덜란드의 영향으로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난학자(蘭學者, 네덜란드 학문 연구자)인 우다카와 요안(宇田川榕菴)이 1837년 일본 최초의 화학서적인 <세이미카이소(舍密開宗)>를 번역하며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산화, 환원, 용해(溶解) 등의 단어와 함께 만들어 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세이미(舍密)는 화학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 Chemi를 음차한 것인데, 화학 역시 일본어로 1861년 가와모토 고민(川本幸民)이 <가가쿠신쇼(化學新書)>라는 과학서적을 출간하며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요즘 귀에 익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인지능력을 흐리게 만듦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가해자에게 조종당하게 되는 (혹은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은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말로, 까닭에 '가스등 효과' 또는 '와사등 효과'로도 불린다. ('노예화'라고 쉽게 번역된 글도 보았다) 대중에게는 생소한 단어였으나 여배우 서예지 가스라이팅 사건 이후 많이 알려진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사건자체는 불명확하다.
와사등(瓦斯燈)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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