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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동 시절의 김수영
    작가의 고향 2023. 3. 23. 00:31

     

    촌놈처럼 보이지만 김수영은 1921년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낮은 오피스 빌딩의 차지가 되었는데, 집 터 표지석을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종로2가 탑골공원 맞은편 길가에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세워졌다고 탓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으나, 기실 관철동 골목 안쪽에는 세울 곳이 마땅치 않으며  또 있어봤자 눈에 띄지도 않는다. (☞ '김수영의 풀')

     

    그 이듬해인 1922년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다. 김수영은 이곳에서 효제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다닐 때까지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난을 안 가고 서울에 머물다 북한군에 징집되었고 이후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전쟁 후에는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으로 옮겨 집을 마련했다. 1956년 6월의 일이었다. 

     

    마포구 구수동 41-4번지. 이것이 그의 집 주소였다. ㄱ자 형의 보잘것없는 구옥(舊屋)이었지만 한강이 내려 보였다는 그 주소지에는 현재 영풍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101동쯤에 그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조차 힘드나  당시 그의 집은 배추밭과 시금치밭에 둘러싸였고 나머지는 잡초더미였다.(부인 김현경의 회고) 김수영은 인분 냄새와 모기가 끊임없이 공격해 대는 그곳에서 배추 농사도 짓고 생계를 위해 닭도 키우고 또한 글도 썼다. 아래의 시는 그 무렵의 여름날에 쓴 것이다.

     

     

    여름 아침 (부분)

     

    여름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동리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그는 그 시절, 배추 농사와 양계사업(11마리 병아리로 시작한 것이 닭 750마리가 되었다고 하니 사업이라고 할 만한다)에 제법 재미를 보았던 듯, "되잖은 원고벌이보다 한결 마음이 편하고, 난생처음 직업을 가진 듯한 자홀감(自惚感)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앞서 미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 평화신문 문화부 기자 등의 직업을 가졌었다. 그렇다고 시업(詩業)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니 아마도 그는 이때 가장 많은 시를 썼을 것이다.

     

    1968년 6월 15일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은 곳도 이곳 구수동과 신수동 사이 길이었다. 그렇다면 마포구 구수동이나 신수동 아파트 단지 부근 공원에 그의 시비 하나쯤은 세워져야 옳았을 터, 하지만 이곳에서 김수영의 흔적일랑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김수영의 흔적은 도봉구 도봉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노모와 누이들이 살던 곳이다. 

     

    김수영의 본가 가족들은 전쟁 후 선영이 있던 도봉구 도봉동 산 107-2번지로 옮겨와 살았다. 그때 김수영은 양계사업이 생계는 영위할 수 있다고 보았던 바, 노모와 가족들을 위해 도봉동 본가에도 작은 양계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양계장의 관리 겸해서 한 달의 절반 이상은 도봉동에 와 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구수동보다 이곳 환경에 훨씬 애착을 가졌던 듯, 글쓰기나 번역거리 일이 생기면 늘 도봉동으로 와서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물론 창작도 했으니 죽기 보름 전에 쓴 유작시 '풀'과 전쟁의 경험을 담은 '의용군'이라는 미완의 소설이 도봉동에서 집필되었다.

     

     

    김수영이 살았던 무수골 마을 표석과 도봉천

     

    지금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영 문학관이 건립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방학동과 김수영과는 그리 큰 인연이 없으나 마포구에서 관심을 놓고 있는 사이 재빨리 문화 콘텐츠를 인터셉트한 것인데 도봉산 초입에 세워진 김수영의 시비가 당위성으로 제공되었으라 여겨진다. 도봉구 공식사이트인 '디지털도봉문화대전'은 김수영의 시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다.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사망 일주기를 앞두고, 당대의 대표적 문학예술 잡지 <현대문학>을 간행하던 현대문학사가 앞장서 김수영 시비 건립 위원회를 꾸리고 선후배 문인들과 지인들의 뜻을 모아, 1969년 6월 15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 김수영 시인의 무덤 앞에 만들어 세웠다. 시비는 원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 김수영 시인의 무덤 앞에 있었다. 김영태나 황동규의 시에 등장하는 김수영 시인의 무덤에 대한 진술들은 모두 이 지점에 대한 것들이다. 1990년대 초 김수영의 어머니가 죽자 남은 식구들이 의논하여 선영의 묘들을 파 화장하고 산골(散骨)하였다. 그에 따라 김수영의 묘도 개장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한 뒤, 묘 앞에 있던 시비를 1991년 4월에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 구역 내 도봉서원 앞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아래 유골함을 만들어 묻었다. 따라서 현재의 김수영 시비가 곧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비는 도봉산 아래 마련됐다.
    김수영 시비 가는 길
    도봉서원 터 밑의 김수영 시비 / '풀'의 일부와 함께 청동으로 시인의 얼굴을 새겨 붙였다.

     

    김수영(金洙暎) 시비(詩碑)’의 글귀는 시암(是庵) 배길기가 썼고, 시비의 몸통에는 시인의 육필로 시 「풀」의 두 번째 연을  새겨 넣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풀'을 '억압받는 민초(民草)'로, 바람은 '그 민중을 억압하고 굴복시키려는 부당한 권력'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물은 흐르는데 소용돌이치던 그 시절의 물을 그리워함인지 여전히 그때에 머무려 한다. 이제는 그것이 지겹다. 원래부터 「풀」의 풀은 그저 풀이었거늘.... 그때나 지금이나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전문)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바로 옆 계곡에는 '높은 산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고산앙지'(高山仰止)의 글귀가 써 있다. 도봉서원의 흔적일텐데 글씨의 일부와 글쓴이의 이름 김수증(金壽增)은 물에 잠겼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더니 그 물가로 부근 절의 까마귀 무리를 피해 백로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백로가 이 사람일지 모르겠다.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내에 있는 김수영의 청동 흉상이다.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김수영문학관의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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