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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중국인 거리에 남은 소설가 오정희의 흔적
    작가의 고향 2023. 8. 14. 06:16

     

    이른바 성장소설로 불리는 소설 중에서 명작이 세 편 있다. 발표된 순서대로 쓰자면 첫 째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이고, 둘 째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 셋 째는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이다. (물론 주관적인 분류이다 / 둘 째와 셋 째는 바뀌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번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넣고 싶은데, <삼풍백화점> 속 인물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을 지났던지라 성장판이 이미 닫혔을 때다. 그래서 성장소설로 분류하기 어쭙잖아 뺐지만, 성장판은 닫혔으되 철은 아직 덜 들었던 두 사람(소설 속 주인공과 나)에 있어서는 그 시대의 아픔이 필시 오랫동안 간직되었을 터이다.  

     

    <삼풍백화점>은 주인공이 고등학교 시절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창 R을 학교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재회해 친교를 맺고, 이후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까지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따라서 성장소설이라 말하기는 분명 무리가 있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조금은 가난했던 친구 R(당시 삼풍백화점 판매직원이었던)이 보여준 풋풋함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백회점 붕괴 후 주인공이 신문사 전화기에 대고 외쳤던 절규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었다. 공교롭게 이상의 작품을 쓴 작가는 모두 여성인데, 아무래도 섬세함이 요구되는 성장소설과 같은 분야에 있어서는 남자 작가가 처리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중국인 거리>를 쓴 작가 오정희는 194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1955년 4월 농축산 관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충청남도 홍성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다시 소를 싣던 트럭을 타고 가족과 함께 인천의 해안 동네로 이사를 온다. <중국인 거리> 속의 주인공 '나'는 조금 달라 한국전쟁 중의 피난지로부터 해안 동네에 와닿는데, 그곳이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인 거리였다. '나'의 가족이 중국인 거리에 정착한 것은 경제적 여유가 없음에서 기인한 일로, '나'는 그곳에서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 혼혈아 등 다양한 인종들과 어울리며 성장한다.

     

     

    중국인 거리의 1960년대 사진
    현 차이나타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청·일 조계지 계단 / 1960년 사진
    지금의 청·일 조계지 계단
    계단을 올라가면 '나'의 돌아가신 할머니 유품을 묻은 '장군의 동상'이 나온다. / '나'는 할머니의 나이를 좆아 동상으로부터 65발자국 떨어진 곳에 땅을 팠다.

     

    어찌 보면 '나'의 공간은 모두가 약자인 공간이다. 그 속의 한국인은 다만 본토인이라는 것 뿐 이곳에 사는 중국인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는 군상(群像)이다. 하지만 <중국인 거리> 속의 한국인은 중국인들에 대해 거부와 차별의 태도를 보인다. 어른들이 그들을 그렇게 대하자 아이들도 중국인들을 ‘밀수업자', '아편쟁이', 심지어는 <수호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인육(人肉)으로 만두소를 채우는 인간백정' 쯤으로 취급한다. 반면 미국인(정확히는 미군)에 대해서는 저자세이고 동경의 대상이기까지 하니 '나'의 친구이자 양공주 매기언니의 친동생인 치옥은 장차 양공주가 되는 것이 꿈이다.  

     

    지금은 시대가 크게 달라져 중국의 위상이 다시 조선시대의 중국쯤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 속의 화교는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으로 분류되는 정치적 복합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본토 중국공산당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된다면, 그들 역시 조선시대의 중국인으로 돌아가 한국민에 대해 고압적 자세가 될 지 모른다. 세상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니, 지금 우리가 <중국인 거리> 속의 중국인처럼 하대(下待)하는 저 동남아인들도 언젠가는 역으로 한국인들을 무시하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구 1억의 젊은 베트남이 늙은 한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싸우는 데 바쁘니, 위에서 거론한 작가들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023년 국제도서전 홍보대사에 위촉됐던 오정희는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가담자라 하여 행사장에서 반대파들의 물리력에 의해 쫓겨나고,(본인은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치인의 비윤리적 행위를 지적했던 공지영은, "내가 고발한 것은 약자를 희생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드러난 것은 이 사회의 인종차별적 여혐”이라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테러들에 신고하는 사람 하나 없다. 인도의 한 버스 안에서 윤간 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같은 현실이 우리 사회의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차이나타운의 청나라식 건물 / 2층의 긴 목조 발코니와 기둥 사이를 스팬드럴 장식으로 처리한 콜로니풍 건물이다.
    인천 화교소학교가 있던 자리 (앞 소공원 자리)
    1902년 개교를 표시한 바닥의 기념 동판 / <중국인 거리> 속에 나오는 '나'의 집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화교소학교는 이 자리를 말한 것일까?
    옛 대불호텔이던 중화루 건물 / 1887년 신축 개장한 대불호텔은 이후 28년 만에 중국인에게 매각되고 1915년부터는 중화루(中華樓)라는 이름의 중국 음식점으로 재탄생했다.
    중화루 간판 장식물 / 인천시립박물관
    중화루는 공화춘, 동흥루와 더불어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화요리점이었다.
    2011년 복원된 대불호텔 / 이후 중화루는 1960년대 청관거리가 쇠퇴하며 경영난을 겪다가 1970년대 초 폐업했다. 이후 1978년 철거되며 건물 자체가 사라졌으나 2천년대 재개발 과정에서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며 복원이 이루어졌다.
    대불호텔 쪽 거리에는 일본 제1은행이 있었고,
    대불호텔 맞은 편으로는 일본식 2층 건물들이 즐비했는데,
    그중 하나인 2층 목조건물에 오정희 가족이 살았다. 사진 오른쪽 중국집 '복림원' 자리에 있던 건물의 2층이다.
    나가야(長屋)로 불리던 뒷 블록 관동 2가의 주택들에서는 아직도 옛 모습이 묻어난다.
    반대쪽에서 찍은 사진
    오정희는 답동 신흥초등학교를 다녔다.
    곧 사라질 듯 보이는 중국인 거리의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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