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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리가 살았던 인천 금곡동 동네와 헌책방 거리
    작가의 고향 2023. 11. 7. 22:14

     
     

    소설가 박경리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인천의 주안염전부터 먼저 언급해야 될 것 같다. 밑도 끝도 없이 말하자면 주안염전은 서해안 최초의 염전이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염이 생산된 곳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 되지 못한 이유는 이미 부산에 분개염전을 비롯한 염전이 있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곳은 천일염이 아니라 바닷물을 끓여 만든 이른바 자염(煮鹽)을 생산하던 곳으로, 분개염전의 분(盆)자 자체가 바닷물을 끓이는 가마를 뜻했다.
     
    부산에서 생산되는 자염은 가공이 힘들고 생산비용이 높았다. 따라서 생산량이 적어 수요를 충족하기 힘들었는데, 이에 개화기 무렵에는 중국인들이 자국의 암염(巖鹽)을 들여와 널리 유통시켰다. 암염은 석탄처럼 채굴을 하는 (혹간 노천광도 있지만) 소금으로 중국과 유럽 대다수의 나라는 거의가 암염을 소금으로 썼다. 그러다 일본이 타이완을 병합하며 그곳 원주민의 천일염 기술을 들여왔고, 그 기술을 최초로 접목시킨 곳이 인천의 주안염전이었다. 

      
     

    부평구 십정1동 주안염전 표지석 / 한국 최초로 천일염이 생산된 곳으로 과거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인천in 사진)

     

    소금밭(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인 후 그것을 증발시켜 얻은 천일염은 오랫동안 자염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천일염은 우선 순도가 높았는데, 이는 염화나트륨 성분이 높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자염에 비해 맛이 짯고 흰빛의 자염과 달리 염전의 개흙이 붙어 칙칙한 검은색을 띠었다. 이에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거부감이 일었고, 또한 천일염의 결정체가 커서 소금을 분쇄·정제하는 과정을 거처야 했다. (분쇄기를 거친 소금은 값이 조금 더 나갔다)

     

    하지만 순도가 높은 것이 단점일 수는 없었으니 인천소금의 소비는 곧 중국상인의 소금을 넘어섰고, 이에 1907년 부천 십정동에 시험염전이 만들어진 이래 1909년부터 1919년까지 주안 일대에 대규모 염전이 조성됐다. 넓은 갯벌에 밀물과 썰물이 있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이 지역은 천일염 생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으니, 주안의 소금은 전국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했고 이를 실어 나르기 위한 수인선 열차까지 만들어졌다. 주안염전은 해방 후에도 줄곧 존속하다가 소금 가격이 하락하고 국토개발이 진행된 1968년 폐전(廢田)되었다.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의 수인선 협궤열차

     

    해방 후에는 전매청에서 담배·인삼과 함께 주안의 소금을 관리했는데,(1963년 '염관리법'에 의해 소금 전매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오늘 말하려는 박경리 선생의 남편이 바로 전매청 인천지소에서 근무했다. 전매청 인천지소는 중구 항동 4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인천곡물협회 건물에 있었고, 선생의 집은 동구 금곡동 59번지 일대의 주안염전사택이었다. 선생이 이곳에 온 시기는 1948년으로, 전매청 인천지부의 간부로 부임한 남편 김행도를 따라서였다.  

     
     

    전매청 인천지소가 있던 곳에는 인천일보가 들어섰다. / 인천 중구청 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선생은 약 2년간 인천 금곡동에서 살며 우각로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 어쩌면 배다리 헌책방 1세대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는데, 남편이 간부이기는 하나 공무원의 박봉에 좀 더 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듯하다. 물론 그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선행되었을 터, 이때 읽은 다양한 분야의 책과, 손님으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훗날 <토지>의 토양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앞서 '배다리 우각로 문화역사기행'에서도 한 바 있다. 
     
     

    젊은 시절의 박경리(1926~2008) / 사색에 잠겨 있는 그를 누군가 창 밖에서 찍었다.
    1949년 금곡동 때의 가족사진 /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친정엄마임. (토지문화재단 자료)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들이 흔했고 그것들은 모두 고물상으로 넘어왔다. 따님인 김영주 씨의 말에 따르면, 선생은 고물상에서 책을 관으로 무게 달아 사와 그것들을 분류해 팔았는데 그 과정에서 희귀한 책이 발견되면 밤새워 읽곤 했다고 한다. 김영주 씨가 하동 '토지문학관' 관장일 때의 회고담이다. 그는 작년에 타계한 고(故) 김지하 시인의 아내로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쫓겨 다닐 때 만나 결혼을 했다. 김지하는 여러 가지 일로 장모인 박경리 선생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사위다. 
     
    하지만 남편인 김행도보다는 덜했다. 김행도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에 경도됐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전에 붙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이후 선생은 옥바라지를 위해 1949년 말 서울로 와야 했는데 김행도는 한국전쟁 중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김행도는 1942년 일본 고강공예학교 재학 중 반일운동을 벌인 죄로 징역 2년 집행유행 5년 형을 받고  투옥된 사실을 뒤늦게 인정받아 지난 2020년 독립유공자 포상이 이루어졌다)
     
    선생은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돼 다시 당시 3살이었던 아들마저 병으로 잃었다. 선생은 이때 담배를 배웠다고 했는데 죽을 때까지 끊지 못했다. 그만큼 삶이 힘들었다는 이야기일 터, 살아생전 본인 육성으로, 인천 배다리에서의 2년이 자신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선생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정말로 그랬을 것 같다. 신혼집이었던 금곡동 59번지의 주안염전 한옥 사택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나 그 바로 앞에 당시도 있었을 법한, 흡사 그림책 속에서 나온 듯 보이는 집 한 채가 비탈을 붙들고 서 있다. 
     
     

    개항로 배다리 삼거리에서 우각로 방향으로 접어들어
    요즘 보기 드문 석유가게와
    이처럼 아기자기한 길을 지나면
    금창동 '걷고 싶은 길'을 만난다.
    이 '걷고 싶은 길'을 걸어
    금곡동 인천산업정보학교 고개를 넘으면
    거짓말처럼 이 집이 나타난다.
    금곡동 59번지는 지번 자체가 사라졌고 60번지의 이 가옥은 온전히 남았다.
    다시 우각로 조흥상회 건물 쪽으로 나왔다. 1940년대 지어진 이 건물부터 헌책방이 시작되는데,
    그 앞에서 전에 못봤던 '배다리 공공우물터' 동판을 발견했다.
    조흥상회 건물에 있던
    책방 '나비 날다'는 최근 안타깝게도 폐업했지만,
    대창서림,
    집현전,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 길에
    헌책방 40~50개가 늘어섰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위의 책방들이 전부다.
    그래도그 명성 덕분에 이 길은 '배다리 시(詩)가 있는 작은 책 길'이 되었으니
    책방 중간에 있는 목공소의 문에도 시가 걸려 있다. 고(故) 고정희 시인( (1948~1991)의 '쓸씀함이 따뜻함에게' 라는 시다. 뜻깊게도 <아름다운 사람 하나>와 <초혼제> 두 권의 시집이 작년에 복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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