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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인의 '젊은 그들'과 그가 죽은 하왕십리 집
    작가의 고향 2024. 2. 9. 18:27

     
    설 연휴 첫날, 빌려온 <젊은 그들>을 읽었다. 춘사(春史) 김동인의 첫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김동인은 신문의 연재소설이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혐오했는데, 그러함에도 신문사에 원고를 꼬박꼬박 건넨 것은 그만큼 돈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은 선친이 물려준 수십 억 원의 현금을 주색잡기로 탕진하고 전답을 담보로 얻은 돈으로 투자한 평양 보통강 수리사업에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춘사(春史) 김동인(金東仁, 1900~1951)

     
    1900년 10월 2일 평양시 서문동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이 자랐다. 게다가 얼굴도 잘 생기고 일본 유학물을 먹어 유식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놀기도 잘 놀았다. 글도 잘 썼으며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사업에는 재주가 없었던 듯, 보통강 수리사업의 투자 실패로 집안의 전재산을 탕진했다. 보통강은 대동강과 함께 평양시내를 흐르는 큰 강으로 대동강과 달리 수심이 낮고 유속이 느렸다. 이에 장마철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늘자 민간업자에게  수리사업을 맡겼던 것이지만 그는 결국 동업자에게 돈만 뜯기었다. 
     
     

    짓다 만 유경호텔이 보이는 지금의 보통강

     
    이후 마누라까지 일본으로 도망갔는데,(참고로 부인은 한국인이다) 집안이 몰락해서가 아니라 남편 춘사의 방탕끼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사업이 파탄 난 후에도 춘사는 늘 최고급 옷만 찾았고 경마·마작 등의 놀음을 멈추지 않았으며 여전히 명월관 등의 요정을 찾아 기생들을 끼고 놀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처럼 해외여행을 펑펑 다니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일본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하였고, 담배 1갑을 사기 위해 신의주에서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대교 너머 안동(지금의 단동시)까지 다녀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석꾼의 아들 19살 김동인이 돈을 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 창간호 / 주요한의 시 '불노리',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등이 실렸다.


    춘사는 그렇게 빈털털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아직도 남은 무엇이 있었으니 바로 글 쓰는 재주였다. 이후 서울로 온 그는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김연실전>과 같은 긴 호흡의 글을 쏟아냈는데, 이는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친 듯 소설을 쓴 토스토예프스키와 흡사하다. 나도 '젊은 그들'일 때 그것들을 모두 읽었지만 <운현궁의 봄>과 <김연실전>을 너무 재미있게 보아서일까, <젊은 그들>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에 오늘 꼬박 그 소설을  읽어 본 것인데, 춘사는 확실히 글재주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다. 


     

    운현궁 이로당
    운현궁의 봄 / 김동인은 파락호 이하응이 질곡에서 벗어나 마침내 대원군(왕의 아버지)에 이르는 과정을 소설 '운현궁의 봄'에 실감나게 그렸다. 시종 긴박감을 선사하는 내용으로부터 김동인의 천재성이 절로 인정되는 그 소설의 대미는 운현궁에 봄이 찾아왔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리고 다음의 한 줄을 덧붙였다. "그 봄은 오랫동안 쓸쓸하던 만큼, 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 (예전 운현궁에 놀러왔던 외국 처자를 찍은 사진이다)

     
    <젊은 그들>에 대해 춘사는 역사소설이라 부르지 않고 통속소설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대원군이나 민겸호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공의 인물들임에도 기인했겠지만, 실은 흔한 일본 닌자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구한말로 옮겨와 윤색한 데 대한 자기고백과 같은 것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의 앞뒤 1년으로, 민씨 척족들의 전횡 및 임오군란으로 인한 대원군의 재집권과 청나라로 붙잡혀 간 직후까지의 일을 그렸다.
     
    이야기는 복돌이라는 머슴으로 위장한 남장여인 이인화가 어영대장 민겸호의 집에 민씨 일파의 정보를 탐지하러 잠입했다가 식객인 최 진사에게 발각되는 것으로써 시작된다. 이인화는 민씨 척족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고 몰락한 대원군파 이활민의 여식으로, 이활민이 권토중래를 노려 키우고 있는 명문집 자제 20명과 뜻을 같이 하는 관계이다. 하지만 '젊은 그들'은 그가 여자임을 모르고 오직 안재영이라는 양반가의 자식만이 그 사실을 아는데.....
     
     

    평창동의 별기군 훈련소터 표석 / 임오군란은 구한말의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대한 우대와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에 항거, 훈련도감 등의 구식군인이 주축이 돼 일으킨 반란이다.
    별기군과 민겸호로 보이는 인물 / 민겸호는 훈련도감 구식군인들에게 타살되었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고 KBS에서도 연속극으로 각색해 내보낸 적이 있을 만큼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하다. 그리고 춘사는 대원군이라는 인물이 행한 개혁정치에 대해 꽤 애정을 가진 듯 보이고, 작가 그 자신도 개혁의 의지를 품었던 듯 보이지만, 결국은 거대한 외세(外勢) 일본을 극복하지 못하고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다.

     

    영화 '젊은 그들' 포스터 / 건국대학교 박물관
    조선일보 학예부장 무렵의 김동인 / 독선적 성격으로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김동인은 결국 편집국장 주요한과 충돌하며 40일만에 퇴사했다.

     
    춘사 김동인의 친일에 대한 마지막 에피소드는 슬프기까지 하니, 적극적 친일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새로 구성한 친일작가단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아베는, 조금 있으면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을 텐데 이자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을 것이다. 춘사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은 그날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전파를 탔다.
     
    해방 후 춘사는 술로 인한 중풍으로써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어 49살 때인 1949년에는 정신질환까지 앓았으며, 6.25 때는몸이 불편해 피난도 못가고 그저 하왕십리 집에서 병앓이를 했다. 그는 인민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춘원 이광수와 달리 납북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데려가지도 못할 지경이지 않았나 싶다. 춘사는 1951년 초 하왕십리 집 차가운 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1.4후퇴 후 서울로 돌아온 가족들에 의해 집 인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공식 기일로 알려진 1월 5일은 가족들이 사망신고 때 적은 추정 시기일 뿐 정확한 날짜는 아니다.  
     
     

    김동인이 죽은 서울 성동구 홍익동 353번지 집에는 이후 3층건물이 들어섰고 1층에는 숯불갈비 식당이 있었으나 최근 이렇게 바뀌었다.
    김동인이 살던 곳이라는 표석 하나 쯤 세워졌으면 한다.
    바로 뒤에 거짓말처럼 구옥이 하나 있다. 김동인은 필시 이와 같은 집에 살았을 것이다.
    근방에 다른 구옥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 그래서 위의 집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김동인이 살던 집은
    이와 같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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