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때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독파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워낙에 글발 좋은 벽초인지라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소설이긴 하지만 볼륨 자체가 장난 아닌 까닭이다. 국내의 유일한 완간본인 사계절출판사의 <임꺽정>은 지난 2005년 북한과 저작권 회담을 열고, 벽초의 손자인 북한작가 홍석중씨와 <임꺽정>의 저작권에 대한 정식 계약을 체결한후 출간된 10권 1질의 책이다.
출판사가 북한측과 출판 계약을 체결한 이유는 홍명희가 월북해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기 때문으로, 손자 홍석중은 당연히 북한에서 출생했다. 그 아비 홍기문은 홍명희보다도 앞선 1947년 월북하여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사회과학원 부원장 등 주로 학계 쪽에 머무르다 1984년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남한사람들 앞에 이름을 드러낸 적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력 영웅' 칭호와 국가1급훈장을 받았다고도 한다.
1888년 충청도 일도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홍명희는 1948년 월북해 81세의 천수를 누리다 1968년 세상을 떠났다.홍명희는 월북 후 북한정부의 초대 부수상에 올랐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위원(총 6명), 북한 과학원 초대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1961년까지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월북 정치가들, 임화·이태준을 비롯한 월북 문학가들이 대부분 숙청되어 비참한 삶을 영위하다 죽었다는 얘기를 앞서 몇 번에 걸쳐 이야기 한 바 있다. 반면 홍명희는 위처럼 승승장구하다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뜻밖에도 진실은 추악하니, 왕조시대에 제 딸을 임금에게 바쳐 출세한 신하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하 박갑동과 김덕홍의 증언)
홍명희는 1948년 부수상에 선임되자 크게 감격하여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의 관저에 비서 겸 가정부로 들여보냈다. 홍명희는 해방 전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중도좌파 정도의 정치색을 가졌을 뿐 빨갱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1946년 봄부터 간첩들에 포섭되어 1946년 3월말과 8월, 몰래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후 남한에서 좌익활동을 하다 여의치 않자 1948년 월북했다. 즉 북한 공산정권 수립에 큰 역할을 하지 않은 인물임에도 부수상에 임명되었던 바, 크게 감격할 만도 했다.
이중 첫째 딸 홍귀원은 김성애의 비서로 배속되어 일했는데 김일성과의 간통으로 임신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 홍명희에 대한 면구함에 시름시름 앓다가 아이를 낳은 후 바로 죽고 말았다. 이어 1949년 9월 본부인인 김정숙이 죽었고, 김일성은 1950년 1월 15일 홍명희의 둘째 딸 홍영숙과 재혼하였다. (첫째와 둘째는 1921년생 쌍둥이다) 이에 홍명희의 앞길에 탄탄대로가 깔리게 된 것이다.
해방 전 벽초 홍명희는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과 더불어 '조선 의 3대 천재'로 불릴 만큼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들은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이중 홍명희만 유일하게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다. 1910년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한일합방의 충격으로 자살하면서 자식들에게 "친일을 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 (반면 홍범식의 부친중추원 찬의 홍승목은 친일했다) 홍명희는 아비의 죽음에 일본유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하였고 이후로 일본이라면 치를 떨었다. 홍명희는 1919년 3·1운동 때에는 괴산지역 시위운동을 주동했다. 이로 인해 동생 홍성희와 함께 청주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6개월 복역 후 풀려났는데, 이후 서울로 올라와 글을 쓰다 1924년 5월 동아일보사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신문사를 그만 두고 정주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민족운동을 펼쳤다. 오산학교의 설립자는 남강 이승훈이며 조만식, 함석헌, 김억 등의 민족정신 투철한 선생들의 지도 하에 김소월 ,백석,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인 김홍일 장군 등이 배출됐다. 화가 이중섭도 이 학교 출신이다.
홍명희는 자신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1927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서울로 왔다. 그리고 1927년 2월 좌우합작의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해 민족운동을 이끌었는데, 신간회라는 명칭도 홍명희가 붙였다. "죽은 나무에서 새 가지가 돋는다"(新幹出枯木)는 취지였다. 신간회의 초대 회장은 월남 이상재가 맡았으며, 전국에 120~150개 지회를 두고 회원수가 4만 명에 육박하던 전국 최대규모의 민족운동 단체였다.
홍명희는 신간회 운동에 몰두하며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졌는데, 이에 호구지책으로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소설 <임꺽정>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임꺽정은 실록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조선 명종 때의 도적 두목으로, 그를 토벌하러 나선 관군과도 싸워 이긴 명화적(名火賊)이다. 홍명희는 그 유명세를 빌려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던 바, 그 도적에 처음부터 애정을 담았다. 그 도적의 이름은 '임거정'(林巨正)이다. 하지만 홍명희는 그에게 '임꺽정'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임꺽정의 부모가 그를 낳고 백정의 아들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워 "걱정아, 걱정아"라고 부르던 것이 '꺽정'이 되었다는 설명이다.(<임꺽정전> 피장편·皮匠篇) 이후 관가에서 맞아죽은 제 아비의 복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 나라에 맞서니,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민중들에게 나눠주거나 때로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사또를 노려 관아를 공격하기도 한다. 조선조 내내, 그리고 일제강점기까지 눌려 눌려 살았던 민중들에게 이와 같은 스토리는 단박에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조선일보의 판매부수를 끌어올리며 오랜 기간 연재됐으나 건강과 시국 사건에 쫓기고, 중간 중간 투옥도 되는 바람에 끝내 완결하지 못했다. 해방 후 남북분단을 염려한 그는 1948년 김구·김규식·조소앙·이극로·박헌영·김원봉 등과 함께 북으로 가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홍명희는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낭독했고, 이극로는 '3000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읽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으로 내려오지 않고 이극로·박헌영·김원봉 등과 함께 북에 남아 정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통일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남침에 앞장을 섰다. 까닭에 2002년 충청북도와 괴산군이 홍명희의 생가를 매입해 복원시킨 후에도 홍명희의 이름은 빠진 채 아비의 이름을 빌어 '일완 홍범식 고택'이란 명칭으로 충북도민속자료(14호)로 지정했다. 이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북한정권 수립과 남침에 앞장 선 자의 생가를 기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지금은 "괴산에 홍명희는 없고 임꺽정만 남았다"며 탄식 비슷한 것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임꺽정은 백주대낮에도 약탈과 살인을 일삼고 때로는 관아를 습격하기도 했던 그저 간이 큰 나쁜놈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임꺽정은 정말로 오간수문으로 탈출했을까?'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절로 그 척족들이 백성들에게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는 윤원형이나 윤임 같은 자들로서,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관(官)을 공격하기도 했던 임꺽정을 영웅시하여 몇 가지 과장된 전설이 구전되었던 것인데, -예를 들면, 관군의 공격에 철원 막다른 절벽에 이른 임꺽정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물고기가 되어 도망갔는데, 이후로 그 물고기를 '꺽지'라고 부른다는 것 등의- 이를 홍명희가 본격적인 의적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소설이니 역사 왜곡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됐든 사실이 왜곡된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