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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사산비명과 좌절된 개혁작가의 고향 2024. 3. 15. 18:12
고운(孤雲) 최치원은 통일신라 헌안왕 1년(857년) 금성(경주시) 사량부에서 6두품 최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그는 6년 만에 당의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관리의 적체가 심해 임용되지 못하다가 2년 후 남경 부근 율수현의 하급 관리로 발령난다. 만족하지 못한 최치원은 사직하고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의 응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운이 없었으니 875년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시험이 취소된다. 막연해진 그는 난의 진압에 나선 회남절도사 고병(高駢)의 막하로 들어가 진압 격문인 '토 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는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바로그 격문이다. 사실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나, 뛰어난 문장력이 부풀려져 그와 같은 소문이 만들어진 듯하다.
이후 최치원은 차츰 이름이 알려지니 승무랑 시어사(承務郞侍御史)라는 고위 관직에 오르고 황제인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 5품 이상의 관료가 관복에 차던 붕어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신라인으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28세인 885년 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추천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된 그는 유명 사찰 및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니, 이때 그가 지은 것이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이다. 헌강왕의 명으로 4개 사찰에 봉정된 이 비명(碑名)들은 그의 웅혼한 필력을 느끼게 함은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월등히 앞서는 사료로도 가치가 높다. 이 사산비명 중 쌍계사 진감선사비와 경주 대숭복사비명은 그가 직접 글씨를 쓴 것이기도 하다.
사산비명은
1. 경상남도 하동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962년 국보 지정)
2.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의 초월산 대숭복사비
3.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 터의 낭혜화상탑비(1962년 국보 지정)
4. 경상북도 문경시 봉암사 지증대사탑비(2010년 국보 지정)
를 가리키며, 위의 4개 중 경주의 왕실 원찰(願刹) 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초월산 대숭복사비 비명을 제외한 나머지 3개는 당대의 유명 세 선사(禪師)의 일생과 업적을 기술한 비(碑)이다. 그 3개의 비는 양질의 오석(烏石)에 새긴 까닭에 지금도 거의 온전히 남아 있으나 화강석에 새긴 숭복사 창건비는 산산이 조각나 지금은 비편(碑片)만 전하는데, 앞서 말했듯 이 비는 최치원의 친필 비석이라 더욱 아쉬움이 크다.
신라 49대왕 헌강왕은 학문과 상업을 장려한 중흥군주로 헌강왕 때 지어진 향가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은 멀리 소그드국(國)에서 사업하러 왔다가 신라에 눌러앉은 귀화인이었다. 당시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등에서 온 서역인이 적지 않았으니 원성왕릉·흥덕왕릉 등에서는 신라에서 출세한 그들 외국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헌강왕은 최치원이 귀국한 지 1년 4개월만인 886년 7월 승하했고, 이후 최치원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직을 전전하게 된다.
그는 이때 웅주 태산군(전북 정읍)과 부성군(충남 서산)의 태수를 지냈는데, 이 무렵 신라의 민심이 왕으로부터 이반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50대 정강왕에 이어 즉위한 진성여왕 재위 무렵에는 백성들이 극도로 궁핍·횡포해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발호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당시 천령군(경남 함양) 태수 시절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시국에 즈음한 10여 조의 행정개혁안)를 바치고, 6두품의 최 고위직인 아찬(阿飡)에 올라 시정 개혁을 추진한다.
하지만 무능한 진성여왕이 스스로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며 최치원의 지위는 흔들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도 진성여왕의 '양위표(讓位表)'와 효공왕의 즉위에 대한 '사사위표(謝嗣位表)'를 당나라 황실에 보내 신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는 등 자신의 모든 힘을 경주했다. 그러나 당대는 당나라 역시 기울어가는 지경이었던 바, 신라에 관심을 둘 형편이 못 되었다. 반면 신라의 부패한 진골 귀족들은 더욱 득세하며 최치원을 옥죄었다.
최치원은 결국 개혁을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과거 국어 교과서에 실려던 그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은 우리가 배운 바처럼 당나라에서 고향을 그리워 해 지은 시라는 해석과 달리 이 즈음의 심경을 읊은 시일 가능성이 짙다. 한마디로 괜히 들어왔다는 막심한 후회감을 읊은 것이다. 다시 풀어보자면 이렇다.
쓸쓸한 가을바람 부는데 어디선가 애닲은 노래 들리네
옛 말에 지음지우(知音之友)라 하였거늘 세상에 그 소리 이해하는 자 드물어.
깊은 밤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는 예전 같은데
등불 아래의 마음은 만리 밖에 있네.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같은 관점으로서 주목한 <'秋夜雨中'의 창작시기 再考>라는 논문을 보면 (by 단국대학교 이황진) 더욱 명확하다.
<추야우중>은 역대로 최치원의 시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온 최치원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근하고 익숙한 한국 한시이기도 하다. 본고는 최치원의 대표작인 <추야우중>의 창작시기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논의를 토대로 그 근거와 논리를 보충하여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즉, 최치원의 생애고찰, 최치원의 향수시와의 비교, 시어의 재해석 측면에서 <추야우중>의 창작시기를 밝혀보았다.
먼저 최치원의 생애를 살펴보며 이 시를 어느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한지를 분석하였는데, <추야우중>은 최치원이 은거를 결정하기 전 즈음의 상황과 정조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최치원의 향수시를 분석하며 이들이 <추야우중>의 시적 분위기와 정조 그리고 시어 측면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추야우중>이 향수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야우중>의 시어를 재해석하였다. 보통 재당시절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보는 근거가 되어왔던 ‘만리’의 분석을 통해 ‘만리’가 신라가 아닌 당을 의미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추야우중>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이후에 창작한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는 현실 속의 좌절과 조국의 운명에 대한 근심 그리고 통치계급에 대한 증오 등의 감정들이 교차하던 시기, 즉 은거를 결심하기 전 즈음에 창작된 것으로 자신이 당에 머물던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입산에 앞서 남해 바다를 지나다가 주변 경관이 매우 빼어난 바닷가를 발견하고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각자한 후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부산 동백섬 남쪽 바위에 새겨 있는 '해운대'라는 글자가 그것으로, 이로 인해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50세인 908년까지는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후 어디서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900년은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해이고 908년은 궁예가 마진국을 다스리며 세력을 떨치던 해이다. 신라는 10년 후인 918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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