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허난설헌의 예를 보면 조선시대에 문재(文才)를 누리려면 차라리 기녀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 법 싶다. 물론 규방문학이라는 게 있기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방 안에 머물렀다. 그래서 안타깝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조침문'(弔針文)이라는 고전 수필을 보더라도 이 여인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지만 작자의 이름은 물론 인적사항도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확인되는 것은 이 여인이 바늘 하나에 의지해 27년 동안 삯바느질을 해온 과부라는 것뿐이다.
'조침문'의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이 여인은 자신이 아끼던 바늘이 부러지자 "모년 모월 모일 미망인 모씨가 두어 자(字)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하노라"로 시작되는 조문(弔文) 형식의 글을 지어 부러진 침자(바늘)를 애도하는데, 비장하고 슬프기가 이를 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여인은 그 침자로써 27년간 생업을 이었다. 당시에 재봉틀이 있었을 리 만무한즉 이 여인은 오직 바늘 하나에 의지해 옷을 지었겠는데, 그것이 그만 부러지고 말았으니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바늘은 필시 중국산 바늘, 구체적으로는 방균점(邦均店)묘가(妙哥)나 유가(劉哥)의 바늘이었을 것이다. 당시 연행길의 역관들은 앞다투어 질 좋은방균점의 바늘을 사들였으니, 이는 <연행록(燕行錄)> 같은 중국 방문 기록에 수없이 나온다.
"(연행길에) 백가점(白家店)을 지나 방균점(邦均店)에서 아침을 먹었다. 성은 고려포(高麗浦)와 같지만 시장과 여염의 번성함, 누로(樓櫓)의 웅장함이 현·읍(縣邑)보다 못하지 않았다. 거주하는 백성 모두 바늘(針)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바늘의 정교하고 예리함이 중국 최고다." "이 방균점에 옛 성터가 있고 성안에 거리와 문루(門樓)가 있었다. 또 바늘 가게가 있어, 일행이 모두 여기서 바늘을 샀다. 옛적에 이채(李彩)의 바늘이 원근에 유명했으나 벌써 죽었고, 지금은 묘침(苗針)이라 불리는 방균점 묘가(苗哥)의 바늘이 유명하다."
"방균점 50리를 가서 유씨(劉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잤다. 이 가게는 강철 바늘을 전업으로 만드는데 일행들이 많은 값을 주고 바늘을 샀다. 이 날은 거의 백 리를 갔다."
몇 해 전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가 강연에서 "당시 조선은 바늘·철사 등을 못 만들었고 따라서 석쇠라는 조리 기구도 없었다"라고 한 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아마도 만들기는 만들었겠으되 강철 바늘은 생산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래 박제가와 이가환의 글로서 알 수 있다.
"연경 시장에서 들여온 칼과 가위는 한번 부서지면 다시 벼릴 수 없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는데, 이는 석탄으로 벼려 제련한 것이라서 그렇다. 석탄으로 제련한 쇠는 숯으로는 다시 제련할 수 없다. 단천과 양근에서 석탄이 난다고 하니 석탄을 도입해 농기구나 수레바퀴를 제조할 때 사용해야 한다."
"청나라는 쇠를 석탄을 사용해 제련한다. 석탄은 화력이 세서 단단한 쇠도 제련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병기(兵器)와 농기는 우리보다 곱절이나 견고하고 예리하다. 중국에서 사 온 기구가 손상되더라도 숯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단련하지 못한다."
"석탄이라는 것은 값이 싸고 용도가 넓으며, 중국과 서양의 나라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용품을 만들고 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석탄은 평양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하늘과 땅이 우리의 종사(宗社)와 백성들을 도와주고 있는 복이라 할 것이다. 이름은 탄(炭)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용 가치는 금은 주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면 지금은 180도 역전된 듯하니 얼마 전 싼 맛에 무더기 쇼핑한 '테무' 상품 중 중국산 바늘은 곧바로 휘어져, 그 형편없음에 놀랐다. 그런데 이야기가 옆길로 너무 샌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 매창(梅窓, 1573~1610)을 얘기하자면 그녀는 임진왜란 시기에 부안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녀이자 시인이다. 그녀는 허균, 유희경(劉希慶, 1545~1636), 이귀(李貴, 1557~1633) 등 당대 명사들과의 깊은 교류로도 유명하니 허균은 매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3일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흥달이 인사를 왔다. 창기 계생(癸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썩 미인은 아니었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아야기를 나눌만하였으니,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 계생은 매창의 이름으로 동음자인 계생(桂生)이나 계랑(桂娘)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릴 적 이름은 향금(香今)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창은 자호(自號), 자(字)는 천향(天香)이다. 섬초(蟾初)라는 호도 쓰기도 했다. 부친은 부안의 향리(鄕吏)인 이양종(李陽從)이며, 모친은 관기(官妓)로서 노비종모제(奴婢從母制)에 따라 관비 혹은 관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옥여는 이귀의 어릴 적 이름으로 당시 김제군수로 재직중이었다.
이후로도 허균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귀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라 평생을 문우(文友)로서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윗글은 허균의 시 비평집인 <성수시화(惺叟詩話)>에 실린 것으로, 이 책에는 유희경에 관한 글도 있다.
유희경의 자(字)는 천례(賤隷)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받들고 효성으로 주인을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아꼈다. 시작(詩作)에 매우 능숙하였으니, 젊었을 때 갈천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 임억령(林億齡) 의 별서 누각에 쓰인 '성'(星) 자에 차운해 "댓잎은 아침에 이슬을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竹葉朝傾露 松梢曉掛星)라고 읊자 양송천(梁松川, 영응정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촌은(村隱) 유희경은 당시로서는 드문 천인(賤人) 시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공모하고, 자원해 공을 세움으로써 면천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나아가 관직에도 진출했다. 그런데 그는 천민일 때도 글로써 유명했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봄, 48세의 나이로 남도를 여행하다가 부안에 들러 매창을 찾았을 때, 매창이 "유(劉)와 백(白) 중 누구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당시 천민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이었는데, 유희경이 매창을 알고 있었던 것은 그럴 수 있는 노릇이지만 매창도 유희경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은 조금 놀랍다. 유희경은 그 정도로 유명인사였던 것 같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고, 매창을 본 유희경은 자신의 무기인 글로 바로 수작을 걸었다. 이른바 '매창에게 주는 시'(贈癸娘) 1편이다.
일찍이 남쪽 계랑의 이름을 들었도다. 그대의 시와 노래가 한양을 흔들어댈 때였다. 그런데 오늘 그대의 진짜 얼굴을 보았노니 천상의 내려온 선녀가 아닌가 심히 의심되도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은 짧은 사이 깊은 사랑으로 발전하였는데, 두 사람이 헤어지며, 그리고 이후 전란(임진왜란) 중에 나눈 연시(戀詩)가 여러 편 전한다. 먼저 매창의 시 3수를 꼽아보았다.
한스러움 (自恨)
동풍이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매화와 함께 버들잎이 푸르르며 봄을 다투는구나.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잔 들어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일이지.
東風一夜雨 柳與梅爭春 對此最難堪 樽前惜別人
옛 사람 (故人) 소나무 잣나무처럼 굳은 약속한 날 가없다. 연정은 저 깊은 바다에 못지않은데, 강남 제비마저 날아들지 않으니 홀로 지새는 밤 더욱 서러워라.
松柏芳盟日 恩情與海深 江南靑鳥斷 中夜獨傷心
임 생각 (閨怨)
애끓는 情 말로는 다 할 길 없어 밤새워 머리칼을 半 너머 세었네요. 그대 생각 얼마나 했는가 알고 싶거든 가락지 안 맞는 여읜 이 손을 보세요.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鬢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圓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매창은 20세, 유희경은 48세로 28년의 차이가 났지만 그와 같은 나이 차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유희경과 매창은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다음은 유희경이 매창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길 가면서 계랑을 생각하노라 (送中憶癸娘)
이별한 아름다운 사람 계신 곳을 구름이 가로 막아 떠난 나그네 마음 아파 잠 못 드네. 제비마저 오지 않아 님 소식 끊어지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찬비 소리 차마 듣기 힘들구나.
一別佳人隔楚雲 客中心緖轉紛紛 靑鳥不來音信斷 碧梧凉雨不堪聞
계랑을 그리며 (懷桂娘) 계랑의 집은 바닷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한양 도성 입구에 있네. 서로가 그리워해도 볼 수 없는 신세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어지는 듯.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7년 전란에도 다행히 두 사람은 별 탈이 없었던 듯하다. 그것도 어쩌면 기적일 텐데, 전란 후 두 사람은 전주에서 기적적으로 상봉한다. (경위는 나와 있지 않다) 그것이 헤어진 후 15년이 흐른 뒤였으니, 아마도 서로는 변해버린 얼굴에 회한이 더욱 컸으리라 여겨진다. 두 사람은 약 열흘 정도 같이 있다 헤어졌다고 하는데, 서울로 돌아온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계량에게 부치는 시 (寄癸娘)
헤어진 후 다시 만날 기약 없어 그리운 마음에 꿈속에서 너의 연주를 듣는다. 언제 다시 동쪽 누각에 함께 올라 달을 볼까나 아. 그저 완산에서 취했던 시나 읊조릴 밖에. 別後重逢未有期 楚雲秦樹夢相思 何當共倚東樓月 却話完山醉賦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