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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항문학 시대를 연 시인 유희경과 도봉계곡작가의 고향 2024. 3. 19. 18:26
두 번째 다시 만난 그 열흘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생전에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속되게 이해하자면 그간 변해버린 외모에 상호 실망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村隱集)>을 보면 두 사람의 재회는 처음 만나고 나서 적어도 15년이 흐른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매창에게 20살 때의 아름다움이 남았을 리 만무하다. 매창보다 28살이 많았던 유희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빌려온 가정이지만 두 사람이 이렇듯 저급했을 리 없을 터, 그보다는 사회적 신분이 끝내 제약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로 볼 때 매창은 그때 현역에서 물러난 퇴기(退妓)였을 것이나 여전히 관비나 관기 신분이었을 터, 특별히 면천(免賤)되지 않는 한 유희경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모르긴 해도 유희경 또한 소실을 둘 처지는 아니었을 터이다.
매창은 재회가 있고 얼마 뒤인 36살에 죽어 자신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고 하는데, 부안 매창공원 안에 그의 묘가 있다. 그전에 동네 야산에 전설처럼 전해오던 무덤이 뒤늦게 지방자치단체의 지방문화 콘텐츠 살리기 사업에 편승돼 공원이 꾸며지고 묘역이 단장됐다. 다행스럽게도 봉분 외에 특별한 무엇은 없다. (하도 과장되게 꾸미기를 좋아하는 작금인지라) 아래의 두 편의 시는 그가 죽음에 앞서 읊은 것이라고 한다.
도원에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 거문고에 실어볼까
가락가락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結約桃園洞裏仙
豈知今日事悽然
坐懷暗恨五絃曲
萬意千思賦一篇
풍진 세상 고해에는 말썽도 많아
홀로 새는 이 밤이 몇 해인 듯 길구나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구름 속에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
塵世是非多苦海
深閨永夜苦如年
藍橋欲暮重回首
靑疊雲山隔眼前매창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희경은 추억을 더듬으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맨 아래의 '설중매'(雪中梅)는 그가 80세에 썼다고 알려진 시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 아가씨
홀연히 구름 따라간 곳이 묘연하나
꽃다운 혼은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에 묻어주리明眸皓齒翠眉娘
忽逐浮雲入杳茫
縱是芳魂歸浿色
誰將玉骨葬家鄕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
오로지 경대 남아 옛 향기 그윽하다
정미년간 다행히도 서로 만나 즐겼건만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깃을 적셔주네更無旅襯新交弔
只有粧奩舊日香
丁未年間辛相遇
不堪哀淚濕衣裳
그 누가 나를 찾아 사립문을 두드리는가
퇴락한 담장 위로 눈발만이 어지러이 날린다.
홀로 앉아 눈 속의 매화를 읊는 것이
이 늙은이가 삶을 부쳐 먹는 방법일세.
何人訪我叩柴扉
蘺落寥寥亂雪飛
獨對寒梅今詠足
老夫棲息此中宜
유희경은 매창보다 28살이 더 많았음에도 매창 사후 26년을 더 살다 92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는 그렇듯 장수한 덕으로 경로 우대 관직인 수직(壽職)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사후에는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살아생전에는 광해군 때의 인목왕후 폐모에 반대한 절의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었다.
유희경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송나라 주희가 완성한 예법)에 정통한 동강(東岡) 남언경에게서 상례(喪禮)를 배웠다. 그는 남언경 밑에서 향도(香徒, 상여꾼)로써 국상(國喪)과 사대부의 상을 도우며 관록을 쌓아갔다. 유희경은 그 지식과 경험으로써 <상례초(喪禮抄)>라는 상사(喪事)에 관한 책을 썼고, 마침내 상례에 관한 국내 최고의 예학자(禮學者)가 되어 국상까지 집례하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상(喪)이 어떻게 치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무덤도 전해오지 않는다. 그는 살아생전 창덕궁 요금문 밖에 있는 원동천(정독도서관 뒤편에서 발원, 계동과 안국동을 경유해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계류 곁, 침류대(枕流臺)라 이름 붙인 집에서 살며 당대의 문인들과 시사(詩社, 시모임)를 가졌는데, 아래의 '달빛 계곡'(月溪)은 그때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산에는 비 기운을 머금은 운무가 피어오르고
푸른 풀 우거진 호숫가에는 백로가 졸고 있다.
길로 접어드니 발 밑에 해당화가 지천인데
한번 발길질에 가지에 가득했던 향기가 눈처럼 떨어진다.
山含雨氣水生煙
靑草湖邊白鷺眠
路入海棠花下轉
滿枝香雪落揮鞭
아마도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린 듯한데, 그 내용이 훗날인 17세기말에 성립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전형이다. 위항(委巷)은 '구불구불한 골목'이란 뜻으로, 위항문학은 도시 저변에 살던 문인들이 시·시조·가사에 민간의 풍류를 담았던 형식이다. 까닭에 여염집 여(閭) 자를 써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서울 서촌에 살던 중인계급 사람들의 문학활동을 말한다.
유희경이 살던 때는 아직 위항문학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도봉서원이 있는 도봉동 계곡에서 그가 당대의 문인들과 회합했던 도봉시사(道峰詩社)를 위항문학의 시초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2012년 도봉구청에서 '도봉시사'를 근거로 매창과 유희경의 시비(詩碑)를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로 조형했다. 시비의 왼편에는 유희경의 한시 '회계랑(懷癸娘)'을 새겼고, (1편에서 소개함) 오른편에는 교과서에도 실린 매창의 유명한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를 대련(對聯)처럼 새겼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매창의 사망 소식을 들은 문우(文友) 허균은 '애계량'(哀桂娘, 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며)의 율시 두 수를 지어 애통해했는데, 그는 이후 1618년에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당해 죽는다.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친 듯하고
청아한 노랫소리는 구름을 멈추게 했네
복숭아 딴 죄로 인간세계에 귀양 왔다가
불사약을 훔친 듯 이승을 떠나네
부용 휘장 속의 등불은 어둑하고
비췻빛 치마엔 향기가 남았구나내년에 복사꽃이 활짝 피면
그 누가 설도(薛濤) 무덤 찾을까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
偸桃來下界
竊藥去人群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明年小桃發
誰過薛濤墳
처량타, 반희(班姬)가 부치던 부채
구슬퍼라, 탁문군(卓文君)이 타던 거문고여
날리는 꽃 속절없이 한만 쌓이고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한다
봉래섬의 구름은 자취도 없고
푸른 바다 달빛은 하마 잠기었도다
명년에 봄이 와도 소소소(蘇小小)의 집에는
시든 버들로도 그늘을 못 드리우리凄絶班姬扇
悲涼卓女琴
飄花空積恨
蓑蕙只傷心
蓬島雲無迹
滄溟月已沈
他年蘇小宅
殘柳不成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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