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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작가의 고향 2023. 12. 5. 21:06
계절적으로 만추인지 입동이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기이다. 어찌 됐든 찬바람은 불고 그로 인해 모두가 목을 웅크린 채 거리를 바삐 걸어간다. 그래서인지 별로 바쁠 것 없는 나도 덩달아 목을 터틀넥 셔츠에 최대한 밀착시키고 분주히 걷는데, 문득 길가 '솔바람소공원'의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끌리듯 들어간 그 소공원의 낙엽송은 의외로 아직 푸르다. 그래서 아직 가을임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나오는 길목에서 본 작은 연못은 이미 꽁꽁 얼어 겨울임을 실감케 해 준다. 앞서 보았던 낙엽송 아래의 벤치는 박인환의 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생각나게 하고, 또 옛 교과서에 실렸던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를 추억하게 했지만, 언 연못은 다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란 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시는 김현승이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 쓴 시로, 그는 이 한 편의 시에 실려 그야말로 혜성 같이 문단에 데뷔한다.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아침 해의 축복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크고 작은 유리창들이
순간의 영광답게 최후의 찬란답게 빛이 어리었음은
저기 저 찬 하늘과 추운 지평선 위에 붉은 해가 피를 뿌리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들의 황홀한 심사가 멀리 바라보이는
광활한 하늘과 대지와 더불어 황혼의 묵상을 모으는
곳에서
해는 날마다 그의 마지막 열정만을 세상에 붓는다 합니다.
여보세요. 저렇게 붉은 정열만은 아마 식을 날이 없겠지요.
아니 우랄산 골짜기에 쏟아뜨린 젊은 사내들의 피를 모으면 저만할까?
그렇지요. 동방으로 귀양 간 젊은이들의 정열의 회합이 있는 날
아! 저 하늘을 바라보세요.
황금창을 단 검은 기차가
어둡고 두려운 밤을 피하여 여명의 나라로 화살같이 달아납니다.
그늘진 산을 넘어와 광야의 시인-검은 까마귀가 서역을 지나간 후
어두움이 대지에 스며들기 전에
열차는 안전지대의 휘황한 메트로폴리스를 향하여
흑암이 절박한 북부의 설원을 탈출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보! 이날 저녁에도 또한 밤을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적막한 몇 가지 일을 남기고 해는 졌습니다그려!
참새는 소박한 깃을 찾고,
산속의 토끼는 털을 뽑아 둥지에 찬바람을 막고 있겠지요.
어찌 회색의 포플러인들 오월의 무성을 회상하지 않겠습니까?
불려 가는 바람과 나려오는 서리에 한평생 늙어 버린 전신주가
더욱 가늘고 뾰죽해질 때입니다.
저녁 배달부가 돌아다닐 때입니다.
여보세요.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허다한 사람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프레센트하는 우편물입니까?
해를 쫓아버린 검은 광풍이 눈보라를 날리며 개선행진을 하고 있읍니다그려!
불빛 어린 창마다 구슬피 흘러나오는 비련의 송가를 듣습니까?
쓸쓸한 저녁이 이를 때 이 땅의 거주민들이 부르는 유전의 노래입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여기는 동방
그러나 우렁차고 빛나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던 날
오직 한마디의 비가(悲歌)를 이 땅에 남기고 선인(先人)의 발자취가
어두움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 또한 내어버린 웃음 위에
표랑(漂浪)의 역사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쓰여져 왔다 합니다.
그러면 여보,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당신들!
쓸쓸한 저녁이 올 때 창밖에 안타까운 집시의 노래를
방송하기엔
-당신들의 열정은 너무도 크지 않습니까?
표랑(漂浪)의 역사를 그대로 흘려보내기엔
-당신들의 마음은 너무도 비분(悲憤)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오랫동안 차고 어두운 이 땅,
울분의 덩어리가 수천수백 강렬히 불타고 있었습니다그려!
마침내 비련의 감정을 발끝까지 찍어 버리고
금붕어 같은 삶의 기나긴 페이지 위에 검은 먹칠을 하고
하고서, 강하고 튼튼한 역사를 또다시 쌓아 올리고
캄캄하던 동방산 마루에 빛나는 해를 불쑥 올리려고
밤의 험로를 천리나 만리를 달려 나갈 젊은 당신들-
정서를 가진 이, 일만 사람이 쓸쓸하다는 겨울 저녁이 올 때
구슬픈 저녁을 더 더 장식하는 가냘픈 선율 끝에 매어 달린
곡조와
당신의 작은 깃을 찾는 가엾은 마음일랑 작은 산새에게 내어주고
선색(線色) 등잔 아래 붉은 회화를 그렇게 할 이웃에게 맡기고
여보! 당신들은 맹렬한 바람이 부는 추운 거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름 찬 당신들의 일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아일보>, 1934. 5. 25.
김현승은 1913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했으나 목사였던 부친의 목회 첫 부임지가 제주도였던 까닭에 6살 때까지 제주읍에서 살았다. 이후로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숭일초등학교를 다녔고 중고등학교 과정은 고향인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마쳤다. 졸업 후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리과 3학년 재학 중 중퇴했다. 당시 숭실학교의 전반적 분위기였던 신사참배 거부에 동참했다 중퇴까지 이어진 것으로, 숭실학교 역시 1938년 자진 폐교했다.
즈음하여 위의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을 발표하였고, 이어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 <묵상수제>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고통받는 식민지 민족의 비애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는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 문단의 저명한 인사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반면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으니 어릴 적 고향을 찾아 교편을 잡았던 광주 숭일학교에서도 역시 신사참배 거부에 동참하며 파면되었다.
김현승은 해방과 더불어 복직했다. 이어 1951년에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한국전쟁의 와중에 네 살 난 아들을 잃었다. 전쟁이 빚은 여러 가지 상황과 가난으로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낸 자식이었다. 그와 같은 아픔 위에 본인 역시 평생을 고질적인 위장병에 고통받았으니, 그의 시가 대체적으로 우울하고 무거운 이유는 필시 그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는 1960년 조선대문리과 학과장 직을 제의받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숭실대학교로 옮겼는데, 아마도 독실한 기독교신앙이 선택을 좌우했던 듯하다. 그는 1964년 숭실대학교 정교수가 되었고, 1975년 4월 강의를 마친 후 학내 채플에 참석했다 쓰러져 사망하였다. 사인은 고혈압이었으며, 향년 62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교과서에도 살렸던 그의 대표작 <가을의 기도>는 그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회고한 1957년에 쓰여졌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고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집 <김현승시초>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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