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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북작가 이태준의 고향 철원
    작가의 고향 2023. 10. 13. 20:53

     
    월북 작가 중 소설가 상허(常虛) 이태준은 시인 임화와 함께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케이스다. 사실 월북 작가 중에서 벽초 홍명희를 제외하고는 잘 된 경우가 드무니 거의가 말년이 안 좋았다. 그럼에도 이태준과  임화의 최후가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평소 사회주의를 동경해 활동했고, 그래서 해방 후 자진 월북해 사회주의 조선의 품에 안긴 특별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시에서 특출난 재주를 보였던 두 사람은 해방 후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섰고, 김남천·이원조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태준은 1946년에, 임화는 1947년에 각각 월북했지만 이태준은 사상성의 꼬투리를 잡혀 평양에서 쫓겨나 해주로 갔고, 다시 1974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임화는 1953년 김일성이 남로당계 인사들을 숙청할 때 미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후 두 사람은 1988년 7월 19일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 작가 인명에서 지워졌으며, 북한에서도 버려졌다. 즉 최승희나 한설야처럼 사후 복권된 예술가도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은 영원히 버림받았다. 이태준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고향인 철원 사람들에게조차 경원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금 이후 교과서에 '돌다리', '달밤'과 같은 작품들이 실렸다. 제법 알려진 성북동 카페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1946년 월북 전까지 살던 집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얼마 전 갔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수연산방'은 1999년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개업했다

     

    1914년의 돌다리 단행본
    1934년의 달밤 단행본
    서울 성북동의 수연산방 입구
    그 입구에 선 이태준
    유명 카페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월북 전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이다. / 철원에서 살던 집을 옮겨왔다는 말이 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을 통해 이상(김해경)을 데뷔시키기도 한 이태준은 이상보다도 더 천재적인 문재(文材)를 지녔던 사람으로, 소설의 높은 완성도로써 '조선의 모파상', 혹은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그의 글쓰기 독본 <문장강화(文章講話)>는 지금도 가장 뛰어난 가이드 북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잡지 <문장>에 연재되었던 글을 묶어 발간한 것인데, 그것이 지금껏 회자된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1940년 문장강화 단행본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와 같은 연고로 철원에는 그가 1934년 <농민순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촌뜨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촌뜨기길'이 조성돼 있다. 그의 생가 터가 있는 대마리 용담마을에서부터 노동당사가 있는 철원역사공원 부근까지 이어진 5.4㎞의 시골길이다.
     
    이 길은 달리 특별한 것은 없지만 그 길 자체로 의미가 실린다. '촌뜨기길'은 1912년 일제가 실시한 전국 토지조사령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떠돌이가 되고 만 강원도 촌뜨기 '장군이'가 걸어간 길이기에.... 아울러 백마고지 부근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마을 체험관 마당에는 '상허 이태준문학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이태준의 생가가 있던 마을 길
    두루미평화마을 체험관 마당의 '상허 이태준문학비'
    이태준 흉상
    '상허 이태준문학비' 앞의 철원 시골마을 풍경

     
    하지만 이태준은 살아생전 고향 철원과는 데면데면했는데, 그의 소설 <고향>에는 그 이유가 드러나 있다.  
     
    도일(渡日)했다가 귀국길에 오른 ‘김윤건’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에게는 고향이 없었다. 누가 물으면 강원도 철원이라고 말하겠지만, 막상 대답하자면 그곳에는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러시아 땅 ‘해수애’(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 년 만에 아버지를 잃고 난 후 함경북도 배기미에 와서 사 년 만에 다시 어머니를 잃었다. 다시 그는 혈혈단신으로 원산에 나와 그곳에서 삼 년 동안, 평양으로 가서 일 년 동안, 서울서 오 년 동안, 동경에서 육 년 동안 오늘날까지 모두가 정들고 인연 있는 고장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그리운 고향이랄 곳이 없었다.
     
    이상은 소설 속의 한 대목이지만, 아래 '상허 이태준 문학비'에 새겨진 안내문 속 이태준의 젊은 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허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러시아로 망명한 부친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나 부친의 별세로 귀국하여 함경북도 이진(배기미)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9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천애고아가 되었고 고향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서 자랐다.
     
    1921년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21살 때 첫 작품 <물고기 이야기>를 교지에 발표하고 이듬해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27년 동경에 있는 상지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개벽사 기자, 조선중앙일보 기자 등을 역임하며 단편소설 <산월이> <고향> <불우선생> 등을 써서 문명을 날렸다.....
     

     

    '상허 이태준 문학비' 하단의 안내문

     
    내 생각으로는 이태준의 일생은 이른바 사회주의의 조국 소련을 방문함으로서 틀어진 것 같다. 그는 이미 사회주의에 경도돼 있었으나 1946년 8월 조선쏘련문화협회 시찰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한 후 더욱 사회주의를 동경했다. 두 달간의 시찰을 마친 그는 소련 기행문을 북한에 머물며 정리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여러 잡지에 소련 기행문을 연재했는데, 그 글을 묶어 1947년 5월 서울의 백양당 출판사에서 <소련 기행>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후 1949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32주년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온 후 <혁명절의 모스크바>를 출간했고, 1951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건국 2주년 행사 참관 후 두 달간의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위대한 새 중국>을 출간했다. 
     
     

    '소련기행' / 철원역사문화전시관

     
    소문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구월산 반공유격대가 2번이나 출격해 이태준 구출작전을 폈으나 실패했는데, 한 번은 행방을 찾지 못했고 한 번은 본인 스스로 월남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는 결국 북한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대한민국에서의 대접도 좋을 수는 없었으니 용담리에 있는 그의 생가 터는  진작에 사라져 밭으로 변했으며, 1995년 철원문학회에서 세운 팻말만이 철원 출신의 작가 이태준을 힘겹게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 불명확하니, 그곳이 이태준의 생가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고 그저 그가 잠시 머물던 집이라는 말도 있다. 아마도 이 말이 맞을 듯하다. 팻말이 세워진 대마리 용담 615번지는 이태준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항일 애국지사인 이봉하 선생(1886~1963)의 생가가 있던 곳이라는 것이 현지 사람들의 지배적인 증언이기 때문이다. 철원 도피안사에는 이봉하 선생 등이 결성한 강원애국단에 관한 안내문이 있다.   
     
     

    도피안사 입구의 강원애국단 결성지 안내문
    강원애국단은 철원 출신의 항일애국지사들이 결성해 활동한 비밀 무장결사체이다. / 이 사진은 올해 1월 찍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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