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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은 윤동주와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의 시 60여 편을 듣고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의 시 60편이 가곡으로, 혹은 대중가요로 작곡되었다는 소리인데, 못 잊어 / 진달래꽃 / 초혼처럼 가곡과 대중가요로서 각각 작곡된 노래도 있다. 아마도 이런 예는 김소월의 시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대중가요로 작곡된 시 중에서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들도 있으니 예전 대학가요제 때 라스트 포인트가 부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해변가요제 때 활주로가 부른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역시 소월의 시이다. 희자매의 '실버들', 최진희의 '먼 후일' 아이유의 '개여울', 나훈아의 '부모' 등도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한결 같이 명곡이다. 가곡 중의 20%가 김소월의 시이며, 소월 작시의 노래를 취입해 부른 가수가 무려 328명이라는 말도 있다.
'개여울'은 정미조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을 아이유가 리메이크하였으나 사실은 정미조 역시 1967년 김정희가 부른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작곡가 이희목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당시 KBS 전속 가수였던 신인 김정희에게 주었는데, 이희목의 '개여울'은 그 당시 전국 아마추어 작곡가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한 곡이기도 하다.
그 같은 대중적 인지도에 비해 김소월이라는 시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천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그러하니, 본명이 정식(廷湜)이라는 것과 소월(素月)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소월은 '흰 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업 실패로 힘든 삶을 영위하다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사인이 뇌졸중인지,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 정도....
그런데 이면을 보자면 그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사업가이기도 했다. 평북 정주 태생의 그는 (시인 백석과 고향이 같다) 광산업을 하다 일본인 폭도들에게 맞아 폐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 밑에서 사업가로 성장했다. 청소년기에는 오산학교를 다니다 3.1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서울로 와 배재학당을 다녔다.
오산학교는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3.1운동 때에는 전 학생과 교직원이 참여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그는 이 학교 선생이던 시인 김억에게 시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서울 시절 교류한 문인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왕십리 소월 아트홀을 관리하고 있는 성동문화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김소월은 왕십리에서 하숙을 하며 배재학당을 다닐 때 한국 문단의 유명한 문인들 교류하며 가장 왕성한 작품을 했다고 한다. 아래의 시 '왕십리'는 왕십리 소월의 집을 찾아왔던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우중(雨中)의 빗길에 즐비한 미나리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으로써 쓴 시라 하는데, 그럼에도 그 친구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무튼 시는 좋고, 운율도 김소월의 그것 그대로라서 김소월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할 재간이 없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그는 이 시를 1923년 <신천지> 8월호에 발표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날 소월을 찾아온 사람이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오순'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소월이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 만났던 오순은 소월보다 3살 많은 누나였다. 요즘 말로 연상의 연인으로 소월은 오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고 오순 역시 소월을 사랑했다. 하지만 결혼으로는 이어지지 못했으니 소월은 14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소개한 사업가의 딸 홍단실과 정략결혼과 같은 혼인을 해야 했다. 아울러 오순 역시 비슷한 시기 결혼을 하며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소월은 3년 후 오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의처증이 있던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는데 급기야는 맞아 죽었다는 비보였다. 소월이 얼마나 슬퍼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그는 이때의 슬픔을 '초혼'에 담아 1925년 첫 시집 <진달래 꽃>에 실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하지만 시기적으로 왕십리를 찾아온 사람이 오순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아래의 시 '눈 오는 저녁' 속의 대상은 필시 오순일 가능성이 짙다. 눈이 오는 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슬프지만 행복하기도 하다.
바람 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今年)...
꿈이라도 꾸면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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